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고민, 미국의 고민, 한국의 고민
[차현진의 삼라만想] 우크라이나 사태가 던지는 질문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습은 현대전은 군사력으로만 판가름 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결사항쟁 의지와 서방의 빗발치는 비난 속에서 러시아군은 침략자 답지 않게 의기소침한 모습이다.
전황이 녹녹치 않을 뿐만 아니라 후방의 경제상황은 더 참담하다. 유럽연합(EU)의 금융제재에 따라 러시아는 세계 4위의 외환보유액 중 절반 이상을 쓸 수 없다. 70% 이상이 묶였다는 보도도 있다. 루블화의 가치가 곤두박질치는 가운데 중앙은행이 결국 금리를 9.5%에서 20%로 난폭하게 인상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그래도 백약이 무효하다. 조만간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리라는 전망도 나오기 시작한다. 급기야 러시아는 민간지역에도 폭격을 시작했다. 스웨덴 같은 중립국조차 우크라이나에게 무기를 공급하려고 하니 빨리 항복을 받아내려고 안달이 난 것이다. 침공 열흘이 되어가는 지금 러시아는 수렁에 빠진 것이 확실하다.
전쟁을 하려면 수중에 돈을 갖고 있어야
러시아가 이렇게 된 이유는 나라 안팎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내부에서 경제전문가들의 전쟁 준비가 상당히 안이했다고 보인다.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상태(autarky)를 대비하는 것이다. 에너지와 식량이 확보되어야 하고, 국제유동성을 손안에 쥐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금을 갖고 있다. 세계 8위다. 인구를 감안하면 압도적 1위다. 게다가 그 금의 70%를 국내에서 보관하고 있다(나머지 20%는 영국, 10%는 캐나다에 맡겨두고 있다). 몇 년 전에는 해외에 있는 금까지 몽땅 국내로 갖고 오자는 제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지기도 했다(2014년 부결).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이건 러시아건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일본의 경우 1904년 러일전쟁을 치르기 전에 다카하시 재무상이 런던에서 네 차례에 걸쳐 국채를 발행하고 그것으로 금을 축적했다. 독일의 경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기 5년 전부터 금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황제 빌헬름2세가 전쟁을 치르기 전 중앙은행에게 그렇게 명령했다.
모름지기 그 정도는 되어야 전쟁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러시아의 경제전문가들은 분식회계를 통해서 숫자놀음만 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러시아중앙은행은 2020년 5월 돌연 과거 2년 치 연차보고서를 소급해서 수정했다.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의심이 가는 것이 있다.
러시아 금융계는 분식회계에 안주했다고 보여
2014년 크림반도 분쟁이 생기기 전 러시아중앙은행의 자본비율(자본/총자산)은 15% 정도였다. 그런데 2018년 수정된 자본비율은 29%다. 중앙은행의 자본비율이 4년 사이에 이렇게 뛰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이후 2년 동안(2019~2020년) 손실이 계속 발생했는데도 2020년말의 자본비율은 35%(17.6조 루블/50.3조 루블)로 더욱 상승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분식회계다. 더구나 35%라는 자기자본 비율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수치다. 중앙은행은 법정화폐를 발행하기 때문에 자본이 거의 무의미해서 자본비율이 보통 1~4% 수준에 머문다(한국은 4%). 한마디로 말해서 러시아중앙은행은 무척 엉성하고 무성의하게 분식회계를 하는 것으로 전쟁을 준비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러시아중앙은행은 왜 이렇게 무리하게 분식회계를 했을까? 장차 전쟁이 시작되면, 정부대출이 확대되고 각종 재무비율이 악화되는 것이 자명하다. 그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신용등급은 강등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미리 회계장부를 조작하여 엄청나게 견실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그런 화장술이 통할 틈도 없이 서방세계가 곧바로 금융제재에 들어갔다. 서방 언론이 예측했던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지난 2월 24일 EU 집행부가 SWIFT망에서 러시아 금융기관들을 차단하기로 함에 따라 러시아는 이제 국제사회에서 고아가 되어 버렸다.
