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암살한 조선, 아무 관심없던 과학기술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구한말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은 어땠을까 ②김옥균의 암살과 조선의 과학기술

구한말 전차 풍경을 찍은 사진. 전차와 전기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미국인 해리 보스트윅(1870~1931)의 외손녀 웬디 새들러씨가 소장하고 있었다. 사진=연합뉴스
구한말 전차 풍경을 찍은 사진. 전차와 전기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미국인 해리 보스트윅(1870~1931)의 외손녀 웬디 새들러씨가 소장하고 있었다. 사진=연합뉴스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왕을 버리지 못한 근대인, 홍종우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 조선은 적어도 동방의 불란서가 되어야 한다.” -김옥균

홍종우는 대부분 김옥균를 암살한 출세 기회주의자 혹은 군주제를 지지하면서 훗날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 맞서 황국협회를 만들어 보부상을 동원해 독립협회를 탄압한 수구파의 관료로 평가되고 있다. 1988년 출간된 <만인보>의 6권엔 홍종우에 대한 시가 적혀 있는데, 시인은 그를 조선의 수구반동세력으로 평가했다.

“조선사람으로는 처음으로/법국 빠리 소르본느 대학에 가서/춘향전도 번역하고/르낭과도 친한 사이/보들레르 단골집 술 마시고/공부 잘하고 온 사람/그 공부 바로 내버리고/돌아오는 길/자객으로 바뀌어/일본에서 상하이까지 따라가/개화당 김옥균을 쏘아 죽여버리니/그 송장 보내어/효수케 하고/유유히 본국에 돌아온/자객 홍종우/그 공덕으로 좀벼슬 살다가/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 맞서/황국협회를 만들어/보부상을 동원/독립협회 때려부수는 일에 앞장섰다/조선왕조의 최후를 반동으로 장식한 자/오늘도 이 땅 도처에/홍종우의 자식들로 놀아나니/역사는 역사 따위 등진 자에게도 살 데를 주나니” (고은의 만인보 ‘홍종우’, 6권)

하지만 홍종우를 단순히 구한말의 보수적 정치인으로 보기엔, 그의 행적은 좀 흥미롭다. 첫째, 홍종우는 적극적으로 조선 바깥의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다. 심지어 그는 조선이 열강의 침략을 벗어나 독립적인 국가로 탄생하는 길은, 서구의 문물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힘을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조선말 성리학적 통치질서의 유지를 위해 쇄국을 단행했던 위정척사파와 달랐다. 그는 주체적 근대화 및 황실의 권위 회복을 주장한 구한말의 보수적 정치인이었으나, 유럽문명이 이룬 성취를 인정하고 이를 이용하려던 개혁적 인물이었다. 그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심청전>의 서문은 32페이지의 긴 글로 한국을 소개하고 있는데, 거기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이 글은 공화국에 사는 데 습관이 된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선조가 세운 정부형태에 우리가 집착하는 것을 탓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기질의 문제이다. 국민의 관습에 미치는 기후의 영향에 대해서는 오래 전에 증명된 바 있다. 인디언들이 에스키모인과 같이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하여 아무도 그들을 책하려 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다른 정치체제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정부형태를 그대로 지켜나가면서, 이번에는 우리가 유럽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 일에 있어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에게 우리의 존경심과 사랑을 바칠 것을 미리 약속한다.”

이 말 속에 홍종우의 정치사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심지어 홍종우가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심청전>은 원형과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이 소설에서 그는 왕을 중심으로 이상 정치를 구현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즉, 홍종우에게 조선의 군주제와 왕은 독립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고, 그는 독립국가 조선을 위해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이를 지키고자 했다.

