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데 보름달 뜰까...’보름’ 너 어디서 왔니?

[박만규의 에티모버스(Etymoverse)]

  • 박만규 교수의 ’에티모버스‘ (Etymoverse)
  • ‘에티모버스’는 어원을 뜻하는 étymology와 우주를 뜻하는 universe를 저자가 합성한 말이다. 역사를 모르면 현재의 올바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말은 우리가 쓰는 언어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무심코 쓰는 어휘들의 어원에는 개념이 처음 형성될 당시 사람들의 사유가 비유와 함께 담겨 있어 인류의 사물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심오한 세계관을 알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는 이후 변화의 궤적 탐색을 통해 지금 우리 생각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게 해 주고, 이로써 우리의 미래를 바꿀 수 있게 해 준다.

[박만규 아주대 불어불문학 교수] 추석의 상징은 뭐니 뭐니 해도 보름달이다. 밝게 빛나는 커다란 보름달을 보면 마음도 풍성해지고 소원을 빌면 꼭 이루어질 것도 같다. 그렇다면 우리말 ‘보름달’의 ‘보름’은 무슨 뜻일까? 심심풀이 퀴즈로 풀어보자.
⓵ 가득참 ⓶ 한가운데 ⓷ 밝음 ⓸ 바람(희망)

우선 ⓵’가득참’은 여러 언어의 지지를 받는다. 실제로 한자어에 ‘가득찬 달’이라는 뜻의 ‘만월’(滿月)이라는 단어가 있고, 이는 ‘마뉴에’(mǎnyuè)라는 발음으로 현대중국어에도 존재한다. 또한 일본어에도 ‘만게츠’(まんげつ)라는 말이 있는데 역시 같은 뜻이고 ‘満月’로 표기된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어에서도 보름달을 ‘가득찬 달’이라는 뜻의 full moon이라 하고, 프랑스어의 pleine lune, 스페인어의 luna llena, 독일어의 Vollmond, 러시아어의 полнолуние 모두 `가득찬 달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많은 언어권에서 이 같은 의미로 보름달을 개념화하고 있으니 ⓵을 정답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을 한 것이다. 어쩌면 외국어 실력이 출중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한국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불행히도 우리말의 ‘보름’은 그런 뜻에서 파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⓶’한가운데’는 어떠한가? 이것도 매우 매력적인 설명이 될 듯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보름달은 ‘한 달 중 한가운데에 뜨는 달’를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15일에 뜨는 둥근달. 사실 초하루부터 15일째 되는 날을 보름날이라고 하며, 또 우리는 15일의 기간도 ‘보름’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그럴듯한 해석도 역시 ‘보름’의 어원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는 ‘보름’이 아니라 ‘한가위’의 어원이 된다. 한가위는 음력 8월의 보름달을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 ‘한’은 ‘큰’[大]이라는 뜻이고 ‘가위’는 신라의 ‘가배’(嘉俳)에서 유래한 말로 현대 한국어의 ‘가운데[中]’라는 뜻에 해당한다.

우선 ‘한’이 ‘큰’을 뜻하는 예는 ‘한길, 한낮, 한밤, 한숨’ 등에서 찾아볼 수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큰-아버지’, ‘큰-어머니’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예가 풍부하다. ‘가배’는 가운데를 뜻하는 어근 ‘갑’에 접사가 붙은 형태에서 음운 변화를 거쳐 ‘ㅂ’이 탈락하고 ‘가외’를 거쳐 ‘가위’가 되었다.

요컨대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 즉 음력 팔월 보름날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가을인 음력 7, 8, 9월 중 추석에 해당하는 8월이 가을의 중간이기 때문에 ‘중추’(仲秋 또는 中秋)라고 불렀는데, 이로부터 추석을 이르는 말인 ‘중추절’(中秋節)이 나왔다. 그리고 보름달이 뜨는 8월 15일은 이 중 달빛이 가장 밝은 날이라 ‘월석’(月夕)이라 하였는데, 이 ‘중추’와 ‘월석’ 등이 합쳐져 ‘추석’(秋夕)이 되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가을 저녁’이 되므로 추석은 가을 저녁 중에서는 가장 달빛이 밝은 날이라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찹쌀로 만든 얇게 구운 과자 껍질로 팥소를 감싼 일본식 과자 ‘모나카’를 어렸을 때 보았던 생각이 나는데, 이는 일본어로 ‘最中’(もなか), 그러니까 ‘한가운데’라는 뜻, 즉 ‘한가위’에 해당한다. 과자 모양이 한가위의 보름달처럼 둥글다고 해서 붙인 명칭이라 한다. 좀 길게 이야기했지만 아무튼 ⓶번의 ‘가운데’는 ‘한가위’의 어원일 뿐, ‘보름’의 어원이 아니어서 정답이 아니다.

