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사과와 심심하지 않은 우리 교육

윗세대들이 반성해야할 이유 문해력보다는 문제풀이에 매몰시킨 탓 논술을 교육방법으로 재정립시켜야

일본 IT기업의 상징중 하나였던 도시바가 2017년 실적악화로 경영진이 사과하는 모습. 사진= 연합뉴스
일본 IT기업의 상징중 하나였던 도시바가 2017년 실적악화로 경영진이 사과하는 모습. 사진= 연합뉴스

한자교육 부족의 문제일까

최근 어느 콘텐츠 전문 카페의 게시문에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인기 작가의 사인회 예약과 관련하여 “예약 과정중 불편 끼쳐 드린 점 다시 한 번 심심한 사과 말씀드린다”라고 공지했는데, 이에 대해 다수의 SNS 이용자들이 “심심한 사과 말씀이라니 레전드”, “심심한 사과? 난 하나도 안 심심하다”, “어느 회사가 사과문에 심심한 사과를 쓰냐”등 많은 비난을 쏟아냈다. 깊고 간절하다는 뜻의 ‘심심(甚深)하다’를 권태롭다는 뜻으로 오해한 것이다.

사진= 트위트 캡쳐
사진= 트위트 캡쳐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혹자는 한자를 쓰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라고 할지 모른다. 물론 한자어가 많은 동음이의어를 만들어내는 구조도 이유 가운데 한 몫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일상생활에서 한자를 널리 쓰는 것이 해법은 아니다. 문맥 등이 해소해주기 때문에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당연히 어휘력과 문해력 부족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언어는 동음이의어(homonym)가 있으며, 또 거의 대부분의 단어가 하나의 형태 내에 여러 뜻을 가지는 다의어(polysemous word)이다. 우리가 아무리 영어를 오래 공부했어도 여전히 어렵다고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들 동음이의어나 다의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 아는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도 해석이 안 되는 경우들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한 단어가 가지는 여러 의미들 가운데 어떤 의미를 선택해 조합해야 할지 어렵기 때문이다.

워싱턴DC의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에 새겨져 유명해진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와 금연 구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인 ‘smoking free area’, 극장에서 주인이 없이 비어 있는 자리인지 물을 때 쓰이는 ‘Is this seat free?’ 등에서 free의 ‘자유롭다’라는 의미 하나만을 알고 있다면 이 표현들을 이해할 수 없거나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저하된 문해력으로 인해 이제 이런 현상의 발생은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다. ‘사흘’을 ‘4일’로 오해하는 학생들이 있고, 어느 고등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이지적’이라고 칭찬을 했음에도 그 학생은 오히려 교사가 자신을 쉬운 아이로 여겼다고 불만을 접수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교사로부터 ‘고지식’하다는 지적을 받고 이 말을 ‘고(high)+지식’으로 오해하여 오히려 칭찬받은 것으로 생각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누리꾼들 가운데에서는 ‘심심하다’ 파동에 대해 ‘무료하다도 공짜라고 해석하겠다’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맥락만 봐도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무식하면 검색해 보는 성의라도’ 등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교육의 잘못은 어디에서 왔나

그렇다면 어휘력과 문해력의 부재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교육이다. 어휘력과 문해력은 읽고 쓰는 독서 활동과 듣고 말하는 토론 활동을 통해 확장되는 능력이다. 그런데도 우리 교육은, 서양과 달리,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활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정해진 수의 학습서를 읽고 반복적인 문제 풀이 활동에 학생들을 매몰시킨다. 결국 젊은이들을 비난할 문제가 아니다. 어른들이 교육을 잘못시키고 있기에 발생한 문제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문제 풀이에 매몰되었는가? 평가를 통해 학생들의 실력을 변별하기 위해서이다. 본래 평가는 교육의 결과를 측정하는 수단인데, 우리는 교육이 평가를 위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역전되었다.

그러면 왜 우리의 교육은 평가를 위한 수단이 되었을까? 선진국을 빨리 따라잡기 위해서 지식 습득 위주의 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선진국이 이미 시행착오를 통해 알아내었던 가장 효율적인 답, 즉 정답을 주입하는 방식을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도 이제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섰다. 문제의 최전선에 있는 나라에게 정답이란 없다. 단지 보다 나은 답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 필요할 뿐이다. 단순한 암기력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와 창의력 등 고차원적 사고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눈을 돌려 서구 선진국의 교육방식을 살폈다. 선진국들이 책을 읽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쓰는 에세이 중심의 교육을 시행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에세이를 ‘논술’로 번역하여 이를 우리 교육에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교육방식의 전면 쇄신을 위해 도입하지 않고 토론식 수업과 수행평가 등의 형태로 제한적으로만 적용했다. 교육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대신, 이를 대학 입시에 적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왜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대학입시에 대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많은 책을 읽는 대신 논술 시험에서 답안을 잘 작성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방식으로 우회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실시하는 교육방법으로서의 에세이 교육이 한국에서는 논술시험으로 퇴락하고 말았다. 에세이가 교육방법이 되어야 하는데 평가방법이 되었다. 그래서 실패했다. 이는 잘 가르치려는 노력보다 좋은 학생 받으려는 노력을 하는 대학들과 잘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대학 졸업장 받기 위해서 대학에 가는 학생들의 공모가 이루어낸 결과다.

교육방법을 바꿔야 심심하지 않다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는 명확하다. 이처럼 교육의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 그것이다. 사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고등학교의 교육은 입시위주의 교육이다. 교사들이 입시라는 평가를 위해 교육을 하는 것이다. 교육을 얼마나 잘 받았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에 맞추어서 교육을 하는 것이다.

평가 위주의 교육이 낳는 폐해는 한국인의 영어 교육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영어를 배워도 한국인은 여전히 영어를 잘 못한다. 실제 영어 능력 향상보다 시험에서의 고득점 획득의 요령에 맞추어 공부를 하다 보니, 시험 성적은 높아도 영어로 이루어지는 대학 강의를 듣고 이해하고 토론하는 능력은 다른 나라 젊은이들에 비해 형편없이 떨어진다.

시험 위주의 교육은 또한 국가 전체의 역량에도 한계를 설정한다. 종이, 화약, 나침반 등 세계 과학의 3대 발명이 모두 중국에서 나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13~14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에 월등히 앞서 있던 중국의 과학이, 과학혁명을 통해 근대과학으로 발전한 유럽에 뒤처져 버린 이유 가운데 하나를 조셉 니덤(Joseph Needham)은 그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실험과 수학에 기반한 과학이 아니라 지식 암기를 측정하는 ‘과거제도’에 있음”을 지적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논술을 평가의 수단으로 둘 것인가 아니면 교육의 방법으로 제 위치를 찾게 할 것인가?

글쓴이

박만규 아주대 교수

박만규 아주대 불문과 교수는 언어에 관한 다양한 주제, 특히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언어, 어원과 인간의 사유, 한국어와 영어/프랑스에 나타난 세계관의 차이, 현대 프랑스 문화의 기원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사전학회와 한국프랑스어문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프랑스정부 학술공로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설득언어’와 ‘빛나는 당신이 있다면 촛불을 켤 필요가 없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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