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로서의 과학과 과학지식인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23)식민지에서 ‘방법론으로서의 과학’ 탄생 ‘과학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화두 ‘진보적 과학지식인’ 출현으로 이어지지 않아

존 데스먼드 버널(뒷줄 가운데)은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치열한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그에게 과학은 사회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지적 활동이었다.
존 데스먼드 버널(뒷줄 가운데)은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치열한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그에게 과학은 사회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지적 활동이었다.

“과학은 우리들의 정신생활에 중요한 요소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김일선

경성제대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조선학 운동을 비판하며 들고 나온 화두는 ‘과학적 조선학’의 필요성이었다. 식민지 시기에 근대학문으로의 이행을 경험하던 조선에서, ‘과학’은 근대적 학문방법론의 상징으로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등장한 건 1910년대 후반의 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1917년 러시아혁명의 성공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건 1920년대 전반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식민지에 전파된 마르크스주의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상태였고, 마르스크주의자들의 과학론 역시 민족주의자들의 그것과 구분되지 않았다.

1920년대 초,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모두에게 과학은 근대적/실용적 사고를 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과학은 “자연 및 기술 분야 학문이고, 생산력 발달 등 물질상 진보를 목적으로, 실용적/실질적 연구 방법을 취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로서의 과학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이 ‘과학론’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건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이 시기 일본 등으로부터 들어온 유물변증법이 빠르게 확산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사이에선 유물변증법을 따르는 것만이 진정한 과학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과학을 실용적 과학기술의 맥락에서 이해했던 1920년대 초반에 비해, 이 시기 과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인식은 사상적 전회라고 할 만한 변화를 보여준다. 즉, 기존에 자연과학만을 과학이라고 해석하던데서 벗어나 정신과학, 문화과학, 철학 등이 모두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과학은 학문 일반 또는 모든 사물에 대한 이론적/조직적 연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장된 것이다.

조선학운동에 가담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으로서 ‘과학적 조선학’을 주장했던 백남운의 과학에 대한 이해 또한 자연과학이라는 좁은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그는 “생활 고려의 목적으로 자연과 사회에 대한 경험을 질서화하고 계획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체계적 수단을 제시하여서, 인간 대 인간, 인간 대 자연의 진로를 조성하는 것이 과학의 기능”이라고 정의했다.

1926년 일본 동경에서 유학생들과 함께 ‘신흥과학연구회’라는 사회주의사상 연구단체를 만든 김일선 또한 과학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백남운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세상에는 흔이 과학이라면 오직 이용후생적 요소의 과학 그것이 과학의 전폭인 듯 착각하야 건조무미한 사회를 연상하고 몰인정 무취미를 의미하며 또한 수전노적 인색한의 유물주의(물욕주의)와 혼동한다. ... 과학은 우리들의 정신생활에 중요한 요소적 기능을 가지고 잇다.”

과학을 물질적 세계의 진보를 가져오는 기술의 맥락으로 사고하는 것을 넘어, 과학을 통해 인류의 역사와 현실 같은 정신생활을 분석할 수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인식은, “과학을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 방법론으로 인식하게 된” 식민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개념적 전환이었다.

하지만 과학의 쓸모를 자연과학을 넘어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등의 정신적인 분야로 확장한 것만으로는, 마르스크주의의 본령인 이론과 실천의 일치를 추구할 수 없었다. 당시 마르스크주의자들이 과학의 적용범위를 확장한 이유는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인류사회 법칙성을 발견하고 이를 노동계급 해방의 무기로 삼”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과학의 과학’, 즉 진정한 과학적 법칙은 오직 유물변증법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었다. 1929년 김일선이 동아일보에 쓴 <과학과 우리들>이라는 글은 이런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현상과 사회의 본질형태를 변증법즉으로 통일하야 인식하는 바 즉 사회현상의 과학적 연구는 드듸어 옛날의 모든 암흑을 정복하고 자유의 세계, 능동적 지배의 세계로 넘어오게 되엇다.”

식민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과학론’을 연구한 조형열은, 이들에게 “과학이 자연과 사회의 운동법칙을 밝히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단지 발견이 목적이 아니었고, 바로 인류사회 변혁을 위한 정신활동으로서 실천적 의미가 강조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실천적 의미는 “과학의 계급성에 대한 이해”로 전환되어 “과학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백남운은 역사적으로 과학에 계급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밝히고, 각 시대의 지배계급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물질적 조건을 만들 때에는 과학을 육성하지만, “지배계층의 비과학적 관념행태를 일거에 종식시킬 위험성을 배태한” 과학적 사유의 진보는 탄압했다고 말한다. 즉, “생산력 증진을 통한 물질적 이익이 늘어나 지배계급에게 유리할 때 과학은 장려되지만, 이것이 생산관계 변화 압력으로 작용하고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 사상으로 기능할 때 과학은 탄압받는다는 것이다.”