‘가득하다’, ‘한가운데’ 보다는 ‘밝음’, ‘바람’ 뜻 보름은 ‘바라는 마음’을 간절함 담은 말

그렇다면 ‘보름’은 어디서 왔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먼저 ‘밝다’의 명사형 ‘밝음’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불’(火)에서 색깔을 나타내는 ‘붉다’와 밝기를 나타내는 ‘밝다’가 파생되었다는 것이다. 불은 기본적으로 붉은 색이니 ‘불’에서 ‘붉다’라는 형용사가 나온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한 붉으면 밝은 것이므로 ‘붉다’와 함께 이와 유사한 의미인 ‘밝다’가 파생된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보름’은 ‘밝다’의 명사형 ‘밝음’에서 왔다는 것이다. 사실 차고 기우는 달의 모습 중에서 가장 밝은 것이 보름달이므로 쉽게 이해가 된다. 요컨대 ‘보름달’은 ‘밝음달’에서 왔다는 설이다. ⓷은 이 학설에 의해 충분히 지지된다.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를 희망한다는 뜻을 가진 ‘바라다’의 명사형 ‘바람’(望)에서 ‘보름’이 왔다는 설이다. 보름달을 한자어로 만월(滿月)이라고도 하지만, ‘망월’(望月)이라도 함을 볼 수 있다. ‘망월동 국립묘지’의 예도 그것이다. 또한 보름달이 뜬 날, 즉 15일을 ‘望日’(망일)이라고 하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많은 국어학자들이 ‘보름’이 ‘바람’에서 기원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팔월 보름날, 즉 추석날에 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가 송편을 빚고 다양한 음식을 준비하여 차례를 지내는 일인데, 이 제사라는 것이 조상님들에게 풍요에 대한 우리의 바람을 전하는 행사가 아니겠는가?

보름날, 즉 ‘바람-날’은 온 마을, 온 나라가 한해 농사의 수확을 보는 날이어서, 수확한 곡식의 양이 최고조에 달하여 한해 가운데 가장 풍요로운 날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풍요가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행사를 하는 최적의 날인 것이다. 바로 이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즉 추석날만 같아라’라고 기원했다. 농경사회에서는 수확의 풍요가 연중 최고의 바람이라는 점에서 ‘보름’은 ‘바람’의 의미에서 출발한 것임에 큰 설득력이 있다.

한편 추석 말고 또 다른 중요한 보름날로 바로 음력 정월 대보름이 있다. 이날 땅콩, 호두, 잣, 밤, 은행 등을 먹는 풍습이 있는데, 우리는 이 견과류를 ‘부럼’이라고 칭한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부럼’도 일년 내내 건강상의 ‘밝음’을 기원하기 위해 먹는 것인 만큼 여기에서 기원하는 말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고 보면 ⓸에 정답의 무게가 간다.

고생한 아내 눈망울 바라보기

‘밝음설’과 ‘바람설’, 두 학설 모두 좋다. ‘밝은 달’이면 마음이 밝아져서 좋고, ‘바람 달’이면 소원을 바랄 수 있어서 좋으니까. 하지만 나는 후자가 조금 더 끌린다. 왜 추석이면 사람들이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는지까지도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보름달을 그냥 ‘본다’고 하면 좀 밋밋하고 ‘바라본다’고 해야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바라보다’는 ‘바라다’와 ‘보다’가 결합하여 형성된 말로, 바라면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를 보는 것과 그대를 바라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눈망울의 깊이가.
올 추석을 지낸 뒤엔 보름달뿐 아니라 고생한 아내의 눈망울도 바라보자.

글쓴이

박만규 아주대 교수

박만규 아주대 불문과 교수는 언어에 관한 다양한 주제, 특히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언어, 어원과 인간의 사유, 한국어와 영어/프랑스에 나타난 세계관의 차이, 현대 프랑스 문화의 기원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사전학회와 한국프랑스어문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프랑스정부 학술공로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설득언어’(베가북스)와 ‘빛나는 당신이 있다면 촛불을 켤 필요가 없다’(씨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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