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김옥균의 개혁과 과학기술 의지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④조선과 일본의 국력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김옥균은 1851년 충남 공주에서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는 한학을 공부했으며 특히 강릉 이율곡을 모신 서원에서 율곡의 학풍과 실학을 공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16세인 그가 서울로 돌아온 1866년은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개항을 요구한 양요의 해였고,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대원군이 쇄국을 위해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였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같은 인물은 정치적 현실주의 속에서 자주적인 개국을 부르짖었지만, 민중 사이에선 동학이 창교되어 서학의 반대편에서 봉건 지배질서를 뒤흔들고 있었다. 조선에 찾아온 근대의 여명기에, 김옥균은 자연스럽게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유홍기, 오경석, 이동인, 박규수 등과의 만남을 통해 근대적 지식인으로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그는 북촌에 살았다. 훗날 ‘갑신오적’으로 지목된 다섯명의 혁명동지들 즉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도 모두 북촌에 모여 살았다. 당시 북촌은 한양 명문가가 모여 살던 동네였고,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함께 공부하고 놀며 자란 사이였다. 1884년 정변 당시 김옥균은 34세, 홍영식은 30세, 박영효는 24세, 서광범은 26세, 서재필은 21세였다. 나이가 가장 많았던 김옥균은 자연스레 이들의 리더가 된다. 북촌에 살던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만난 이들은 박규수에게서 개화사상을 배웠을 뿐 아니라, 사람이 없는 한적한 절을 돌며 개화사상에 대해 공부했다. 이 때 개화승이라 불린 이동인을 만나 의기투합하기도 하고 오경석, 유홍기 등의 개혁적 중인들과도 스스럼없이 교류했다.
김옥균을 만났던 사람 대부분은 그가 달변이었다고 전한다. 김옥균 스스로도 자신에게 5분만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그는 한학을 공부한 만큼 시문서화 모두에 능통했고 외국어, 무예, 조각, 화투나 바둑 같은 잡기에도 능했다고 한다. 그는 박규수의 천거로 고종의 눈에 들어 26세에 관직에 임용됐는데, 이후 일본을 드나들며 새로운 문물을 직접 접하고 당시 일본의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19세기 중반, 북촌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금수저였던 김옥균이 왜 급진적인 지식인이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주장했던 개혁사상과 더불어 그의 사상에 씨앗이 되었던 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학풍을 살펴야 한다.
시대를 앞서간 김옥균의 개혁의지와 과학기술
“한마디로 집약하면, 김옥균 등 초기 개화파의 사상은, 무엇보다 서세동점과 약육강식의 권력정치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내셔널리즘의 사상이었으며, ‘동도서기+문명개화 →부국강병→독립의 유지’가 그들이 구상한 민족적(국가적) 독립구상의 구조였던 것이다.... 개화파 사람들이 근대화의 모델을 일본에서 구했던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들의 말을 빌린다면 근대화에는 서양과 같이 수 세기나 걸렸던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일본과 같이 수십 년 만에 달성한 경우가 있어서 조선이 택해야 할 길은 후자라는 생각이었다.” -김영작
김옥균과 그의 갑신정변 동지들이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주장했던 개혁사상의 요지는 갑신정변 직후 발표된 ‘갑신정강’과 자신의 회고록인 ‘갑신일록’에 잘 나타나있다. 초기 개화파가 주도해서 창간했던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신문 ‘한성순보’에는 이들이 주장했던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통한 조선의 주체적 독립의 구상이 잘 드러나 있다. 김옥균의 사상을 연구한 김영작은 이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문명의 도(道)를 가지고 인민을 가르치는 것이 조선의 위기 타개의 방편이라는 주장에서처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생활태도를 주장하고 문명세계에 있어서의 과학의 발전, 특히 기술문명을 인식시켜 조선의 위기를 타개하는 무기로 삼고자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기존의 가치척도나 중화적 명분론의 도그머티즘dogmatism을 가지고서는 급변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정세에 대처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점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론자들의 시대를 뛰어넘는 진보성이 있었다.”
김옥균은 ‘문명개화’의 목적이 물질적으로든 제도적으로든 ‘부국강병’에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시 개화파의 눈에 비친 국제정세 때문이었다. 그는 국제사회가 마치 ‘춘추전국시대’처럼 국가간 약육강식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다고 판단했고,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약자가 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실제로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였으며, 바로 이 절박한 현실인식이야말로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고종에 의해 실시된 1890년대 갑오개혁과 김옥균의 개화사상을 구분짓는 차이다. 유길준 등이 주도한 1890년대 갑오개혁의 국제관은 ‘낙관적’이었고, 김옥균이 주도한 1880년대 갑신정변의 국제관은 ‘현실적’이었다.
