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학문을 위한 식민지 지식인의 대립
[김우재의 한국사회와 과학] (21)조선학운동, 민족주의를 거쳐 한국인문학으로 반대편에는 좌파적·과학적 사회과학으로 전개 ‘환단고기’ 같은 유사역사학까지 나타나기도
“조선학은 결코 조선의 과거만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초월적 존재를 신앙대상으로 하는 종교도 아니다. 그것은 이것들의 전문적 과학적 연구의 제성과가 전체적 연관하에서 현대적 의식을 통하여 비판 조성된 때 비로소 나타나는 일개의 고차적 개념이다.”-신남철
한국의 인문학계는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을 한국 근대 학술의 기점으로 간주한다. 특히 대다수의 인문학자들은 ‘실학(양명학)-민족주의적 조선학 운동(국학)-한국 인문학’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한국 학문의 정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종현의 말처럼 “이러한 계보화는 냉전체제 하에서 식민지 시기 마르크스주의적인 학문 전통을 소거하고 구축된 것”일 뿐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한국 인문학의 뿌리를 찾는 작업은 냉전적 사유를 전제하고 있다. 박종현의 또다른 말처럼 ‘실학-좌파적 맥락의 과학적 조선연구-북한의 사회과학’으로 이어지는 계보 역시 냉전 체제의 산물인 동시에, 좌우로 나뉜 역사학계가 공통적으로 보편을 열망하며 생겨난 균열이었다.
조선학 운동과 반쪽짜리 한국 인문학의 기원
조선학 운동을 두고 논쟁을 벌인 한 축은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단군과 조선학 연구에 대체로 부정적이었으나, 식민지적 상황 속에서 그런 연구의 필요성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단, 이들에게 있어 조선고대사에 관한 연구는 민족적 특수성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사적 보편성을 발견하기 위해 수행되어야 하는 과제였다. 이 보편성의 발견을 위해 필요한 학문적 방법론은 ‘과학’이었다. 백남운은 “원시족의 생활발전사를 전반에 걸쳐서 규명하려면 유일한 과학적인 방법론에 입각하여 여러 과학 부문의 엄정한 비판적인 성과를 정리하여 통일적으로 고찰해야 할 것”이라고 못박는다.
백남운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이 ‘유일한 과학적인 방법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방법론이다. 오히려 뒤에 등장하는 ‘여러 과학 부문’이 근대 학문의 분화를 통해 등장한 분과 과학을 지칭한다. 이들에게는 ‘이념으로서의 궁극의 과학’, 즉 마르스크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학술로서의 종속과학’의 위계가 일반적인 명제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백남운 등의 소위 과학적 조선학 운동론자들이 단군을 신앙으로 대상화하는데에서는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마르스크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을 일종의 타협불가능한 이념으로 받아들였음을 뜻한다.
바로 이 ‘과학’을 매개로 학문을 구분 짓는 태도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고 이를 통해 아카데미즘을 공유하는 지식인 집단이 학계를 주도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들 신세대 학자들은 실증주의와 마르크시즘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즘의 철저한 훈련과 ‘과학’에의 추구”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과학’적 엄밀성을 학문적 방법론의 제일 원리로 공유하던 이들 신세대 학자들의 등장으로, 조선학 운동의 주창자였던 최남선, 정인보, 안재홍 등은 민간연구자 혹은 재야 사학자로 구분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명명에는 사이비 과학자들과 대립되는 아카데미 출신의 과학 연구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논리가 담겨” 있었다.
식민지 시기와 해방이후까지 한국의 학술계를 뒤흔들던 최남선과 정인보의 조선학운동은 이렇게 ‘과학’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아카데미즘과 과학을 매개로 신앙에 가까운 조선학에 함께 대응해왔던 실증주의 계열의 학자들, 즉 진단학회 계열의 학자들과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학자들은, 해방 직후 ‘조선학술원’의 두 축으로 부상했지만, 국대안(1946년에 국립 대학안을 반대하여 일어난 동맹 휴학 사건) 파동을 거치며 각각 국립서울대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의 중심 교수진으로 분화되어 갈라진다. 그리고 과학적 역사학을 지탱하던 절반의 학자들이 월북하고 없는 남한에서, 조선학 운동의 이념인 민족주의는 다시 새로운 형태로 부활해 현대 한국 인문학의 기원이 된다.

