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혁명가를 암살하다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구한말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은 어땠을까 ①개화파 지식인들의 혼란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1880년대 이후 개화를 위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의식은 해마다 높아갔다. 그러나 이처럼 높아가는 과학기술의 필요에 대한 인식과는 정반대로 과학기술의 실제 수용 정도는 그에 훨씬 못 미치고 있었다. 1890년대 이후 1910년 나라가 망하기까지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과 성취 정도 사이의 격차는 해마다 벌어졌다.”
동아시아 3국, 혁명가 김옥균을 암살하다
“아,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도다. 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김옥균의 묘비명)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은 청나라의 거물급 정치인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일본의 호텔 동화양행에서 쉬고 있었다. 급진개화파로, 비록 삼일천하에 그쳤지만 갑신정변이라는 혁명을 주도했던 조선의 정치인 김옥균이 이홍장을 만나려 했던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웅장하고 어쩌면 무모해 보인다.
그는 서양제국주의 세력의 동아시아 침탈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 중국, 일본이 하나로 뭉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삼화주의(三和主義)라 불렀다. 혁명가 김옥균의 사유는 조선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지 않았다. 비록 혁명에 실패했지만, 김옥균은 아시아를 하나의 세계로 인식했고, 그래야만 서구열강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국제적 감각을 지닌 정치인이었다.
그는 이홍장을 만나, 중국혁명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상하이로 향했던 것이다. 김옥균이 보기에 서구열강의 침략 속에 찾아온 아시아의 위기를 극복하는 문제는 필히 중국의 흥망에 달려 있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정부는 일본 망명 중인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자객을 보냈다. 1885년 장은규, 1886년 지운영, 1892년 이일직, 권동수, 권재수 등의 암살 시도는 모두 실패했고, 한중일 3국은 김옥균의 신병 문제로 계속해서 부딪혔다. 즉, 당시 김옥균의 존재는 한중일 3국의 국제정치는 물론, 서구열강의 침략에 맞서 ‘근대화’라는 압력에 놓여 있었던 동아시아 3국의 현실적 문제들의 핵심에 놓여 있었다.
김옥균은 당시로서는 저명한 망명인사였고, 그의 안위는 동아시아 3국에 모두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달변이었고, 사교적이었으며 외교술 뿐 아니라 고급교양에도 능했다. 따라서 혁명가로서 그의 존재는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김옥균에게 총을 쏜 사람은 동행했던 홍종우였다. 홍종우는 준비해간 권총 세발로 김옥균을 그 자리에서 즉사시키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그가 밝힌 암살의 이유는 첫째, 김옥균이 정변을 일으켜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고, 둘째, 국왕을 선동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셋째, 외국 군대를 이끌고 궁중에 침입해 한중일 세 나라의 관계에 큰 해를 끼쳤다는 것 등이었다.
시신을 운구해가려던 일본은 청나라 정부에 제지당했고, 결국 청나라는 김옥균의 시신을 조선 정부에 넘긴다. 의금부는 김옥균의 죄상을 ‘모반대역부도율’이라 칭하고 능지처참형을 주장했고, 고종은 이를 즉시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도륙당한 김옥균의 시신은 전국 팔도를 돌며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되었고, 그의 머리는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 쓰인 현수막과 함께 양화진에 걸렸다.
김옥균 암살사건은 국제적 뉴스였다. 특히 동아시아 3국은 김옥균의 죽음에 서로 다르게 반응했으나, 그의 죽음이 상징적이라는 점엔 의문이 없었다. 일본은 김옥균의 죽음을 대대적으로 알리며 이를 크게 다뤘다. 일본에서 갑자기 조직된 ‘김씨우인회’라는 단체는 일본정부에 김옥균 암살사건을 방조한 청나라와 김옥균의 시체를 참혹하게 도륙한 조선을 응징하라고 시위를 벌였고, 이는 같은 해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빌미로 작용하기도 했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를 고려해보면, 김옥균을 죽인 건 조선과 청, 그리고 일본의 지배층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김옥균 암살사건의 배후는 조선, 청, 일의 3국이 공모한 사건인 셈이다. 하지만 그를 직접 암살한 인물은 조선인 홍종우였다. 게다가 죽기 직전까지 김옥균은 홍종우가 자신과 같은 개화파의 일원이라 굳게 믿었다.
김옥균이 윤치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었던 인물, 홍종우는 누구이며, 도대체 왜 혁명가를 암살해야 했는지에 대해, 교과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답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건이야말로 근대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역사적 갈림길이었으며, 이후 조선이 걸어가는 길에서 과학기술이 인식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이정표였다.
