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과 한국 근대과학의 좌절된 씨앗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김옥균은 친일파인가, 근대화 선구자인가 ③대원군도 인정한 김옥균의 근대화 철학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개항 이후 문호개방정책과 함께 가장 강하게 당시 위정자나 지식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서구과학 분야였다. 근대화의 추진과 침략에 대한 대응이라는 이중과제를 안고, 부국강병의 실현이라는 대명제 아래 서양의 장점은 바로 과학기술에 있다는 인식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의지로 확산되었다- ” 이배용 <개화기 서구 과학기술 수용의 역사적 의미> 중에서
극단적 평가를 받는 문제적 인물, 김옥균
김옥균의 시체는 조선으로 보내졌고, 그의 시체는 양화진으로 옮겨 능지처참한 뒤 ‘대역부도죄인 김옥균 능지처참’이란 목찰과 함께 매달렸다. 조선의 역사에서 이토록 처참하게 처형된 정치인은 많지 않다. 바로 이 사실로부터 김옥균의 존재가 당시 망해가던 조선 조정에 얼마나 강력한 위협이었는지 알 수 있다. 김옥균의 혁명은 ‘삼일천하’로 실패했지만, 갑신정변에 담긴 근대정신은 조선왕조를 뿌리부터 위협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 김옥균은 그 누구보다 위험한 인물이었다.

김옥균이 죽자, 당시 조선 보수주의 정치인의 대표격이던 흥선대원군까지 안타까워했다. 쇄국주의로 조선의 근대화를 늦춘 그 흥선대원군이 “옥균이는 실로 충정우국의 선비다… 그의 뜻은 처음부터 폐정을 개혁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도모하려는 데 지나지 않았다”며 김옥균의 죽음을 슬퍼했다. 김옥균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다. 한 때 한국에서 그는 친일파로 매도되었으며, 또한 반대로 근대화의 선구자로 재평가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김옥균은 ‘문명개화론’ 및 ‘실력양성론’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 우파 계열과 아시아주의를 내세우던 일본인 및 친일조선인 모두에게 추앙받았다.
민족주의 우파는 김옥균을 이용해 실력양성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고, 친일파는 그를 ‘동양평화의 희생자’로 만들어 국권강탈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이 두 계열은 모두 1930년대 김옥균의 사상을 보급하기에 힘쓰는데, 당시 친일파에 의해 추앙된 김옥균의 이미지 덕분에, 해방 이후 김옥균에겐 친일파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았다.
김옥균에 대한 상반된 역사적 평가는 남과 북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1958년 김일성은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총회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른 나라에는 모두 부르주아 혁명이 있었는데 왜 우리나라의 력사에는 그것이 없는가? 중국에는 강유위나 양계초와 같은 부르주아 혁명가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없었는가라는 문제를 역사가에게 제기합니다.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김옥균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김옥균은 약삭빠른 사람들이 친일파로 규정하여 버렸습니다. 김옥균이 친일파인가 아닌가는 금후 보다 더 연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북한학계가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한 이유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전 단계인 자본주의 시민혁명으로 갑신정변을 설정해야 할 정치적 필요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은 갑신정변을 김옥균 중심의 영웅사관으로 서술해 그 동료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저평가했고,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와의 교분 관련 내용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으며, 갑신정변 이후 농민들 사이에서 개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겨 갑오농민전쟁을 개화파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할 여지가 거의 없음에도, 억지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에 따라 자의적으로 역사적 해석을 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김옥균을 실학사상, 갑오농민전쟁, 민권운동 및 애국문화운동과의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 북한학계와는 달리, 남한에서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남한의 연구는 폭넓은 자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개화당의 이상과 목적의 선진성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어느정도 합의가 되어 있지만, 그 추진과정에서 일본을 끌어들였다는 점에 대한 이견은 여전히 존재한다. 북한이 사회주의국가 건설의 법통성 및 당위성 차원에서 김옥균 연구를 추진했다면, 남한은 근대 민족운동선상에서 갑신정변을 이해하려 했다.

식민지 민중은 왜 실패한 혁명가를 소환했는가
역사가 인물과 사건을 기록하고 소환하는 방식은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94년 김옥균이 죽은 후, 1930년대를 전후로 김옥균과 갑신정변은 소설, 희곡, 음반, 영화 등을 통해 식민지 시기 민중의 삶으로 투영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것이 나운규가 만든 무성영화 <개화당이문(開化黨異聞)>이다. 이 영화는 나운규의 유일한 역사극으로, 김옥균의 삼일천하를 다룬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이런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룬다는건 불가능했기에 나운규는 영화를 정치적 갈등과 자객이 뒤얽힌 야사(野史)로 꾸민다. 이 영화를 식민지의 맥락 속에서 분석한 윤상현은 나운규가 김옥균을 소환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운규는 당시 김옥균과 개화당을 일진회라는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기 민중 스스로 주체적으로 제2의 김옥균이 되어 과거 실패했던 혁명이 아닌 앞으로 성공할 제2의 갑신정변을 이루어길 <개화당이문>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김옥균을 재현하는 의의이자, 시대 저항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일제 식민지 시기 김옥균은 민중들의 시대적 요청 혹은 저항에 의해 여러 문화적 장치를 통해 소환되었고, 그가 외친 근대적 국가에 대한 철학은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나라를 빼앗긴 수십 년 후에야 민중에게 전달된 셈이다. ④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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