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국제법, ‘중견국 자율성’은 사치였다

인류애보다 무거운 ‘관세 폭탄’의 무게 캐나다 총리 “美 지지하나 참여 안해” 트럼프 관세압박에 굴복...눈치보기 스페인, 브릭스 일제히 비판하며 푸틴 러 대통령 “미국 국제법 위반”

인도를 방문,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만나서 담화를 나누는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오른쪽).
인도를 방문,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만나서 담화를 나누는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오른쪽).

독립적인 외교 펼치겠다는 캐나다

전쟁은 중견국가들을 또 다른 차원의 딜레마로 몰아넣는다. 무법한 강대국으로부터 노골적인 줄 세우기를 강요당하거나, 인류애와 글로벌 다극화라는 지향점 어린 미래를 잠시 보류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전략적 자율성’을 주창하며 중견국가로서 독립된 외교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해 세계 지도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던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대표적인 사례다.

핵 협상 도중 기습 공격을 당하고 최고 지도자까지 잃은 이란에 대해 일말의 동조적 입장을 취할 법도 했지만, 그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미국의 군사 공격을 적극 지지한다며 일찌감치 대열에 합류했다. 마치 자신이 ‘반미주의자’나 ‘탈미주의자’가 아니라, 철저한 ‘자국 이익 우선주의자’임을 증명하듯 수백 명, 수천 명의 희생이 예견되는 이란의 비극을 외면한 셈이다.

현재 인도를 방문 중인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뭄바이에서 열린 ‘캐나다-인도 성장 및 투자 포럼’에서 공식적인 지지 입장을 발표했다. 그는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저지하고, 국제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이란 정권의 행동을 막기 위한 미국의 조치를 강력히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중동 내 불안정과 테러의 핵심 근원이며, 세계 최악의 인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결코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보유해서는 안 된다”며 원색적인 비난을 이란에 퍼부었다. 또한 그간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란이 핵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았으며, 역내 테러 대리 세력(proxy groups)에 대한 지원도 중단하지 않았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만 캐나다는 이번 군사 작전의 기획이나 전력 증강 단계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향후에도 직접적인 군사적 역할은 맡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여 미국의 합동 군사작전 참여 요구를 선제적으로 차단했다.

지난 1월 다보스 포럼(WEF)에서 외쳤던 ‘중견국(Middle Power)의 전략적 자율성’ 선언의 기개는 온데간데 없고, 지극히 현실적인 이해타산만 남은 성명이었다.

관세 압박에 자존심 꺾은 마크 카니

불과 한 달 사이 마크 카니 총리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이러한 급격한 태도 변화의 이면에는 캐나다가 처한 냉혹한 ‘생존을 위한 현실 정치(Realpolitik)’가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캐나다는 미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탄 압력에 정면으로 노출되어 있다. 트럼프 측은 캐나다산 모든 제품에 25%의 고율 관세를 예고하며 캐나다 경제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다보스에서 “미국 주도의 질서는 끝났다”며 독립 노선을 천명했던 카니 총리였으나, 실제로는 전체 수출의 75%를 차지하는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정권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번 지지는 안보 협력을 지렛대 삼아 경제적 관세 면제를 얻어내려는 고도의 ‘거래적(Deal) 선언’ 성격이 짙다.

카니 총리는 역설적이게도 ‘핵 확산 방지’와 ‘인권’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다보스에서 강조했던 “중견국은 가치(Values)를 지켜야 한다”는 자신의 논리를 오히려 미국 지지의 근거로 활용했다. 이는 캐나다 내 이란계 커뮤니티의 반정부 정서를 의식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대신 “지지는 하지만 참여는 안 한다”며 캐나다군의 직접 파병이나 작전 참여에 선을 그음으로써 최소한의 자율성을 지키려 애썼다.

중견국 외교의 한계는 카니 총리의 얼굴에서 그대로 읽힌다. ‘독립된 중견국의 자존심’보다 ‘미국의 경제 보복으로부터 캐나다 경제를 구하는 것’이 더 시급했던 것이다.

인도를 방문 중인 그는 “미국과의 관계는 유지하되, 인도나 동남아시아로 무역을 다변화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에만 매달리지 않음으로써 협상력을 높이려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다. 낮에는 다보스에서 독립을 외치고, 밤에는 트럼프의 눈치를 보며 지지 성명을 쓰는 중견국의 자화상인 셈이다.