둘째, 홍종우는 독립협회를 탄압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독립협회보다 더 근대적인 방식의 의회 중심 체제를 주장했다. 즉, 서재필 등의 엘리트 지식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독립협회는 만인공동회로 세력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 민중을 무지하다고 여기는 계몽의 함정에 빠져 상원 중심의 의회를 주장했지만, 홍종우가 중심이 된 황국협회는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하원 중심의 정치 체제로의 개편을 주장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했지만, 대한제국에서 시행된 마지막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을 얻은 홍종우라는 인물의 시대적 분열의 조건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했지만, 그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출세라는 현실적 장벽을 넘어야만 했다. 홍종우는 몰락한 양반이었고, 갑신정변의 주역 대부분은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언뜻 생각하기에 홍종우의 사상이 더 급진적이어야 할 것 같지만, 당시 조선이 처해 있던 현실은 이런 상식이 통용될 정도로 간단치 않았다. 몰락한 양반이자 개화사상가였던 홍종우는 왕을 수호하려 했고, 귀족의 자제들이었던 개화당은 일본의 힘을 빌어서라도 왕을 제거하려 했다.

흙수저 홍종우는 기존 체제를 수호하며 온건한 개혁을 원했고, 금수저 김옥균은 기존 체제를 부정하며 급진적 개혁을 원했다. 김옥균과 홍종우가 살아가야 했던 구한말은 분명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서구열강과 벌써 부딪쳐 국가를 개조하고 있었던 일본, 정치적 부패 속에 무너져가는 청나라 등을 보며 조선의 지식인이 취해야 할 실천은 너무나 분명했다. 서양을 인정해야 했지만, 주권을 지키려면 강해져야 했다.

독립협회가 주도했던 만민공동회. 홍종우가 중심이 된 황국협회는 독립협회를 테러하기도 했다.
독립협회가 주도했던 만민공동회. 홍종우가 중심이 된 황국협회는 독립협회를 테러하기도 했다.

국제주의자 홍종우와 세계주의자 김옥균이 꿈꾼 ‘조선’

만약 고종과 민비 세력의 일원이 김옥균을 암살했다면 역사적 설명은 단순해진다. 망해가던 나라 조선에서 벌어진, 권력을 둘러싼 암투로 이해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김옥균의 암살자로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를 선택했다. 조선 정부는 홍종우를 개화파로 속여 김옥균과 그 동료들의 의심을 벗어나려 했다. 즉, 당시 개화사상을 받아들이냐의 여부야말로 그가 김옥균의 편이냐 조선정부의 편이냐를 가르는 시대정신이었다는 뜻이다. 개화는 시대정신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김옥균과 홍종우는 모두 개화를 원했다. 개화의 정도와 속도에서 차이는 있었지만, 조선이 자신의 전통만으로 국제 무대에서 독립국가가 될 수 없음을 이들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조재곤의 책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조재곤의 책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실제로 김옥균과 홍종우는 서로 말이 잘 통했다고 전해진다. 홍종우의 프랑스 요리 솜씨는 일품이었으며, 그는 근대사상에도 해박했다. 김옥균은 프랑스 유학생이자, 국제무대에서 활동했던 홍종우가 조선을 개화시켜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적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김옥균은 일본의 근대사상가이자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을 근대국가로 만드는데 크게 일조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물론, 고토 쇼우지로, 이노우에 카오루 등 수많은 일본의 유력 정치인 및 지식인과 교류했고, 이홍장의 아들을 비롯한 청국 인사들과도 폭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던 세계주의자였다.

홍종우 또한 일본 자유당의 당수는 물론 프랑스의 유력 인사들과 교류하며 국제적 감각을 쌓은,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인재였다. 적어도 국제정치의 맥락에서라면, 그 둘의 생각은 거의 일치했다. 문제는 왕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홍종우는 왕권을 절대적인 것이라 여겼다. 그의 국제적 경력과 지식에 비추어 볼때, 왕에 대한 홍종우의 집착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 답은 김옥균 암살 이후 홍종우의 삶을 추적할 때 분명해진다.

김옥균 암살 이후, 홍종우는 고종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는다. 그는 삼일제라는 마지막 과거에 합격해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고, 이후 10일 만에 사헌부 헌납으로 승진했다. 과거급제자의 첫 관직으로는 파격적인 처우였으며, 이후 그는 고종의 절대적 신임을 얻는다.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될 때 연호를 ‘광무’로 정할 것을 건의했고, 이후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경제 및 외교 문제에 대한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각국의 내정 간섭을 반대하는 것은 물론, 군권의 확립과 함께 군사권 간섭을 반대하는 등 조선의 자주권을 위한 개혁에 몰두했지만 이를 위한 방법에서 군주권이 절대화되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민선의원으로 이루어진 의회의 설립을 주장했지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조선 근대화의 제일로는 황제권의 절대화였다.