몰락한 양반, 프랑스 유학, 그리고 왕
“현재 저의 동포들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일부 사람만이 우리가 직면한 위험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상황은 매우 위태롭습니다. 유럽문명의 수용만이 우리가 구제될 수 있는 길입니다. 일본에서 체류기간을 연장하면서까지 정치를 깊이 연구하는 와중에 그런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명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홍종우가 파리 사교모임에서 행한 연설 중에서)
홍종우는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며,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을 암살하고 근왕주의파 정치인으로 살아간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50년 몰락한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나 전라도 고금도에서 불우한 청년시절을 보냈다. 1886년 모친상을 치른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아사히 신문사에서 식자공으로 일하며 일본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으로 혼란에 휩쌓여 있었고,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던 동경에서 홍종우는 자유당 당수 이다가키 다이스케 등과 교류하며 해외문물에 대한 식견을 익혔고, 개화를 통해 조선을 구하겠다고 결심한다. 일본에서의 생활 중, 우연히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프랑스 헌법을 본받아 이루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프랑스 유학을 결심한 그는, 일본에서 몇 년간 일하며 모은 자금으로 1890년 프랑스 마르세이유를 거쳐 파리에 도착한다.
프랑스 유학시절 홍종우의 모습과 행적은 비교적 자세히 여러 기록들을 통해 남아 있는데, 이 기록들을 살펴보는 것은 격동기 조선을 살던 한 지식인의 고뇌와 생각의 궤적, 그리고 그가 김옥균을 암살한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먼저 홍종우는 프랑스에서 조용히 근대법을 공부할 성격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학 내내 갓에 도포 차림으로 파리 시내를 활보했고, 각종 사교모임에 드나들며 활발하게 사람들을 만났다. 이렇게 만난 프랑스 지인의 도움으로, 홍종우는 기메 박물관에서 샤를르 바라 탐사단이 조선에서 입수해간 유물을 정리하는 큐레이터 역할을 담당하며, 박물관에 한국전시관이 생기는데 일조했다.
일본 자유당 당수의 추천서까지 받았던 홍종우는 프랑스 고급 사교 모임에서 조선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강연도 했고, 소설가 로니와 함께 <춘향전>을 번역, <향기로운 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다. 이후 이 소설은 발레의 거장 미하일 포킨의 안무로 이후 ‘사랑의 시련’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이어 그는 <춘향전> 뿐 아니라, <심청전>, <직성행년편람> 등 한국의 고전과 점성술 책은 물론 일본과 중국의 여러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법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지만, 홍종우의 행적을 보면 그가 조선의 문화를 자랑스러워했고 이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그리고 급진적인 개화파라기보다는 조선의 군주제 하에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근대화하려던 온건개화파 성향을 지닌 인물임이 잘 드러난다.
홍종우의 일본행과 프랑스행엔 출세를 위한 목적이 분명히 나타난다. 당시 고종은 외국여행을 다녀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로우면 벼슬을 주었는데, 홍종우가 바로 이 ‘별입시’를 노리고 일본행을 결심했다는 일본 작가 이오갸이 미도리의 언급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몰락한 양반 홍종우가 별입시를 통해 관직에 오르고 싶어했다는걸 비난할 수는 없다.
특히 그가 일본과 프랑스를 오가며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하고 조선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홍종우가 관직을 얻으려던 목적이 “조선을 중국, 일본, 러시아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고 “전 세계로부터 조선을 고립시키는 장벽들을 철폐”하기 위함이었음을 굳이 의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기메 박물관에서 홍종우와 함께 일했던 화가 펠릭스 레가메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홍종우는 교양 있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관대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이다. 공정한 목적을 가진 몇몇 사람들이 프랑스에 온 최초의 한국인의 생활비를 대주었다.… 홍종우는 배움에 목말라한다. 매우 야망에 차서, 그는 자신의 나라에 이익이 되게 할 목적으로 유럽 문명에 스며들기를 열망한다. 특히 프랑스 정치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는 몇 년 후 조선에 돌아가 일본의 현 상태를 가져 온 운동과 유사한 운동의 진두에 서기를 원한다.”

홍종우는 프랑스 파리에서 자신만의 독립운동을 실천하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 최초의 조선유학생 홍종우는 국제주의자였다. 그는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조선의 근대화를 이뤄야 한다는 대의에 동의하는 개화파였지만, 조선에 대한 자부심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도대체 왜 그가 김옥균을 죽여야만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김옥균과 홍종우 모두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데 동의하는 개화파 정치인이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해외를 직접 경험한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홍종우가 김옥균을 죽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선, 구한말, 조선과 조선의 지식인들이 처해 있던 곤경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외부의 적은 넘쳐났고, 조선의 정치는 썩어 있었다. 이 시기, 적어도 조선을 구하려던 정치인과 지식인은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어느 한 쪽으로 급진적일 수 밖에 없었다. 김옥균의 준비되지 않은 갑신정변과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은 바로 이 시기 조선이라는 시공간에서 고뇌하던 지식인들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대변하는 상징적 사건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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