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주의자들, 왜 중앙은행을 노리나
[차현진의 삼라만想] 환경주의자들, 기후변화대응에 ‘팽창적 재정·통화정책’ 압박 한국 정부와 한국은행, 기후협약에 끌려가기보단 주도해야 ‘한국발 글로벌 스탠다드 위해’ 더 적극적이고 창의적이어야
[치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우리나라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과정은 꽤 길다. 1980년대 말부터 우리 정부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심스럽게 가입을 타진하자 OECD 당국이 각종 회의에 한국을 옵저버로 초청했다.
이리저리 ‘간’을 본 우리 정부는 1995년 3월 정식으로 가입신청서를 제출했고, 각종 위원회별로 긴 심사과정을 거쳐 1996년 12월 회원국이 되었다. 하지만 정확히 1년 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맞았다. 거기서 나온 골프 규칙이 ‘OECD 룰’이다. 한 번 자격에 도달하면, 인정사정없이 호된 벌칙이 가중된다.
OECD는 위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어떤 위원회에서 ‘브레인 드레인(Brain Drain)’ 문제를 다뤘다. 선진국들이 과거 식민지였던 후진국의 인재들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주고 학업을 돕지만, 그 인재들은 결국 자기 나라를 떠나 선진국에 안착한다. 후진국의 인재는 선진국의 고급 노동자가 되어 선진국 국민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남북문제(국가간 빈부격차)는 고착된다. 선의와 인류애를 가장한 ‘착취’다.
그런데 그 회의에 참가한 우리나라 공무원이 소위 ‘주제 파악’을 못 했다. ‘브레인 드레인’이라는 고담준론을 ‘후진국 노동자의 불법취업’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는 “한국은 몽고 등 주변국의 불법 노동자를 발본색원하고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회의장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OECD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그것은 코미디 아닌 코미디였다. 그러나 지나간 일도 아니다. 지금 기후변화와 녹색금융을 둘러싸고 세계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정부나 민간이나 나라 밖 사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오는 11월 초 영국 글래스고우에서 UN 기후변화협약 총회(COP26)가 열릴 예정이다. 여기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참석하여 기후변화 문제를 심도 있게 토의한 뒤 굵직한 행동강령을 발표할 예정이다.
장차 수 십 년 간 각국을 지배할 ‘글로벌 스탠다드’가 다듬어지는 자리다. 거기서 한국 정부는 무슨 보따리를 풀고, 어떻게 국익을 방어할 것인가? 준비 없이 참가했다가는 국익은커녕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기후변화 대응, 전통 경제학의 벽을 뚫는 것이 ‘관건’
지난 4~5년 간 국제사회에서 내로라하는 학자와 정책결정자들은 기후변화에 관하여 걱정 섞인 촌평을 마다하지 않았다. 기후변화가 지구촌 최대의 난제인 만큼 정부와 중앙은행들을 향해 행동을 촉구해 왔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위기 이후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들이 경기회복에만 정신이 팔려서 석탄, 석유화학, 항공 등 탄소배출이 유난히 많은 분야에 돈을 쏟아 부었다고 비판했다. 반면 환경을 위한 투자와 지출은 인색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기후변화 문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기술발전과 함께 지구온난화 문제는 자연스럽게 극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뼛속까지’ 시카고학파인 존 코크레인 교수는 기후변화로 인한 경제시스템의 붕괴보다는 바이러스, 해킹, 과도한 외채와 국채가 더 크고 실질적인 위협이라고 지적한다(그의 부친과 장인도 작은 정부를 옹호하는 시카고학파다. 특히 장인인 유진 파마는 자본과 자산의 효율적 배분이 시장을 통해 이뤄진다는 CAPM 이론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홍수와 산불이 걱정된다면 돈을 더 풀기보다 저지대와 산악지대에 대한 대출과 투자를 줄이는 것이 중앙은행의 과제라고 꼬집는다. 기술의 가치평가와 투자는 시장에 맡기라는 말이다.