1920년대 말, 식민지 조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과학론은 근대과학의 성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기존에 생산력 증진을 통해 부르주아 계급의 물질적 이익에만 봉사하던 과학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해 현실의 운동법칙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가장 합리적으로 개혁개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과학으로 진화해 있었다. 즉, 1930년대 초,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일군이 단군과 정약용에 경도된 조선학운동을 ‘반과학적 혹은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며 등장했을 때, 그들의 사상 속에서 과학이란 ‘사회주의로서의 과학’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1894년 태어난 백남운은 일본유학 당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이후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조선학운동의 비과학성을 비판하는 여러 글을 썼으며, 이후 월북했다. 그는 계응상, 도상록 등의 과학기술자들의 월북을 주선한 인물이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1894년 태어난 백남운은 일본유학 당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이후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조선학운동의 비과학성을 비판하는 여러 글을 썼으며, 이후 월북했다. 그는 계응상, 도상록 등의 과학기술자들의 월북을 주선한 인물이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과학적 지식인의 기원과 소실

얼마 전 출판된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해리 콜린스와 로버트 에반스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과학이 지닌 물질적 측면 외에 과학이 지닌 정신적 측면, 즉 과학이 세계를 발견하는 방법론과 과학자사회가 과학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구축해온 여러 규범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선택적 모더니즘’이라 이름붙힌 이 사상 속에서 과학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기 보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면서 구축한 방법론 속에서 더 큰 사회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과학적 방법론과 과학자사회의 규범은 민주주의 체제의 원형이자 이상으로 기능하고 또 기능할 수 있으며, 그런 과학적 방법론과 규범이 결여된 민주주의는 결국 다수결에 의한 폭정, 즉 포퓰리즘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의 저술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존재가 바로 이들이 ‘부엉이’라 부른 지식인 집단이다. 부엉이는 고개를 180도 돌릴 수 있다. 즉, 과학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 모두를 바라보며 실천할 수 있는 지식인을, 이들은 부엉이라고 부른다.

민주주의 사회체제가 봉착하는 여러 문제들은 대부분 과학과 연결되어 있으며,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주류가 되어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현재의 시스템은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부엉이들이 정치와 대중 사이를 연결하며 과학적 방법론의 가치를 민주주의에 전이시키는 것만이,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체제로서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과학사회학자인 해리 콜린스의 선택적 모더니즘이 1920년대 말 식민지 조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과학에 대한 인식과 닮아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과학이라는 학문을 단순히 자연과학으로 축소해 생각하지 않고, 과학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온 과학자 대부분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등장해왔기 때문이다.

1920년대 중반, 에른스트 마하의 과학사상을 배경으로 논리실증주의라는 학풍을 건설했던 ‘빈 학단’의 활동에서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도 오토 노이라트를 중심으로 한 좌파들이었다. 빈 학단의 우파 리더였던 모리츠 슐릭은 과학과 사회의 관계보다 ‘과학에 대한 엄밀한 철학적 분석’이라는 이론적 주제에 천착했다. 과학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사회를 변혁하려 했던 빈 학단의 활동은, ”공동체적 삶을 향한 학문의 봉사라는 이념과 학문적 철저함이라는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학문공동체적 활동”이 얼마나 이념적으로도 또한 실천적으로도 이루기 어려운 조합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사회주의자이자 과학사회학자인 게리 워스키는 193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회주의 과학자들의 일대기를 <과학 좌파>와 <과학과 사회주의>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과학자들은 X-선 결정학의 대가이면서 과학사회학이라는 분야를 창시했던 존 버널, 권위 있는 생리학자이자 유전학자이면서 말년엔 인도에 정착했던 공산주의자 홀데인, 동물학자로서 우생학 및 나치즘과 치열하게 맞섰던 호그벤, 항공학의 수학적 모델링을 연구하면서도 공산당으로 치열하게 활동했던 레비, 그리고 생화학자로 성공했지만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을 통해 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니덤 등이다.

이들 사회주의 과학자들은 과학이 단순히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는 기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과학 활동에서 사회적 맥락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언제나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는 필수사항이었다. 과학은 오직 사회적 맥락에서 고려될 때에만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 ‘과학의 성자’라 불리던 버널의 말이었다.

이들의 활동이 사회의 큰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1968년 미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민중을 위한 과학’ 운동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1968년 미국과 유럽의 대규모 학생운동, 즉 ‘68혁명’과 베트남전 등을 촉매로 시작된 ‘민중을 위한 과학’ 운동은 1960년대 후반 미국의 반전 문화로부터 파생되어 “사회로부터 고립되지 않은 과학”을 옹호했다.

이들은 “과학적 발견을 사용하여 사회 정의를 옹호하고 발전시키고 사회적 노력으로 과학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옹호”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와 초파리 유전학자 리처드 르원틴 등이 ‘민중을 위한 과학’의 주요 구성원이었고, 이들은 반군사주의, 핵에너지 사용에 대한 비판적 견해, 그리고 최근 작고한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에 대한 공격 등을 주도했다.

1920년대 등장한 마르스크주의 지식인들은, 어쩌면 이런 세계사적 흐름의 일부로서 한국의 지식인사회와 학술생태계를 구성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 비극이 왜 여전히 한국사회가 진보적 과학적 지식인이라는 집단의 확보에 실패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글쓴이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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