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대하드라마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

[박미숙의 플랫폼미디어 비평] ‘대하드라마’라는 집단 기억의 틀 정부 지원 통해 적극 제작해야

2004~2005년 방영됐던 KBS 대하 역사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2004~2005년 방영됐던 KBS 대하 역사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 [핵심요약]
  • -OTT 중심의 드라마산업 변화로 제작비가 많이 드는 정통 사극는 고사하고, 가벼운 퓨전 사극만 생존하고 있는 현실.
  • 사회의 ‘집단 기억’을 형성하는 틀이다. ‘집단 기억’을 형성하는 틀이다. KBS 대하 드라마 「정도전」처럼 왕권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국가 설계를 어떻게 할 것이며, 어떤 정치 철학을 고민했는지를 대중에 각인시키는 도구였다.
  • ‘문화 자산’ 관점에서 접근해야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KBS의 재정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의 공적 기금 지원 및 시즌제 등 제작 방식의 혁신이 필수적 이다.
  • 결론: 역사 드라마를 포기하는 것은 사회의 기억과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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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환경 속 사라진 정통 사극

요즘 사극 드라마의 풍경은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보듯 오늘날 많은 사극은 역사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극의 외피만을 입은 채 역사적 사실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다.

궁중 의상과 시대적 배경만 차용할 뿐 실제 역사적 사건이나 정치 구조, 사회적 맥락을 깊이 있게 다루는 작품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특히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정통 사극은 빠르게 사라지는 장르가 되었다.

OTT 플랫폼의 등장 이후 드라마 산업이 글로벌 시장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제작 환경 역시 크게 변화했다. 긴 제작 기간과 대규모 제작비가 필요한 정통 대하 드라마는 이러한 산업 구조 속에서 점점 제작되기 어려운 장르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드라마가 사라지는 현상을 단순한 산업 변화로 이해해도 되는 것일까. 이 글은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대하 드라마는 과거를 기억하는 장치

대하 드라마는 단순한 장르가 아니라 사회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과 연결된 문화적 장치다. 공영방송 KBS가 대하 드라마를 제작해 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하 드라마는 역사적 사건을 ‘서사’로 재구성하면서 사회가 공유하는 ‘집단적 기억’을 형성한다. 사회학자 모리스 알바흐스는 기억이 개인의 머릿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틀 속에서 유지된다고 설명했다.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기억은 교육, 기록, 문화 콘텐츠 같은 제도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된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이러한 기억을 형성하는 중요한 매체다.

그러나 ‘집단 기억’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과거를 반복적으로 재현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 기억이 구성되는가이다.

대하 드라마는 특정 역사 사건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억하도록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각각의 작품이 어떤 역사적 메시지를 남겼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4년 방영됐던 KBS 대하 역사드라마 정도전.
2014년 방영됐던 KBS 대하 역사드라마 정도전.

조선이라는 국가제도와 정치 사상을 드러낸 「정도전」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가 KBS 대하 드라마 「정도전」(2014년)이다. 이 드라마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정치 사상가 ‘정도전’의 역할을 중심으로 국가 설계의 문제를 서사화했다. 많은 역사 드라마가 왕권 중심 서사를 강조해 왔다면 이 작품은 국가 제도와 정치 사상의 문제를 전면에 배치했다.

드라마 속에서 ‘정도전’은 새로운 국가를 설계하려는 정치 사상가로 등장한다. 그가 강조한 것은 단순한 왕권 강화가 아니라 제도와 법을 통해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 질서였다.

드라마는 결국 이방원에 의해 정도전이 제거되는 역사적 결말을 따르지만, 그 과정에서 시청자에게 남는 것은 권력 투쟁의 승패가 아니라 ‘국가 설계’라는 문제였다. 즉 이 작품은 조선 건국을 왕권의 승리라는 사건으로만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어떻게 설계되는가라는 질문을 집단 기억 속에 남긴다.

전쟁에 빠진 국가의 전략적 선택을 고뇌한 「불멸의 이순신」

또 다른 중요한 작품은 「불멸의 이순신」이다. 이 드라마는 2004년부터 2005년까지 KBS1에서 방영되었다. 이 작품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중심으로 역사 서사를 재구성했다.

이순신 장군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역사적 상징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남긴 기억은 단순한 영웅 서사가 아니다. 작품은 조선 조정의 정치 갈등, 군사 자원의 부족, 전쟁 상황에서의 전략적 선택 같은 요소를 함께 보여준다.

이순신은 초인적 영웅이라기보다 제한된 조건 속에서 전략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지도자로 묘사된다. 이러한 서사는 전쟁을 단순한 영웅 서사가 아니라 국가 위기 속에서의 정치적 선택과 책임의 문제로 기억하게 만든다.

