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한· 중· 일 지식인들의 세계주의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⑤”조선은 작은 문제, 중국에서 혁명이 필요하다” 개화기 동아시아 지식인의 세계주의 그리고 과학기술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전근대와 다른 부강의 기초로 인식한 ‘근대 지식’의 가장 큰 특징은 실용성, 전문성, 합리성 등을 강조하는 실사구시적 학문 태도와 서구학문의 보편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성순보>는 조선의 전통 학문 범주에서는 중시되지 않았던 격물, 격치로서의 과학을 기술적인 면에 한정되었지만 근대 지식, 學으로 중시하고 있다.
이것은 과학 기술을 서구발전의 동력으로 보고, 궁극적으로 이것을 서구 국가들의 부강, 자강의 원인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항 이후 수용되는 과학, 기술 등을 단지 ‘서구’의 것으로 인식, 배척할 것이 아니라 과학 기술 지식을 공학의 차원으로 이해하여 적극 수용, 활용해야 하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김수자 ‘근대 초 <한성순보>에 나타난 공학으로서의 과학과 ‘근대 지식’중에서
김옥균, 미야자키 도텐, 그리고 쑨원의 신해혁명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을 떠난 김옥균은 일본에 10년을 머물며 끊임없이 조선개혁을 꿈꿨다. 고종과 민씨 일족의 압박으로 일본에서도 유배를 떠나야 했지만, 그는 일본의 많은 고위층 인사들과 교류하며 국제정치의 감각을 키워나갔다. 망명 시절, 김옥균은 어느새 ‘조선’이라는 작은 세계가 아닌 ‘아시아’라는 더 큰 세계를 발견했고, 서양의 침탈에 맞서기 위해 아시아의 연대를 주장하는 세계주의자로 성장했다. 여전히 내수용 정치인들로 가득한 한국의 상황에서 19세기말을 살았던 김옥균이야말로 오히려 21세기형 국제적 감각을 지닌 정치인이었던 셈이다.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하기 직전, 김옥균은 훗날 중국의 쑨원을 지원하게 되는 혁명가 ‘미야자키 도텐’과 아시아의 운명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당시 20세에 불과했던 도텐에게 갑신정변의 주동자 김옥균은 숭배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도텐은 조선은 이미 망해가고 있으니, 중국에 혁명을 일으켜야 아시아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의견을 말했고, 김옥균은 이 말에 응답하며 조선은 작은 문제이며, 중국의 흥망이야말로 아시아의 운명이 달린 큰 문제라고 맞받아쳤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김옥균은 자신이 곧 상하이로 건너가 중국의 이홍장과 만나 담판을 지을 예정임을 조심스레 알렸다. 도텐은 경호원으로 따라가겠다고 말했지만, 김옥균은 이를 만류했고 결국 한달 뒤 홍종우에게 암살당한다. 김옥균이 암살된 후 그의 모발과 의복 일부를 반입해 일본에서 장례식을 치룬 사람이 바로 미야자키 도텐이었다.
김옥균과 미야자키 도텐은 조선의 문제를 작게 보았다. 아시아가 서양의 침탈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중국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 둘은 모두 ‘아시아주의자’였고, 크게 보아 ‘세계주의자’였다. 조선의 개혁을 위해 일본을 모델로 삼았던 김옥균에 비해, 도텐의 사상은 더 깊고 넓으며 웅장했다.
도텐은 1870년 구마모토 현의 명문가 자제로 태어난 인물로, 도쿄전문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으나 자유민권사상에 심취했고, 중국혁명에 관여했던 형 야조의 영향으로 1891년부터 중국의 지식인들과 교류를 시작한다. 당시 일본에는 중국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여러 시도들이 만개했는데, 도텐은 이런 탈중화주의 혹은 ‘탈아론’의 사상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아시아주의자였다.
그는 1897년 쑨원을 만난 이후 그의 혁명운동을 돕기 시작한다. 하지만 도텐과 쑨원의 혁명운동은 고난과 역경의 길이었고, 쑨원의 혁명운동은 난항을 거듭했다. 도텐은 일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혁명론에 대한 책 <33년의 꿈>을 저술했는데, 이 책의 서문에는 도텐이 꿈꾸던 세상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나는 인류동포의 의를 믿는다. 때문에 약육강식의 현실을 싫어한다. 나는 세계일가의 설을 신봉한다. 때문에 현재의 국가적 경쟁을 증오한다.”