특히 중앙은행이 기후변화 문제에 나서는 데 대해서는 보수파 또는 주류경제학자들이 강경하게 이의를 제기한다. 마빈 킹 전 영란은행 총재는 “중앙은행이 물가안정을 넘어 기후변화 문제까지 신경 쓰는 것은 통화정책을 정치에 노출시킬 뿐”이라고 경고한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오랜 시행착오를 통해 도달한 물가안정목표방식(inflation targeting)을 후퇴시킨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정부와 중앙은행들은 기후변화 문제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지난 3~4년 간 동안은 현대화폐이론(MMT) 진영에서 고용확대를 앞세워 팽창적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요구했다면, 앞으로는 환경주의자들이 인류의 미래를 앞세워 팽창적 재정·통화정책을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그 요구에 부응하는 순간, 야당은 재정준칙을, 주류 경제학계는 중앙은행의 일탈을 앞세워 이의를 제기할 것이 분명하다. 인류의 미래가 달린 기후변화 문제에 잘 대응하려면, 전통적 견해들과 타협하거나 극복하는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경제철학을 요구해
코로나19 위기가 터졌을 때 과학계에서는 수 년 뒤에나 백신이 개발될 것으로 예측했다. 모든 전염병은 치료제가 개발된 뒤 백신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19가 그 순서를 바꿨다. 그것은 과학계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정부의 승리이기도 하다. 인류 최대의 위기 앞에서 각국 정부가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만일 각국 정부가 과거의 관념에 사로잡혀 돈 쓰기를 주저하거나 치료제 개발에만 매달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틀림없이 전 세계는 지난 해 4월의 공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경험이 만든 재정준칙에 얽매이거나 쓰레기 줍기 따위의 눈에 보이는 노력만 기울이면, 인류의 미래는 암담하다. 환경이라는 인류 최대의 공공재를 가꾸고 보전하는 데 시장의 힘만으로 어렵다. 정부가 나서야 하는 이유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국가채무비율의 상승은 어쩔 수 없는 대세다. 얼마를 쓸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잘 쓰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현명하다. 정부부문의 효율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통화정책의 효율성도 중요하다. 애덤 스미스 이래 전통적인 경제철학에서는 민간의 경제활동이 부의 원천이고 화폐공급의 기준이었다. 생산과 상거래 과정에서 민간 기업이 발행하는 어음(상업어음)을 은행이 할인하고, 그것을 중앙은행이 다시 할인하는 것이 서양 금융시스템의 기본이 되어왔다. 그럼으로써 화폐공급과 실물경제의 연결이 보장되었다(이것을 진성어음주의라고 부른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 연준의 영향으로 이제는 상당수 국가에서 민간과 정부의 순서를 뒤집었다. 민간에 대한 대출이 아닌, 국채 매입이 통화정책의 중심을 차지한다. 국채가 가장 안전하고 유동성이 높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것은 금본위제도하에서 금을 최고의 자산으로 생각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정부를 조물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채 중심의 공개시장조작은 우상숭배에 가깝다. 국채와 금융시장을 지렛대로 이용해 온 지금의 통화정책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후변화 대응, 수동보다는 능동을 추구하자
다음 주 미국 와이오밍 주에서 열리는 잭슨홀 미팅은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들의 모임이다. 지난해 이 모임에서는 파월 미 연준 의장이 평균물가목표방식(average inflation targeting)이 발표하고 정책전환을 시사했다. 그런데 금년 잭슨홀 미팅의 주제는 경제불균등(Macroeconomic Policy in an Uneven Economy)이다. 경제양극화를 포함한, 계층간, 국가간 격차 확대를 다룰 예정이다. 소득재배분은 중앙은행과 통화정책의 영역 밖이라고 치부해 왔던 전통적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는 파격이다. 그만큼 경제불균등 문제가 심각하다.
머스그래이브(Richard Musgrave)가 주창한 이래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희소자원의 배분이나 소득재배분은 정부가 할 일로 여겨왔다. 자원배분과 소득재배분은 정치적 타협이 핵심이므로 선거로 구성된 정부가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유다. 반면 중앙은행이나 금융감독 당국의 역할은 물가안정과 금융안정과 같은 기능적 문제 즉, 균형의 유지에 국한된다는 생각이 지배해 왔다. 균형유지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중앙은행들까지 경제불균등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인류의 미래와 기후변화를 고민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기후변화의 충격을 보고서를 통해 분석하거나 예고하는 수준에 머물지 말고, 행동을 통해 실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팔을 걷어붙이고 대출을 통해 돈을 푸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는 고민해야 한다. 그에 대한 점검과 준비를 마치고 문재인 대통령이 UN 기후변화협약 총회(COP26)에 참가한다면, 전 세계가 한국의 계획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요컨대, 기후변화 대응이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피할 수 없는 숙제라면, ‘한국형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남이 만들어 준 옷에 몸을 맞출 생각만 하면, ‘OECD 룰’에 걸려 낭패하기 쉽다. 태권도가 올림픽 공식종목이 된 것처럼, 한국형 재정·통화정책을 기후변화 대응의 글로벌 스탠다드로 만들어야 국격이 높아지고, 국익이 증진된다.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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