유럽 일부국가도 “美 침략 반대” 목소리

이러한 ‘생존형 줄타기’는 캐나다만의 고립된 현상이 아닐 것이다. 동맹의 결속력이 시험대에 오른 유럽연합(EU)의 군사적 보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내에서도 국제법을 위반한 미국-이스라엘의 공습을 두고 입장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특히 노르웨이와 스페인은 이번 사태에서 ‘반대·신중파’로서의 확고한 입장을 드러냈다. 이들은 미국의 군사 행동이 국제법적 명분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서방 결속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보였다.

스페인 좌파 정부를 이끌고 있는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군사 행동을 거부한다”며 “이번 공격이 국제 질서를 더욱 불안정하고 적대적으로 만든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대안 없는 폭격이 중동에 또 다른 파괴적인 전쟁을 불러올 뿐이라며 즉각적인 긴장 완화와 대화를 촉구했다.

지정학적으로 중동 및 북아프리카와 가까운 스페인은 중동에서의 전면전은 곧바로 난민 유입과 에너지 가격 폭등으로 이어져 지중해 연안 국가인 스페인 경제에 치명상을 입힐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에스펜 바르트 에이드 외무장관 역시 “이스라엘의 공격은 국제법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선제 타격이 인정되기 위한 ‘즉각적이고 임박한 위협’이 증명되지 않았음을 꼬집었다.

사망한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오른쪽)를 만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망한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오른쪽)를 만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브릭스國의 반대...러시아는 “이중잣대” 냉소

반발은 브릭스(BRICS) 국가에도 터져 나왔다. 브릭스 주요국은 아프간 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판하며 이란에 우호적인 목소리를 냈다.

브라질 외무부는 “이번 공격은 외교적 대화를 무시한 처사이며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판했고,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정부는 전통적인 이란과의 에너지 협력 관계를 고려해 “모든 당사자는 최대한의 자제를 발휘하고 대화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중한 중립을 지켰다. 남아공 또한 “예방적 자위권은 국제법상 인정되지 않는다”며 군사적 해법의 한계를 지적했다.

반면, 우크라이나와 4년째 교전 중인 러시아는 이번 상황을 반미 연대를 공고히 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고 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이번 공격이 국제법 규범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라고 비난했으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사망한 하메네이를 “러시아의 진정한 친구이자 위대한 정치가”라고 추켜세우며 애도를 표했다.

푸틴은 특히 서방이 우크라이나에서는 ‘국제법’을 운운하면서, 중동에서는 ‘불법 공격’을 자행한다며 ‘이중 잣대(Double Standard)’를 비난했다. 러시아는 서방이 구축한 ‘국제법의 권위’를 역이용, 미국의 도덕적 우위를 흔들며, 이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선에서의 우위를 굳히려는 심산이다.

미국이 아프간에서 겪었던 동맹의 이탈과 명분 상실이 나토 내에서 재현되는 가운데, 러시아는 이 균열을 파고들며 자신들의 전략적 실익을 챙기고 있는 형국이다.

북한은 ‘역시 핵무기 포기 못해’

브릭스와 러시아의 세련된 외교적 수사와는 달리, 북한은 거칠고 노골적인 비난을 드러냈다.

북한은 조선중앙통신(KCNA) 및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미국의 이란 침략에 대해 ‘날강도적 근성’이라며 날 선 비난을 쏟아냈다. 이란과 오랜 군사·전략적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가장 거칠고 직접적인 표현으로 미국을 공격한 것이다.

북한은 특히 이번 사태를 자국의 핵 보유 정당성을 강조하는 기회로 삼으며, ‘힘이 없으면 이란처럼 당한다’는 논리로 내부 결속을 다지고 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향후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묘한 태도를 보였다.

강력한 중견국가를 꿈꾸는 대한민국은 어떨까. 캐나다의 고뇌는 대미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곧 마주할 ‘강요된 선택’의 예고편일지 모른다. 당장 유가는 급등하고 있다. 우리 역시 생존을 위한 냉혹한 현실 정치의 기로에 서 있다.

글쓴이

문주용 기자

문주용 대표이사 겸 기자는 31년간 언론인 생활을 바탕으로 새로운 언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힘든 세상에서 위로받고 지혜를 얻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이 바라는 미디어를 만들려 합니다. 우공이산의 마음으로 집단지성의 지혜를 쌓을 것입니다. 전문가그룹과 소비자들이 함께 하는 미디어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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