왕에 대한 홍종우의 시대정신과 괴리된 충심은, 그가 1898년 보부상을 중심으로 황국협회를 구성하는 계기가 된다. 보부상들의 이익단체를 표방했지만, 황국협회는 정치단체에 가까웠다. 그건 그들이 독립협회가 주도하는 만민공동회를 습격해 테러한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홍종우의 지휘 하에 일어난 이 테러로, 황실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조선에서 자주적으로 피어나던 민주주의의 꽃, 만민공동회를 짖밟았다. 독립협회의 민권운동이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단두대에서 왕을 처형한 대혁명의 나라 프랑스에 조선인 최초로 유학을 갔던 홍종우, 그는 메이지 유신이 프랑스 헌법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은 어폐에 가까웠다. 메이지 유신은 프랑스가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 등이 독일 유학을 토대로 독일식 입헌주의 헌법을 일본의 입헌군주제에 적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홍종우에게 중요한 것은 프랑스가 아니라, 메이지 유신 그 자체였다. 황권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군사제도를 개혁한 일본의 황제 중심 국가체제 말이다. 홍종우는 황권의 강화만이 조선을 일본처럼 강한 국가로 만들 유일한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후 홍종우는 여러 관직을 섭렵하고 1903년 친일파들에 밀려 제주 목사로 밀려난다. 당시 제주에서는 이재수의 난인 신축민란 이후 대한제국과 프랑스 간의 피해배상 문제로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는데, 당시 조선에 드물었던 불국통인 홍종우가 이 문제를 해결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홍종우는 스스로 사직한 이후 역사적 기록에서 사라졌다. 김옥균의 세계주의가 순진하게 외국을 믿어 실패했다면, 홍종우의 국제주의는 왕에 대한 그의 낡은 집착과 몰락한 양반으로서 강하게 지녔던 출세욕으로 인해 조선의 근대화에 실패했다.

홍종우를 재조명한 역사학자 조재곤은 “국가나 민족을 초월해 전 인류의 공존을 꿈꾼 세계주의자 김옥균은 일본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들의 힘에 의존하고 말았고, 홍종우는 주체적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제국주의를 극복할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조선을 버렸다>의 작가 정명섭은 홍종우와 김옥균의 조선 근대화는 “방향은 같지만 길이 다르다”고 말했다. 둘이 꿈꾼 조선의 미래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시대가 둘을 갈라놓았을 뿐이다. 정명섭이 책의 부제를 ‘정답이 없는 시대, 홍종우와 김옥균이 꿈꾼 다른 나라’라고 한 것은 혼란스러웠던 구한말의 상황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었다.

김옥균(왼쪽)은 세계주의자였고, 홍종우는 국제주의자였다. 조선이 멸망해간 구한말이라는 시대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대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옥균(왼쪽)은 세계주의자였고, 홍종우는 국제주의자였다. 조선이 멸망해간 구한말이라는 시대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대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 아닌 ‘과학기술’이 필요했던 시대

“유학이 이처럼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면 외국의 과학자, 기술자를 초빙하여 국내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고 이는 19세기 후반 일본과 중국에서 널리 활용된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구한국시대에는 한번도 본격적으로 시도된 일이 없었다.”- 박성래

정답이 없는 시대였지만, 정답을 찾아가는 나라도 있었다. 동아시아를 침탈하고 있던 서구문명의 힘이 그들이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축적한 시간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분명했다. 서구의 정치제도와 경제체제 역시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었지만, 가장 쉽게 서양을 따라잡는 방법은 과학기술로부터 시작하는 길이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각종 제도를 서구식으로 정비한 일본은 이 길을 따라가기 가장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일본은 서양의 모든 것을 배우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했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최우선 순위를 차지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수많은 유학생을 서양에 보냈고, 서양의 과학기술교육 제도를 그대로 일본에 들여왔다. 그리고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서양의 과학기술을 내재화하기 위해 서양인을 초빙해 선생으로 고용했다.