물론 러시아도 약간의 대비는 있었다. 2017년 러시아중앙은행이 SWIFT에 대응하기 위한 독자적 국제 금융통신망(SPFS)을 출범시켰다. 지난해 말 미국이 SWIFT망 차단 가능성을 시사하자 중국으로 달려가서 중국의 국제위안회결제시스템(CIPS)과 연계하는 방안도 협의를 마쳤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 뒤에 딱히 진전된 것이 없다. 전쟁준비를 하는 척만 했다고 봐야 한다. 만일 푸틴이 이런 사실들을 알면, 크게 한숨을 쉬리라. 그리고 준비부족으로 시작된 전쟁의 출구전략을 고민하게 되리라.
진짜 속이 타는 것은 미국
하지만 대(對)러시아 금융제재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러시아는 피를 철철 흘리는 외상을 입은 반면, 미국은 남모르는 내출혈을 겪고 있다고 보면 된다. 미국이 아직까지 좌지우지 하는 SWIFT는 영원무궁하지 않기 때문이다.
SWIFT는 금융기관들만 상대하는 민간 유선통신사다. 독점기업이 아니다. 그러므로 SWIFT를 향해 북한, 이란, 러시아 등 접속차단 대상들을 자꾸 늘리는 것은 일종의 영업방해다. SWIFT가 경쟁사들에 비해 경쟁력을 잃어 뒤쳐지게 된다. 앞에서 말한 CIPS, SPFS 이외에 서방세계에서도 대여섯 개의 경쟁사들이 있다. 최근에는 아랍권에서 BUNA라는 통신망이 등장하여 SWIFT와 경쟁하고 있다. 블록체인기술이 나온 뒤 등장한 이더리움이나 리플(Ripple)은 보안과 비용 면에서 SWIFT를 위협하기에 충분하다.
이번에는 SWIFT를 통한 대러시아 금융제재가 성공하겠지만, 길게 보면 SWIFT의 경쟁상대들이 도약하는 계기가 마련되어 미국의 달러패권이 잠식당하게 된다. 중국이 이번 사태를 “미국이 자기 발에 총을 쐈다”고 지적하면서 “위안화의 국제화에 좋은 계기”라고 언급한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서방의 모든 금융기관들에게 계속 SWIFT를 이용하라고 압박할 수도 없다. SWIFT는 민간 유선통신사일 뿐이다. 지금은 뉴욕소재 미국계 금융기관들이 거의 100% SWIFT를 이용하지만, 그 시장점유율이 한번 낮아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

한국의 고민도 시작돼
러시아는 SWIFT가 미국의 먼 영토(long-arm jurisdiction)라고 본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방국과 그 금융기관을 향해 계속 SWIFT를 이용하도록 도의적 설득을 하는 것 뿐이다. 그 설득은 달러패권의 명운과 관련되기 때문에 미국도 심각할 수밖에 없다.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설득을 넘어 압력이 되기 쉽다.
산업의 표준을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은 과거에도 흔했다. 19세기 중반 철도의 궤도폭(협궤, 표준궤, 광궤)을 둘러싸고 국가 간 주도권 경쟁이 있었고, 20세기 초반에는 전압(110V와 220V)을 두고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세기 후반에는 비디오 출력방식(VHS, betamax, Pal) 대결로 표출되었다. 지금은 안드로이드와 애플 간 스마트폰 OS의 대결로 계속되고 있다. 한결 같이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는 망산업(network industry)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금융통신망도 그러하다. 망산업에서는 세력을 이루는 것이 곧 강자다. 경제를 넘어 외교와도 관련된다는 말이다.
지금 한국에게는 여러 개의 선택이 놓여 있다.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SWIFT, 중국의 CIPS, 아랍권의 BUNA, 나아가 블록체인기술 기반의 이더리움과 리플까지 그 선택지가 아주 많다. 그렇다고 행복하지는 않다.
철도궤도와 전압과 비디오와 스마트폰에서 그랬듯이 한 번의 결정이 두고두고 후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소니사는 비디오 출력방식에서 베타막스를 지나치게 고집하다가 결국 사운까지 기울었다. 그러니 한국은 여러 가지 선택지를 두고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SWIFT를 계속 고집하기도, 쉽게 벗어던지기도 곤란하다.
그런 중차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 한미 우호관계를 어디까지 생각해야 하나? 그 결정은 어떤 기관이 내려야 하나? 한국은행(지급결제업무)? 금융위원회(금융기관 감독)? 기획재정부(외국환업무)? 외교통상부(한미관계)? 지금부터 신중히 고민해야 한다. 아직 시간은 조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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