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트는 대로 흐른다
[박만규의 에티모버스’(Etymoverse)’] ‘불난 끝은 있어도 물난 끝은 없다’는 속담 불보다 더 무서운 물...물꼬 잘 트는게 중요 물처럼 정치도 민심이 잘 흘러가게 해야
- ‘에티모버스’(Etymoverse)’는 어원을 뜻하는 Etymology와 우주를 뜻하는 Universe를 필자가 합성한 말이다. 어원에는 옛사람들의 사고가 비유 속에 담겨 있어 세계에 대한 인류의 다양하고 심오한 사유를 알게 해준다. 이는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물은 강력함과 연약함 ‘이중 이미지’
중부 지방에 쏟아진 기록적인 집중호우로 인해 비 피해가 엄청나다. 인명 피해까지 발생했는데 앞으로도 더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니 온 나라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때아닌 제 2의 장마라고도 한다.
‘장마’는 ‘長마ㅎ’에서 온 말로 ‘마ㅎ’는 ‘물’을 뜻한다. 곧 오래 내리는 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물이 짧은 기간 내에 집중적으로 내리면 큰 피해를 입힌다.
‘불난 끝은 있어도 물 난 끝은 없다’는 속담이 있다. 화재(火災)가 나면 타다 남은 물건이라도 있지만, 수재(水災)가 나면 모든 것이 쓸려나가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에 물이 불보다 무섭다고 보는 우리 선조들의 경험칙을 담고 있는 말이다. 본래 조용하게 흐르는 물이 때로는 이처럼 큰 화를 입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에 나타난 물의 이미지는 이같이 무섭고 강력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연약한 이미지이다. ‘누구를 물로 보냐?’라는 표현이 이를 말해 준다. 자신을 하찮게 보거나 쉽게 생각하는 듯할 때 항변하며 쓰는 말이다. 또 여리고 단단하지 않다는 뜻의 ‘무르다’라는 말도 ‘물’에서 파생된 어휘인데(믈[水]+으[첨가음]+다[어미]), 이는 무언가가 단단하지 않은 것은 그 안에 물기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이 ‘무르다’에서 ‘물렁물렁하다’도 나왔다. 물론 여기서 다시 ‘말랑말랑하다’, ‘몰랑몰랑하다’와 ‘물씬물씬하다’도 나왔으니 그 파생력이 엄청나다.
‘물’의 파생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살이 상하여 문드러진다는 뜻의 ‘짓무르다’도 ‘무르다’에 접두사 ‘짓’이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짓’은 동사 앞에 붙어 ‘마구’, ‘함부로’, ‘몹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인데, ‘짓누르다’, ‘짓밟다’, ‘짓이기다’ 등에서 그 사용례를 볼 수 있다. 얼핏 ‘물’과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문드러지다’, ‘물크러지다’ 등도 모두 ‘물’에서 파생된 단어들이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다루거나 대할 만하다는 의미로 자주 쓰이는 ‘만만하다’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의 ‘만’도 ‘물’을 뜻하는 말이다.
이상의 모든 단어들이 한결같이 물이 무르다는 개념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물의 무른 이미지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 ‘물에 물 탄 것 같다’라는 표현이다. 매우 흐리멍텅하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물은 ‘맑다’, 즉 투명하다는 이미지를 갖는다. 이 ‘맑다’는 말도 ‘물’의 ‘ㅜ’ 모음이 ‘ㅏ’로 교체되면서 파생한 말이다. 생선이 싱싱할 때 ‘물이 좋다’고 하는데 이것도 맑고 투명한 모습을 가리키는 데에서 온 것이다.
물은 물기나 습기가 많다는 개념으로 손쉽게 확장되는데, 뻑뻑하지 않고 물기가 많다는 의미의 ‘묽다’가 ‘맑다’에서 모음교체에 의해 파생된 말이라는 것을 보면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밥 따위를 물에 말아 먹는다고 할 때 쓰는 ‘말다’도 ‘물’에서 온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마르다’도 ‘물’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이 없어진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은 유약한 물의 개념들과는 달리, 우리 민족에게 물은 때로 ‘무서운 대상’으로 개념화되기도 한다. ‘물 퍼붓듯’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성난 비의 모습으로부터 물의 공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요즘 우리는 정말로 ‘물 퍼붓듯’ 하는 장맛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린다.
물은 항상 낮은데로 흐른다...물꼬를 잘 터줘야
사실, 물은 본래 평온하게 있지만, 굴곡을 만나면 소용돌이를 친다. 그래서 ‘물도 가다 구비를 친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평범한 사람의 한평생에도 굴곡이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이같은 사고방식은 우리나라의 지명에도 많이 남아 있는데, 경북 ‘구미’(龜尾)는 ‘굽다’와 ‘미’(=물)로 구성되어 물이 굽어 흐르는 마을을 뜻한다. 경남 양산에는 ‘물금’(勿禁)이 있는데, 여기서 ‘물’(勿)은 ‘물’(水)의 음차로서 물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과거에 물난리가 많이 난 곳이어서 적극적으로 물을 회피하려는 의지를 담은 지명이라 하겠다. 전북 임실 덕치면에는 ‘물우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여기서 ‘우’(憂)는 걱정을 뜻하는 말이어서, 이 고장 역시 섬진강에 둘러싸여 홍수 피해를 자주 입기 때문에 이를 우려하여 지은 이름이다.
그런데, 단기간에 비가 많이 와서 아래로 한꺼번에 모이면 홍수가 되는 것이므로, 물이 화를 입히는 대상으로 돌변하는 것은 물은 항상 ‘낮은 데로 흐른다’는 물의 근본적인 속성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가 반영된 말로 ‘물매’라는 단어가 있는데, 지붕, 낟가리 등의 경사진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물’과 ‘매(모양)로 구성된 말로서, 이 ‘물의 모양새’라는 개념은 결국 물이 기울어진 곳을 타고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 하겠다. 우리 한옥의 지붕의 경사는 바로 물이 흘러내리는 모양을 본뜬 것이고, 이는 지붕에 비가 내리면 그 방향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물이 흐르도록 만들기 위함인 것이다.
물이 한꺼번에 아래로 몰려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큰 피해를 입힌다. 그러나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옛말에 ‘물은 트는 대로 흐른다’고 하는 말이 있다. 이는 사람은 가르치는 대로 되고, 일은 주선하는 대로 된다는 뜻이다. 물의 흐름을 막지 말고 물꼬를 잘 터주면 된다. ‘물꼬’는 논의 물이 잘 빠져 나가도록 만든 작은 도랑을 뜻하는 ‘물곬’에서 비롯된 말이다. 위험이 덜한 곳으로 물의 방향을 틀어주면 된다.
우리의 홍수대책이 이 정신을 본뜨면 되지 않을까 한다. 즉 기상예보를 최대한 일찍 하고 댐의 물을 최대한 일찍 방류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건설된 우리의 물길들이 안전한 곳으로 흐르고 있으며 물꼬를 충분히 효율적으로 터주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기억하자!
물은 항상 낮은 데로 흐르고, 물은 항상 트는 대로 흐른다는 것을.
어쩌면 정치도 그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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