1874년, 메이지 정부 국가 예산의 30%가 외국인 선생들의 급여였고, 몇몇 엔지니어의 봉급은 수상 이토 히로부미보다 높았을 정도다. 일본은 서구의 강력함이 과학기술력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오래전 포르투칼 상인을 만나 총포기술을 배울 때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들이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과학기술의 수용에 집중한 건 서양을 좀 더 정확히 파악할 축적의 시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를 하나의 이론과 사상으로 집대성한 지식인이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다.

정명섭의 책 '그래서 나는 조선을 버렸다'
정명섭의 책 ‘그래서 나는 조선을 버렸다’

조선은 반대였다. 제도를 정비하기엔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계속되는 민란과 반역, 그리고 외세의 계략으로 조선은 과학기술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난학에서 과학으로 이어지는 일본 과학기술 수용에서 존재했던 축적의 시간이 조선에도 분명히 있긴 했다. 조선후기 성호 이익에서 북학파를 거쳐 최한기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는 분명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과 이를 통해 새로운 학문을 건설해보려는 노력이 녹아 있다.

하지만 박성래의 말처럼, 조선은 너무 늦게 그 준비를 시작하려 했고, 일본을 따라하려던 노력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조선도 유학생을 보내고 외국인을 고용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이마저도 지속적이지 못했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렇다할 과학기술자를 단 한명도 길러내지 못했다. 이완용과 김옥균은 후쿠자와 유키치와 교류하며 서양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았지만, 이를 조선에서 실천하기엔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다.

홍종우도 서양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지만 그는 왕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홍종우가 생각하는 서양문물은 대부분 제도와 법 그리고 경제체제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가 프랑스에서 주로 한국과 아시아의 문학작품을 번역해 소개했다는 점과 동아시아의 점성술 책을 번역했다는 점, 또한 자연사박물관의 역사로 유명한 프랑스에서 지낸 홍종우의 삶 속에서 과학기술과 관련된 그 어떤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홍종우의 인식 속에서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이 정확히 인식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홍종우의 인식체계 속에는 조선을 500년 동안 지탱해온 성리학적 질서가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홍종우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고, 그들의 정신문명만을 직접 대면하려 했다. 그리고 도덕적 형이상학인 성리학적 인식체계 속에서 홍종우는 서양문명의 단점을 누구보다 빠르게 발견했다.

화가 펠릭스 레가메의 회고 속에서 홍종우는 프랑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에서 뭐가 좋았습니까?”

“말들이오. 마르세유에 도착해서 봤는데 크고 튼튼해 보였소.”

“나빴던 것은 뭐였습니까?”

“이기주의였소.”

서양의 이기주의와 탐욕이 세계대전으로 번진 건 홍종우의 프랑스 방문 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을 방문했던 중국의 철학자 양계초와 장군매는 그 모습을 보고 서양의 물질문명은 종말을 맞았다고 확신했고, 중국에 돌아와 5 ·4 신문화 운동의 주역들과 ‘과학과 인생관 논쟁’을 시작한다.

홍종우는 조선의 양계초였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물리학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서양 따라잡기를 ‘과학기술 총력전의 시대’라고 부르며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과학기술을 부국강병의 수단으로만 받아들인 일본이 산업화에 성공했지만, 이후 자유와 합리주의 등 서양의 근대정신을 배제한 결과 ‘원자폭탄 피해’라는 참극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19세기말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던 조선의 지식인에게,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우려는 배부른 형이상학이었을지 모른다. 과학기술을 앞세워 제국주의적 침략을 자행한 서양을 홍종우는 정확히 꿰뚫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너무 앞서 있었다. 열강 틈에서 조선이 당당히 서기 위해 필요한 힘의 원천을 그는 읽어내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당시 조선에 필요했던건 너무나 분명했다.

근대화를 위해 과학기술은 반드시 필요했지만 왕권체제가 꼭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열강의 침탈 속에서 각 국은 이기적일 수 밖에 없었다. 김옥균은 열강을 지나치게 믿었고, 홍종우는 과학기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글쓴이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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