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마르스크주의 경제학의 기원과 과학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22)일제에 앞장선 조선사편수회 독립운동에 가담한 재조일본인들 미야케 시카노스케의 ‘마르크스주의’
“진보적 조선학은 ‘과학적 연구방법’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세계사적 보편성에 입각하여 조선의 특수성을 해석하려는 작업이었다. 중국 신문화운동의 구호가 ‘과학과 민주’였다면 진보적 조선학의 표어는 ‘전통의 과학화’라고 할 수 있겠다.”(류승완, 1920~1930년대 조선학의 분화에 대한 일 고찰)
일제는 1920년대부터 관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연구를 시작한다. 조선통치의 학문으로 시작된 관학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시작되어, 일제가 만든 고등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식민지 민중을 압도하는 학지(學知)가 되어 자기증식을 해나갔다.” 관학은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도입되었고, 이를 위해 “일제는 고등교육기관을 설립 및 장악하고 친일지식인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으며, 이들 친일지식인들은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자기부정의 논리를 개발하고 나아가 조선과 일본의 동일화논리를 만들어낸다.” 관학은 고등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는 권위 외에도, ‘근대학문’이라는 권위를 동시에 지닌 채, 조선 민중 전체에 주입된다. 식민지 조선은 정치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일본에 큰 열패감을 갖게 된 것이다.
관학, 조선학, 그리고 마르크스의 과학
관학의 민족정체성 부정 논리는 주로 조선사 관련 사업에서 등장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는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로, 1924년엔 ‘조선사편수회’로 확대개편된다. 조선사편수회는 1927년 <조선사대계>5권과 1932년 <조선사>32권을 펴내고,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사연구를 독점해나갔다. 1920년대 불함문화론을 필두로 단군 중심의 조선학운동을 시작했던 최남선은 1936년이 되면 일본 관학에 흡수돼 고대 조선과 일본은 원래 하나였으니, 일본의 식민지배로 조선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일선동일문화론’의 주창자로 변모한다. 최남선과 함께 일본유학파 문인의 대표격이던 이광수도 1940년이 되면 고구려가 야마토의 일족이라는 민족정체성의 부정에 이르게 된다.