경성제국대학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과학
조선학 운동은 “근대적 전통의 재구성이라는 민족적 자기 정립의 학문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당대 조선의 지식인들이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 “조선의 시대 이념을 전환시키고자 했던 철학적 운동”이라는 점에서, 또한 이를 통해 형성된 담론이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응축되면서 남북한의 사상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분명히 인정받아야 할 지식인 운동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단군이라는 신화 속의 존재를 지나치게 인격화함으로써 학술운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신앙화 대상을 창조해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이처럼 학술의 대상을 신앙화하려는 최남선 등의 학문적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세운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과학’을 강조하는 학자들에 의해 철저히 비판받았다. 정종현의 말처럼 “이 시기 학술계를 경계지은 것은 ‘과학(성)’이라는 새로운 표상언어”였고 “193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의 인문학술장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사용되기 시작한 ‘과학(성)’은 보편을 표상했으며 특히 아카데미즘과 마르크시즘을 지반으로 작동한 용어이기도 했다.” 정종현은 1930년대 조선학을 둘러싸고 벌어진 여러 진영 학자들의 논쟁의 핵심은 ‘과학’이라는 보편의 표상언어를 둘러싼 경합이었다고 말한다.
“1930년대 학술장을 이해하는 핵심은 ‘조선적인 것’이라는 특수성에 대한 관심의 고조라는 현상 뿐만 아니라, 그 연구대상을 둘러싼 ‘과학’이라는 보편의 표상언어를 둘러싼 경합에 있었다. 자기를 보편으로 구성하는 한 방법이 보편적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을 통해 자기 안의 보편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과학이라는 보편적 방법론을 통해 역사발전의 보편성 안에서 ‘조선(사)’이라는 특수를 어떻게 위치짓고 처리할 수 있는가? 나는 이 문제가 1930년대 조선지식인들의 학술 행위의 기반에 놓여 있었던 핵심이라고 판단한다.”-정종현
정인보의 조선학 개념을 세 명의 역사학자들의 인터뷰로 풀어내, 조선학운동을 대중화시켰던 동아일보 기자의 이름은 신남철이었다. 신남철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철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고, 마르크스주의는 “신남철 사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신남철은 해방 이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미군정의 국대안을 반대하며 결국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가 된다. 그는 ”인간의 살려고 하는 의지와 생산활동이 보편적 역사발전을 규정한다고 생각한 보편주의자”였고, 그의 모든 학문적 관심의 전제는 보편적 역사발전과정이 현실에서 관철됨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신남철의 철학적 토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보편성이었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과학적 역사연구였다. 이런 맥락 속에서 그는 조선역사가 특수성으로 이해되는 것을 거부했다. 조선사회에서 보편적 역사발전과정을 발견할 수 없다면 현실의 토대는 부정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학운동은 조선의 현실적 토대를 부정하는 관념적 현실초극론에 불과했다. 그는 “식민지의 지식인들이 내면적 고뇌와 현실적 불안에 압도되어 역사적 전망을 상실했다”고 판단했고, 극복해야할 현실을 거부하고 그 너머의 추상적 전망에만 몰두한다고 비판했다.