그는 서구사회가 주권의 독립성과 평등성을 전제하면서도 이를 오직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이라는 권력정치의 맥락에서만 사용한다는 점을 일찍 간파했다. 김옥균이 ‘한성순보’에 1883년 프랑스에 의해 베트남이 점령당한 사실과 관련한 논설을 쓴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김옥균과 개화파 동지들은 ‘부국강병’ 없는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서구의 과학기술이었다.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개화파는 근대적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들은 “조선이 부강하지 못한 이유는 신지식과 과학기술을 천시하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신지식을 청소년에게 필수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갑신오적의 막내였던 서재필은 그의 회고담에서 김옥균의 과학기술에 대한 시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김옥균은 조선의 빈약함이 일반 민중의 기술적 교육이 없는 것과 상류계급 인사들의 무지에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우리나라를 구하자면 민중을 교육시키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노쇄한 자는 교육시킬 도리가 없어 청년에게 실올 같은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김옥균은 조선이 자주독립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선진 과학기술의 도입이 선행되어야 하며 “당장 외국 기술자를 교사로 초빙해 청소년들에게 기술교육을 강화시키고, 젊고 유능한 인재를 외국에 파견해 서구의 신문물과 과학기술을 직접 배워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기술개발을 통해 경제부국이 될 수 있음을 제창했다. 김옥균의 책 ‘치도약론’은 혁명에 실패한 그가 일본에 체류하면서 쓴 총 3050자의 한문으로 이루어진 논문인데, 그는 이 논문에서 신식도로의 건설과 하수도 시설, 공중변소, 도시 시장 등의 문제를 광범위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논문의 서문에서 김옥균은 왜 신식 도로를 내는 일이 조선의 급선무인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조선이 부국강병하기 위해서는 농업이 부흥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밭을 쪼개는 ‘분전’이 필요하고, 분전을 하면 오물이 줄어들고, 오물이 사라지면 전염병이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농업이 흥해도 농작물을 멀리 수송할 수 없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따라서 큰 길을 내는 것이 조선 부국강병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치도약론’에서 김옥균이 주장하는 내용 대부분은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추진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메이지 정부는 1868년을 전후해서 구미로 수많은 유학생을 내보내고 동시에 엄청난 숫자의 외국인 교사들을 일본에 초청한다. 메이지 정부의 이런 과학기술 총력전은 20세기가 밝기 전 조선과 일본의 국력차이로 나타나게 된다. 김옥균은 메이지 정부의 과학기술을 통한 개혁이 일본을 휩쓸던 1881년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직접 살피고 돌아왔으며, 바로 그 곳에서 일본 근대화 사상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다양한 진보적 지식인들을 만나고 교류한다.

박규수의 사랑방과 요시다 쇼인의 촌숙
한·중·일 3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과학기술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 특히 훗날 식민지로 추락하는 조선과 제국이 되는 일본에서 과학기술을 통한 근대화는 두 국가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근대화의 바람이 불던 19세기 말 조선과 일본에서 서구열강의 힘의 기원을 과학기술에서 파악하고, 이를 자신이 속한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들은 당시의 기준으로 진보적 지식인 그룹이었다. 조선에서 북촌에 있던 박규수의 사랑방을 중심으로 개화사상을 접하고 이후 갑신정변을 통해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했던 김옥균과 그의 동지들이 있었다면, 일본에는 요시다 쇼인이 야마구치현 하기에 세운 촌숙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있었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서울 명문 거족 출신이었지만, 요시다 쇼인은 하급 무사 출신으로 태어나 평생 변방에서 지내다 29세에 막부에 저항하다 목이 잘려 죽었다. 그가 촌숙에서 후학을 기른 기간은 2년이 채 되지 않았으나, 박규수는 10년 넘게 후학을 길렀다. 명문가 출신 박규수의 사랑방엔 당시 금수저였던 명문가의 자제들이 드나들었고, 이들 중 박영효는 왕의 사위였다. 반면 요시다의 촌숙은 변방의 하급 무사들로 채워졌다고 한다. 이들 중 농민 출신으로 촌숙에 들어왔다가 22세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인물이 바로 훗날 일본 총리가 되는 ‘이토 히로부미’다. 즉, 당시 서구 과학기술의 힘을 먼저 깨닫고 이를 부국강병에 쓰고자 결심했던 조선의 신진 엘리트 그룹은 명문가 자제로 구성되어 있었고, 일본의 경우는 대부분이 하급 무사 출신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서구적 근대화에 노출된 계급의 확연한 차이는 이후 벌어질 결과의 전조였다. 서구 열강의 침략에 위기에 처했던 일본은 관직을 하층민에게 개방하며 능력주의의 신기원을 열었고, 이런 계급의 사다리는 과학기술분야에 진출했던 하급 무사 출신들의 중앙정계 진출로 이어졌다. 인재와 능력을 중시했던 메이지 시대에 하급 무사들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세운 여러 학교들을 통해 중앙정계로 진출해 결국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성장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농민 출신의 총리였다.
반대로 명문가 자제들로 구성된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배출된 제자들은 민중과 괴리된 개혁으로 왕실은 물론 민심에서도 멀어졌으며, 대부분 망명하거나 살해당한다. 이후 조선 진보적 지식인의 씨는 마르게 되고, 양국의 운명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현재 요시다 쇼인의 촌숙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반면, 박규수의 사랑방은 헌법재판소 뒷마당으로 변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되었다. 시대를 읽는 지식인의 존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시기 조선과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시다 쇼인의 촌숙에서 일본 정계를 주도한 인물들이 등장했다면, 비슷한 시기 오사카의 데키주쿠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일본 근대사상의 아버지가 배출된다. 김옥균은 1881년에서 1884년까지 3번에 걸쳐 일본을 시찰하는데, 당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정치인 뿐 아니라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 깊게 교류한다. 이후 정변이 실패했을 때 김옥균을 받아주고 도와준 것도 후쿠자와였다. 김옥균이 ‘치도약론’에서 주장한 내용의 대부분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저술에서 빌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둘의 만남과 이후 이들이 조선과 일본에 미친 영향력의 차이야말로 과학기술과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교훈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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