조선 이전의 고려에 대한 정치적 복원

「태조 왕건」 역시 집단 기억 형성의 대표적 사례다. 이 드라마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KBS1에서 방영됐다. 작품은 후삼국 시대의 정치 질서 붕괴와 고려 건국 과정을 장기 서사로 재구성했다.

궁예의 폭정, 견훤의 지역 권력, 왕건의 정치적 연합 전략은 국가 형성이 단순한 영웅의 등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치 세력의 경쟁과 협력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를 통해 많은 시청자들은 고려 건국을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정치 질서의 재편 과정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최근 방영된 「고려 거란 전쟁」 역시 중요한 사례다. 이 작품은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중심으로 국가 방어와 전략적 판단의 문제를 보여준다. 강감찬 장군의 활약은 단순한 전투 승리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는 고려 조정의 정치적 대응, 군사 전략의 선택, 국가 위기 상황에서의 지도력 문제를 함께 보여준다. 이러한 서사는 전쟁을 민족적 승리의 기억으로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운영과 전략적 판단의 역사로 이해하게 만든다.

「태종 이방원」도 보자. 이 작품은 조선 건국 이후 왕권 강화 과정과 정치 권력 구조의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드라마는 왕자의 난 이후 권력 안정 과정과 조선 정치 질서 형성을 중심으로 역사적 권력 구조를 설명한다. 이를 통해 조선 건국 초기의 정치 질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대하 드라마는 단순한 역사 재현이 아니라 사회가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형성한다. 특정 시대와 인물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교과서보다 드라마 서사를 통해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화적 기억은 세대를 거쳐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며 사회의 역사 인식을 구성한다.

예산 부족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드라마를 제작했던 역사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예산 부족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드라마를 제작했던 역사드라마 ‘고려거란전쟁’

KBS 혼자서 만들 수 없는 ‘대하 드라마’

문제는 이러한 대하 드라마 제작 환경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하 드라마는 제작 기간이 길고 제작비가 매우 큰 장르다. 대규모 세트와 의상, 수백 명 규모의 촬영 인력, 장기 촬영 일정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공영방송이 이러한 제작을 담당할 수 있었지만 최근 방송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KBS 역시 재정 압박과 인력 감축을 겪고 있다. 공영방송이 대하 드라마 제작을 지속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공영방송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대하 드라마 제작을 단순히 과거의 유산으로 남겨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방식으로 지속해야 할까. 이 문제는 공영방송 정책과도 연결된다.

첫째, 대하 드라마 제작을 단순한 방송 프로그램이 아니라 문화 자산 생산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역사 드라마는 단기간의 시청률 경쟁을 위한 콘텐츠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사회의 역사 인식을 형성하는 문화 자산이다. 따라서 공영방송이 제작하는 역사 드라마는 문화 정책 차원에서 지원될 필요가 있다.

둘째, 공영방송과 국가 문화 정책 사이의 협력 구조가 필요하다. 역사 드라마 제작은 단일 방송사의 재정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가 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 방송통신 정책 기관, 공영방송이 협력하는 제작 지원 구조가 필요하다. 영화 산업에서 공적 기금이 활용되는 것처럼 역사 드라마 제작에도 공적 지원 체계를 마련할 수 있다.

셋째, 대하 드라마의 제작 방식 역시 변화할 필요가 있다. 과거처럼 수백 회 규모의 장기 드라마 대신 시즌 구조나 공동 제작 방식도 고려할 수 있다. 해외 플랫폼과의 협력 제작이나 국제 공동 제작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역사 서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가 나서 ‘집단 기억의 서사’를 만들어야

결국 대하 드라마의 문제는 단순한 방송 장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역사 서사는 국가 정체성과 문화 기억의 핵심 요소다. 공영방송이 이러한 서사를 지속적으로 제작하는 일은 단순한 프로그램 제작을 넘어 사회의 기억을 기록하는 작업에 가깝다.

결론적으로 KBS 대하 드라마는 공영방송이 수행하는 역사 기록과 집단 기억 형성의 중요한 장치다. 「정도전」(2014, KBS1), 「불멸의 이순신」(2004–2005, KBS1), 「태조 왕건」(2000–2002, KBS1), 「태종 이방원」(2021–2022, KBS1), 「고려 거란 전쟁」(2023–2024, KBS2)과 같은 작품들은 한국 사회가 자신의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대하 드라마의 제작이 어려워진 오늘날에도 이러한 역사 서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공영방송이 대하 드라마를 유지하는 문제는 단순한 제작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어떤 과거를 기억하고 어떤 역사 서사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칼럼을 영상으로 · 1:52 왜 우리는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과 '이순신'을 그리워하는가?
글쓴이

박미숙 대중문화 독립연구가

박미숙은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대중문화를 연구했다. 영국에서 한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동아시아학이며 세부 전공은 한국학이었다. 현재 제주도에서 강아지 다섯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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