영국 BBC, 한국 EBS 본받았어야

[박미숙의 플랫폼미디어 비평] BBC의 유튜브 행은 실망 그 자체 ‘젊은세대와 연결’ 위기 해법 아냐 BBC는 진화 아닌 공영성의 포기 한국EBS, ‘공영성’ 지키며 OTT 확장

영국 BBC본사 건물 앞에 한 여성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영국 BBC본사 건물 앞에 한 여성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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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최근 2035년을 목표로 정규 지상파 방송을 폐지하고 유튜브 등 글로벌 플랫폼 중심으로 이동하겠다고 빌표했다. 이 구상은 기술 혁신이 아니라 공영방송이 스스로 공영성을 축소하는 선택이다.

이 결정은 시청 행태 변화에 대한 ‘적응’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장기간 누적된 재정 압박과 정치적 공격 속에서 공공 인프라를 유지하는 책임을 포기하고 플랫폼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후퇴하는 전략에 가깝다. 공영방송의 위기를 해결하는 해법이 아니라, 공영방송이라는 제도 자체를 가볍게 만드는 선택이다. 우리 공영방송에게는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는가.

젊은세대와 연결하기 위한 거라고?

BBC가 이런 결정을 검토하게 된 배경에는 분명한 구조적 위기가 있다. 수신료 동결과 영국내 인플레이션 누적은 BBC의 실질 예산을 지속적으로 잠식했고, 보수 정부와 민영 미디어는 반복적으로 BBC의 규모와 정당성을 공격해 왔다. 이 과정에서 BBC는 제작비 축소, 인력 감축, 지역 뉴스 약화를 거쳐 이제는 지상파 송출망 자체를 ‘유지하기 어려운 비용’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인식이 공영방송의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흔든다는 점이다.

공영방송은 본래 효율을 최우선으로 설계된 조직이 아니다. 시장 논리로는 유지하기 어려운 영역-보편적 접근, 재난·선거·공적 정보 전달-을 책임지기 위해 존재해 왔다. 지상파는 바로 그 책임을 가능하게 했던 물리적 공공 인프라였다. 인터넷 접속 여부, 기기 보유, 디지털 숙련도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열려 있던 통로가 지상파였다. 이를 폐지하고 유튜브 중심으로 이동하는 순간, 공영방송의 접근성은 ‘권리’에서 ‘조건’으로 바뀐다.

BBC는 이 전환을 “젊은 세대와의 연결”로 설명한다. 그러나 공영방송의 임무는 특정 세대의 소비 방식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 공통의 정보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다. 지상파 뉴스와 공영 프로그램은 사회 구성원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정보를 접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장치였다. 플랫폼 중심 환경에서는 이 동시성과 공통성이 구조적으로 해체된다. 모두가 각자의 알고리즘 안에서 서로 다른 BBC를 소비하는 사회에서, BBC는 더 이상 ‘공영’이 아니다.

사진=BBC홈페이지
사진=BBC홈페이지

돋보이는 EBS의 넷플릭스 접근법

이 지점에서 한국 공영방송과의 비교는 중요하다. KBS, MBC, EBS 역시 심각한 위기 속에 있다. KBS는 수신료 인상 논쟁과 정치적 공격에 시달리고 있고, MBC는 광고 의존도가 높은 구조 속에서 공영성과 상업성 사이의 긴장을 안고 있다. EBS는 교육 공영방송이라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으로 늘 취약하다.

그럼에도 한국 공영방송에서 지상파 자체를 폐지하자는 논의는 아직 공식화되지 않았다. 이유는 명확하다. 지상파는 여전히 재난 방송, 선거 방송,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대체 불가능한 공적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의 문제다. 한국 사회는 암묵적으로 지상파를 ‘비효율적이지만 반드시 유지해야 할 공공 장치’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 공영방송도 유튜브와 OTT를 적극 활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상파를 전제로 한 확장 전략이다. KBS와 MBC의 유튜브 채널은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넓히기 위한 보조 수단이지, 지상파를 대체하는 기반이 아니다. 이 점에서 EBS의 사례는 특히 중요하다.

사진= EBS '지식채널e' 인스타그램 캡쳐
사진= EBS ‘지식채널e’ 인스타그램 캡쳐

EBS는 교육 공영방송이라는 정체성 아래 디지털 협업을 비교적 선제적으로 실험해 왔다. 대표적 사례가 EBS의 〈지식채널e〉 넷플릭스 파트너십이다. 〈지식채널e〉는 짧고 밀도 높은 인문·사회 콘텐츠를 통해 공영 교육 콘텐츠가 글로벌 플랫폼에서 소비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파트너십의 핵심은 지상파를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EBS는 지상파라는 공공 인프라를 유지한 채, 넷플릭스를 추가적 유통 창구로 활용했다.

〈지식채널e〉의 넷플릭스 진출은 “플랫폼으로 이주”가 아니라 “플랫폼을 활용한 확장”이었다. 공영 콘텐츠의 제작 기준과 공공적 책임은 EBS 내부에 남아 있고, 플랫폼은 도달 범위를 넓히는 수단에 그쳤다. 이것이 바로 ‘공영성 중심 전략’이다. 공영방송의 정체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디지털 환경과 접속하는 방식이다.

공영방송의 중심은 어디에 있어야 하나

BBC의 전략은 이와 정반대다. BBC는 플랫폼을 보조 수단이 아니라 ‘중심 인프라’로 삼으려 한다. 이는 공영방송의 유통 주권을 글로벌 플랫폼 기업에 구조적으로 의존하게 만든다. 유튜브(YouTube)의 알고리즘과 정책은 공공성을 기준으로 설계되지 않는다. 조회 수, 체류 시간, 광고 수익이 우선하는 구조에서 공영 뉴스와 다큐멘터리는 언제나 불리하다. 이는 검열의 문제가 아니라, 가시성과 도달이 상업 논리에 의해 재배치되는 구조적 문제다.

EBS의 넷플릭스 협업과 BBC의 유튜브 중심 전환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넷플리스와의 협업조차도 공영성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EBS는 공영성을 중심에 두고 플랫폼을 활용했다. BBC는 플랫폼을 중심에 두고 공영성을 조정하려 한다.

다음 단계는 공영방송 존립 논쟁이 될 것

결국 BBC의 2035년 구상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공영방송이 더 이상 공공 인프라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정치적·제도적 선택이다. 비용 절감처럼 보이지만, 그 대가는 ‘공영방송의 정당성’이다. 지상파를 포기한 BBC는 수신료를 요구할 근거를 점점 잃게 될 것이며, 그 다음 단계는 공영방송 자체의 존립 논쟁일 가능성이 크다.

공영방송의 미래는 플랫폼에 있지 않다. 플랫폼은 도구다. 문제는 공공 인프라를 어떻게 유지하면서 디지털 환경에 적응할 것인가다. BBC의 유튜브행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회피하는 선택이다.

지상파를 끄는 순간, BBC는 더 이상 공영방송이 아니다. 그것은 공적 책임을 지는 제도가 아니라, 플랫폼 생태계 안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하나의 콘텐츠 공급자로 축소된다. 이 점에서 BBC의 선택은 한국 공영방송에게도 분명한 경고다. 공영방송의 위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제도의 문제다. 이를 플랫폼으로 덮는 순간, 공영성은 가장 먼저 사라진다.

글쓴이

박미숙 대중문화 독립연구가

박미숙은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대중문화를 연구했다. 영국에서 한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동아시아학이며 세부 전공은 한국학이었다. 현재 제주도에서 강아지 다섯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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