관학의 본산은 1924년 설립된 경성제대였다. 1926년 본과 설립후 다카하시 도오루의 추천으로 총장에 취임했던 핫토리 우노키치는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이었다. 취임사에서 핫토리는 “경성대학의 연구 방향을 일본/조선/중국 등 3국 문화연구를 축으로 한 동양연구”로 규정한다. 다카하시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조선의 교화와 교정>으로, 이 논문에서 그는 조선연구를 이렇게 규정한다.
“조선연구는 조선의 사상과 신앙 즉 문학, 철학, 종교연구에 종사하는 것이다. 조선에 있는 일본인은 조선인이 종래의 악정의 결과로 길러진 어두운 성질을 선정과 우수민족의 감화로 씻어냄으로써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동시에 민족적으로 향상시켜준다는 의무를 자각하는 것이다.”
관학은 친일유림을 이용해 황도유학을 만들어 조선민중을 침략전쟁에 동원했고, 친일승려를 동원해 황도불교를 만들어 승려들을 군대로 내몰았다. 관학의 대두와 이들이 장악한 학술계에 대한 반응이 바로 조선학운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관학에 가장 먼저 위기의식을 느낀 지식인들은 조선연구를 통해 관학을 극복하려 했고, 그 방법론으로 ‘전통을 근대성의 개념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최남선을 중심으로 하는 이들 민족주의 조선학 계열은 “마르크스의 업보다도, 레닌 성주보다도 단군 터줏대감이 정신계의 지주가 되는데서” 조선학운동의 핵심가치를 찾았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런 민족주의 조선학은 일종의 ‘전통의 주술화’로 비판받았다.
최남선이 아무런 이유 없이 마르크스와 레닌을 끄집어내 단군과 비교한 건 아니다. 최남선이 조선학운동을 주창하던 1928년은 식민지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활성화되던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928년에만 몇 번의 조선공산당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조선 각지에서 노동자총파업 투쟁 등의 사회주의운동이 벌어졌다. 최남선은 일제의 관학 뿐 아니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해방투쟁을 비난하고 있었던 셈이다.
조선학운동이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된 건 바로 이 시기, 김태준, 신남철, 박치우 등의 경성제대 1세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과학적 조선학을 제기하며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관학의 중심인 경성제대는 역설적으로 진보적 조선학의 존재조건”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192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교수로 부임했던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수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었다.
미야케 시카노스케 - 지배와 연대의 사이에서
미야케 시카노스케는 1899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가와카미 하지메가 쓴 <사회문제연구>를 읽으며 사회문제와 빈부 격차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20년 동경제대 경제학부에 입학한 그는 자연스럽게 당시 격동의 시대를 따라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 사회주의운동이 한창이었던 일본사회를 직시하게 된다. 호세이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된 그는, 자신의 강의를 수강한 조선인 학생들에게 조선의 비참한 처지를 전해들었고, 이후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그는 어린시절을 대만에서 보낸 특이한 경험의 소유자였는데,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감정이입도 그의 이런 체험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19년을 전후로 식민지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의 숫자는 34만명에 이르렀고, 1942년에는 75만명에 이르렀다. 이들 ‘재조일본인’은 ‘재일조선인’처럼 역사의 주변인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재조일본인의 직업분포를 보면 1919년 전후엔 상업 및 교통업 종사자가 약 33% 정도로 가장 많다가, 1920년 이후엔 공무자유업 종사자가 가장 많아지게 된다. 미야케 교수가 속한 지식인 집단이 바로 이 공무자유업의 범주에 해당된다. 대부분의 재조일본인 지식인들은 식민통치의 기획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협조했다.
이 지식인집단 중에서 경성제대의 교수진은 최정상의 독특한 위상을 지닌 존재였다. 1926년 개교 당시 경성제대의 일본인 교수는 25명에 불과했고, 1941년 이공학부가 신설되면서 충원된 교수를 모두 합쳐도 약 170명 수준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역할에 충실했지만, 예외적인 인물들도 존재했다.
예를 들어 조선총독부 산림과와 임업시험장에서 일하던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년)는 조선옷을 입고 조선말을 하며, 조선의 민속민예운동을 이끌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조선민족과 연대하여 아예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혁명운동에 가담했던 사례도 있다. 1931년 경성제대 신현중에 의해 조직된 사회주의 독서회에 소속되어 있던 이치카와, 히라노, 사쿠라이 등은 반제동맹을 결성해 투쟁하다 체포되었고, 제2차 태평양 노동조합 운동에 참가해 독립운동가들과 동지애를 나누었던 이소가야 스에지의 경우도 그렇다. 미야케 교수를 포함해 이들 대부분은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미야케에게 조선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실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그는 1930년부터 조선사정연구회를 지도하면서 조선인 학생들과 자료수집, 독서회 등을 해나갔고, 조선에서 활동중이던 수많은 사회주의 활동가들을 만났다. 그는 마르스크주의 경제학이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 속에서만 완성된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들로부터 체화한 지식인이었다.
“이 때 공산주의 운동을 실행하고 있는 조선인은 내가 가진 마르크스주의의 이용을 요구해 왔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관해서는 아직 연구 과정에 있던 나는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이론이 과연 이들에게 유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지만 이들의 열렬한 요구로 나의 이론을 제공하는 것을 마침내 승낙하게 되었습니다. 나 개인으로서도 서재 안에서 책을 통하여 연구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을 파악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는 유물변증법이 보이는 바입니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즉 마르크스주의의 실천)과 결합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마침내 이들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실천하기 위한 확고한 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김경일. 지배와 연대의 사이에서 - 재조일본인 지식인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그는 경성제대 안에서 전투적인 좌익교수로 유명했고, 1930년대 서울의 혁명적 노동운동그룹이었던 이재유 그룹과 권영태, 조직 및 이남철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혁명을 지원했다. 1934년 이재유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탈출하자, 그는 이재유를 자신의 다다미 방 아래에 굴을 파고 숨겨주었다가 5월 21일 검거돼 대학에서 면직됐다.
그는 범인 은닉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을 복역한 후, 1937년 일본으로 돌아가 고물상과 신문판매상 등으로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이후 그의 행적은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잊혀졌지만, 그에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배운 경성제대 학생들은, 향후 한국 학술계의 향방을 결정하는 인물들로 성장한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친구가 되는 날
사회의 진보를 꿈꾸던 사회주의자들에게, 조선과 일본의 구분은 민중과 제국주의자와의 거리보다 멀지 않았다. 20세기초 동아시아 3국의 아나키스트들이 서로 연대하며 제국주의에 대항해 투쟁했던 것 역시 이런 진보적 사상의 자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며칠전 일본의 전 총리 아베가 저격을 당해 죽었다. 이 사건은 여전히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과거의 기억이 얼마나 두텁게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지를 우리에게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일본의 정치권력과 평범한 시민을 동류로 사고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견제하고 반복하지 말아야 할 제국주의의 과오 대부분은, 권력을 지닌 소수의 인물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나키즘은 이 사실을 파악했던 유일한 이념이다. 미야케 시카노스케의 사례는, 한국의 학문생태계의 뿌리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복잡한 역사를 단순한 친일과 반일의 구도가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감싸고 있던 다양한 사상과 이념,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외면해왔던 과학의 영향력 속에서 재구성해야만 한다.

미야케 시카노스케의 이야기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어로 글을 잘 썼던 일본인 후지이 다케시를 떠올리게 한다. 교토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후 한국에서 교편을 잡고 가르쳤으나, 한국 학계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결국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무명의 말들>이라는 에세이집 한편을 남겼다.

그의 글에는 한국인은 보지 못하는 역사적 성찰과 경계인으로서의 통찰이 녹아 있다. 하지만 그는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을 ‘유고집’으로 남긴다고 말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글쓴이 후지이 다케시’는 죽었다고 선언한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언제쯤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경성제대에서 일본인 교수로부터 자라난 한국 마르스크주의자들에게 미야케 시카노스케는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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