신남철은 조선학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학의 방법론으로 ‘전문적’, ‘과학적’(즉 역사과학적 방법)과 ‘반과학적’, ‘비과학적’(즉 고증위주, 신화화, 관념적, 국수주의적 방법)을 대립시켰고, 근대과학의 학문적 엄밀함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조선학은 신비화되거나 종교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비로소 조선학의 수립-역사과학적 방법에 의한-이 바야흐로 부르짖어지게 된 것은 현세의 필연한 바라고 하겟다. 그러나 조선학이라는 것은 결코 관념적으로 조선의 독자성을 신비화하는 국수주의적 견해와는 아무 인연도 가지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조선학은 결코 조선의 과거만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초월적 존재를 신앙대상으로 하는 종교도 아니다. 그것은 이것들의 전문적 과학적연구의 제성과가 전체적 연관하에서 현대적 의식을 통하여 비판 조성된 때 비로소 나타나는 일개의 고차적 개념이다. 그것은 반드시 기초적 제연구가 조선의 제력사적 형태를 전문적으로 구명한 성과를 토대로 하야 잇는것이 아니면 아니된다.-신남철
과학과 역사학의 조우
이념과 신앙이 학문, 그 중에서도 특히 과학을 지배할 때 생기는 위험성은 이미 역사를 통해 충분히 밝혀져왔다. 스탈린이 지배하던 소련에서 트로핌 리센코는 소련의 지배이념을 따르는 유전학을 개발하고, 국가의 이념에 맞지 않는 과학과 과학자들을 말살시켰다. ‘리센코 주의’는 소련의 생물학을 수십년 넘게 지연시켰으며, 이념에 의한 과학의 탄압이 얼마나 사회에 위험한 것인지를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북한에서 1960년대 유행했던 ‘봉한학설’ 또한 북한 체제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체제를 옹호하기 위해 과학이 남용된 사례다.
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독일 나치는 우생학이라는 과학이론을 통해 게르만족의 유전적 우월성을 홍보하고 유대인 학살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이념에 의한 과학의 왜곡이 사회주의 국가에서만 일어난 건 아니다. 우생학은 20세기 초 서구사회 대부분의 과학자와 정치인 그리고 대중을 사로잡은 매력적인 과학이었으며,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미국은 우생학을 기반으로 이민법을 단행, 수많은 이민자를 차별했고, 단종법을 통해 발달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의 임신을 금지시켰다.
조선학의 최초 주창자들은 식민지라는 피지배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학술활동에 신앙의 의미를 부여했다. 최남선에게 조선학의 최종 종착지는 팔만대장경 같은 경전의 완성이었고, 정인보는 ‘혼’이나 ‘얼’과 같은 신비주의적 관념으로 조선학의 목표를 어지럽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학의 전통은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 근대 인문학의 시원이 되었다. 과학적 역사학을 주장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실증주의를 강조하던 경성제대 출신 학자들에 의해 그 비과학성이 지적되고 비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남선의 선언과 이후 정인보, 안재흥 등에 의해 지속된 조선 고대사와 단군에 대한 집착은 현대 한국의 인문학 생태계에 여전히 신앙화된 학술활동이라는 위험성을 남겨두었다.
<환단고기>라는 위서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히 역사학계에서 끊이지 않는 현상과 소위 환빠들이 재야 역사학계는 물론 제도권에서 활동하면서 스스로를 친일파를 처단하는 민족주의자임을 내세운다는 사실은, 일제에 맞서 만들어진 조선 지식인들의 불안하고 위험한 학문적 태도가 해방이후에도 분단이라는 비정상적인 현실을 겪으며 여전히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특히, <환단고기>류의 역사학을 과학과 비과학을 구획하는 문제에서 비롯된 유사과학(pseudoscience)의 이름을 가져와 ‘유사역사학’이라 부르는 현상은 조선학 운동을 둘러싸고 벌어진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의 논쟁에서 도대체 왜 ‘과학(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으로 읽을 여지가 있다. 오랜 시간 유사역사학과 싸움을 이어온 역사 작가 이문영은, 유사역사학이 왜 위험한지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정치에 악용된 과학과 이념과 신앙에 왜곡된 역사학이 조우하는 지점이다.
”자국, 자민족을 우선시하는 움직임은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21세기임에도 이런 움직임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우리는 우등 민족이고 너희는 열등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한 갈등을 멈출 방법은 없다. 유사역사학은 민족의 자부심을 기른다는 미명 아래 중국과 일본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고, 동남아 국가들은 아예 불가촉천민처럼 다룬다. 인류가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자유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이상을 실현하는데 유사역사학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이들이 권력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불안한 세계로 한 걸음씩 가까워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교육계에서도 유사역사학에 대한 경계심이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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