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는 봉사인가, 용역인가?
[박만규의 ‘에티모버스’(Etymoverse)] 봉사한 게 아닌데 봉사료라니? 수평적 인간관계 뜻하는 한국어 더 없을까
- ‘에티모버스’는 어원을 뜻하는 étymology와 우주를 뜻하는 universe를 저자가 합성한 말이다. 역사를 모르면 현재의 올바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말은 우리가 쓰는 언어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무심코 쓰는 어휘들의 어원에는 개념이 처음 형성될 당시 사람들의 사유가 비유와 함께 담겨 있어 인류의 사물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심오한 세계관을 알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는 이후 변화의 궤적 탐색을 통해 지금 우리 생각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게 해 주고, 이로써 우리의 미래를 바꿀 수 있게 해 준다.
[박만규 아주대 교수] 요즘 연말이라 많은 사람들이 송년회 일정을 잡느라 분주하다. 그런데 호텔 같은 곳에서 모임을 가지려 하면 예약 시에 항상 봉사료가 포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해괴한 ‘봉사료’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전에 보면 ‘봉사’(奉仕)는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요컨대 돈을 받고 하는 행위를 봉사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 ‘봉사료’라는 표현은 참으로 논리에 닿지 않는 말이 된다.
service, 주종관계에서 수평 관계로 확장
봉사료라는 말은 본래 영어 ‘service(charge)’의 번역어인데, 여기서 service를 일률적으로 ‘봉사’로 번역하다 보니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service의 동사형인 serve는 노예를 뜻하는 라틴어 servus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까 ‘마치 노예가 주인을 위해 하듯이 충성심을 갖고 일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고 이는 곧 바로 성직자의 하느님에 대한 경배로 비유되어 하느님의 종으로서 성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뜻으로도 확장되었다. 여기에 다시 ‘예배를 드리다’라는 뜻도 나왔으며, 나아가 국가‧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다는 의미로 나왔는데, 이 같은 의미들은 모두 우리말의 ‘봉사하다’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서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다 하겠다.
한편 serve는 노예와 주인, 성직자와 하느님, 국민과 국가 등 주종관계나 상하관계에서 벗어나 고용주와 피고용인이라는 수평적인 계약관계로도 확장되어 ‘~를 위하여 일하다’ 혹은 ‘~에게 용역을 제공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같은 의미는 우리말 ‘봉사하다’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 상대로부터 대가를 받고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가운데에서도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손님을 위해 음식 시중을 들다’라는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고, 뜻을 더 좁혀 ‘종업원이 주방으로부터 손님 테이블에까지 음식을 날라다 준다’라는 의미로도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 최근에는 “이 식당은 서빙이 느리군”이나 “서빙은 네가 맡아라”처럼 ‘서빙’(serving)을 음식을 갖다 주는 행위를 뜻하는 말로 흔히 쓰고 있다. 그래서 ‘10%의 봉사료가 추가됩니다’라고 할 때의 ‘봉사료’는 바로 음식을 갖다 주는 요금인 ‘service (charge)’의 번역어이고, 따라서 봉사료가 아니라 일종의 인건비인 것이다.
요컨대 serve가 최초에 가졌던 의미는 윗사람에 대한 봉사였지만 그 다음은 (돈을 받고 제공하는) 용역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본래의 의미로부터 전이된 의미들 모두를 service라는 하나의 단어가 다 담당하고 있지만, 이를 한국어의 경우 ‘봉사’ 하나가 모든 의미를 다 커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본래적 의미에는 ‘봉사’로 번역을 하되, 전이된 의미들에는 ‘용역’ 등과 같은 단어로 번역을 해야 타당할 것이다. 문제는 이때 음식을 테이블에 갖다 준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적절한 우리말 번역어가 없다는 것이다. ‘용역비’라고 하기에는 너무 포괄적이고 ‘운반료’나 ‘배달료’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여 적절하지 않다. 그러므로 ‘서빙’을 외래어로 인정하고 ‘서빙료’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봉사료’를 쓰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다.
‘수평관계’ 함의있는 한국어 만들어보자
물론 여기에서 이왕이면 고유어를 살려서 조어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고유어 동사 ‘나르다’의 명사형을 활용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며느리’이다. 일반적으로 ‘며느리’는 어원 미상의 단어로 알려져 있는데, 학자에 따라 고어형 ‘며 ㄴ+아래아 리’를, 밥을 뜻하는 ‘메’에 ‘나르다’라는 뜻의 동사 ‘ㄴ 아래아 르’와 접사 ‘이’가 결합되어 형성된 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며느리를 집에서 밥을 나르는 사람으로 개념화한 당시의 성차별적인 발상을 드러내고 있어 몹시 씁쓸하다. 아무튼 ‘나르다’의 명사형을 만들어 쓰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아 이것도 쉽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한국어에도 영어의 serve처럼 주종관계의 충성행위를 나타내는 단어가 있다는 점이다. ‘시중(을) 들다’가 그것이다. 이는 옆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함을 일컫는데, 여기서 ‘시중’은 ‘시종’(侍從)에서 기원한 말로서 이는 임금을 곁에서 모시고 심부름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시종’은 모실 시(侍)와 좇을 종(從)이 결합한 말로, 임금을 모시기 때문에 벼슬이지만 사실상 왕에게는 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어의 예처럼 시종이 주인에 대해 가지는 충성의 태도로부터 ‘시중’, 즉 ‘봉사’라는 개념을 이끌어 낸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한국어 ‘시중’은 불행히도 여기에서 그친다. 즉 윗사람에 대한 봉사로 머무는 것이다. 영어에서처럼 수평적인 사람들 사이의 용역이라는 의미로까지 확장하지는 못한 것이다. 영어에서 수평축으로의 이동이 가능했던 것은 서양 사회가 시민혁명을 통해 특권적인 왕족과 귀족 계급을 타도하고 모든 사람이 법률상 평등한 사회를 이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앞서 ‘service (charge)’를 음식을 테이블에 갖다 주는 노동에 대한 대가라고 했는데, 이보다 조금 더 포괄적으로 종업원이 손님을 위해 음식 시중을 드는 대가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시중료’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여전히 이 ‘시중’이라는 말이 주종관계의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우리말 ‘시중’이 이제 영어처럼 수평적 관계에서도 쓸 수 있는 개념으로 확장할 수 없을까? 요즘 ‘(사람을) 케어한다’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 ‘돌본다’는 말이 역시 주종관계를 전제로 하는 듯하여 이에 대한 대안으로 쓰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국어는 정말 멋진 언어인데 새 시대에 필요한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부족한 듯하다. 이제부터 주종관계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수평관계를 나타내는 상황에도 씀으로써 수평관계의 의미로 확장시키도록 해 보면 어떨까? 영어의 serve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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