이 책은 중국어로 번역 출간되어 널리 읽혔고, 그 덕분에 중국에서 쑨원의 이름 역시 널리 알려져 1911년 신해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신해혁명으로 중국은 군왕 중심 정치체제를 무너뜨리고 최초의 공화국을 성립할 수 있었다. 1922년 도텐이 세상을 떠나자, 상하이에서 그의 추도식이 열렸고, 쑨원은 이 자리에서 ‘도텐이 없었으면 신해혁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경찰력과 군사력만 갖춘 ‘야만적 문명국’일 뿐 아시아를 이끌 힘은 없다”고 생각했던 미야자키 도텐이야말로 진정한 아시아주의였다. 난징 중국근대사박물관에는 쑨원과 나란히 걷는 도텐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세기에 태어나 서양의 침탈 속에 자라난 한/중/일의 혁명가들은, 이미 20세기초에 세계주의자의 정체성을 품고 있었다. 김옥균, 미야자키 도텐, 쑨원의 이야기는 국제적 감각을 지닌 대통령 후보가 단 한명도 없는 21세기의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린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김옥균, 일본과 조선의 근대화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위안 스카이의 통치를 겪으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바로 이 혼란한 시기가 되어서야, 중국 지식인들은 중국의 개혁을 위해 새로운 문화와 사상이 필요하다는 절박함을 느꼈고, 천두슈와 후스를 위시한 당대의 지식인들은 신문화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신문화운동은 기존의 유교적 가치체계를 철저히 부정하고 공격했으며, 그 대안으로 ‘과학’과 ‘민주’를 내세웠다. 그리고 잡지 <신청년>을 주축으로 확산되어나간 신문화운동은 1919년 조선의 3.1운동을 계기로 5.4운동으로 폭발한다. 늦었지만 중국에서도 과학이 유교를 대체해야 한다는 사상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김옥균에서 도텐과 쑨원을 넘어 신해혁명과 5.4운동으로 이어지는 아시아의 근대화과정 속에서 우리가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근대화의 성공조건은 ‘과학기술의 성공적인 안착’이었다. 과학기술이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에 미친 영향은 피상적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서구열강의 힘을 ‘과학’과 ‘민주’에서 정확히 꿰뚫어보았던 중국의 지식인들은 너무 늦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알아차렸고, 이후 중국이 다시 과학기술을 통해 부국강병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수십년이 필요했다.
조선 또한 일본에 의해 합병되고 식민지가 되고 나서야, 지식인들에 의해 과학기술을 통한 자강의식이 생겨났다. 결국, 서구열강의 가장 강력한 힘의 원천인 과학기술을 운좋게 빨리 습득해 아시아를 넘어 서양과 같은 지위에 오른 나라는 일본 뿐이었다. 그리고 일본에 과학기술을 통한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사상가의 이름이 바로 지금까지도 일본 만엔권에 얼굴이 각인되어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다.
후쿠자와 유치키는 1835년에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김옥균(1851-1894)보다는 16살 위였고, 김옥균의 스승이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개화파 시조 박규수(1807-1877)보다는 28살이 어렸다. 그는 1858년 에도에 네덜란드 어학교인 난학숙을 열었고, 1860년부터 견외사절로 해외를 경험하며 개화사상을 키우다, 1868년 훗날 게이오대학이 되는 게이오의숙을 만들고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정치사상가로 살다 죽었다.
후쿠자와는 <학문의 권유>의 첫 문장에 그가 쓴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라는 말로 유명하고, 일본이 열강이 되기 위해서는 아시아를 넘어서야 한다는 ‘탈아론’을 주창해 제국주의의 확산에 기여했다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혼란스러운 시기를 살던 사상가였던 만큼,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며, 그의 사상 또한 복잡하다. 말년에 후쿠자와는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한 덕에 ‘일본 최초의 페미니스트’로도 불리기도 한다. 그는 흔히 ‘일본이 가지 않은 길’을 주장했던 자유사상가로 여겨진다.
후쿠자와는 조선 개화파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옥균,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 모두와 교류했으며, 실제로 갑신정변에 관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후쿠자와가 개화파에게 영향을 미친 것처럼, 개화파 역시 후쿠자와의 사상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사실 1870년 이전에 후쿠자와는 조선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계몽사상가로서 그의 관심사는 대부분 구미를 향해 있었다. 그는 서구문명에 비해 아시아는 야만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파악했으며, 따라서 일본의 독립을 위한 문명화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사고 속에서 조선은 일본 독립과 별다른 관계가 없었다. 후쿠자와에게 조선은 ‘작은 중국’이었을 뿐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1880년 김옥균과 박영효의 명으로 일본에 밀항했던 개화승 이동인을 만나며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동인으로부터 박규수 학파와 조선 개화당의 이야기를 들은 후쿠자와는 자신이 1860년대 혼자 유럽으로 떠났던 시기를 회고하며, 유길준을 게이오의숙에 제자로 받아들인다. 유길준이 이후 후키자와의 <서양사정>을 모방해 <서유견문>을 썼다는건 잘 알려진 일이다.
조선 개화파에게서 30년전 자신의 모습을 본 후키자와는 이후 적극적으로 조선문제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한다. 1881년 발표한 <시사소언>에서 후쿠자와는 “일본이 문명화된다 해도 이웃의 중국과 조선이 그렇지 못하면 일본은 서양 각국에 대해 독립을 지킬 수 없으므로,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중국과 조선을 문명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조선개조론’이 시작된 것이다.
김옥균은 바로 이 시기에 후쿠자와를 만났다. 둘은 조선의 개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보이며, 후쿠자와가 임오군란 이후 일본정부의 조선파병을 주장한 것도 김옥균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김옥균은 일본군과 귀국했고, 이후 박영효 수신사의 방문 이후 자신의 제자들인 우시바 다쿠조, 다카하시 마사노부,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파견해 박영효가 한성순보를 창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때부터 후쿠자와는 조선에 일본의 자본을 투입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조선을 문명화시켜 일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갑신정변에 깊이 관여했던 그가 갑신정변의 실패이후 ‘탈아론’을 발표한 이유는 조선 개화파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걸 증명하려던 그의 계획이 실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패배선언으로 봐야한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1885년 일본의 <시사신보>에 쓴 <탈아론>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후쿠자와는 조선과 청나라를 나쁜 친구로 규정하고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아직 20세기의 해가 뜨지도 않았던 19세기말, 조선과 일본 그리고 청나라의 지식인들은 서구열강의 침탈 속에서 각자 치열하게 사상적 전회를 맞이하고 있었고, 또한 긴밀하게 교류하며 연대하고 있었다.
21세기 한국에서 한국의 미래를 고민하는 지식인들이 얼마나 이들처럼 국제적 감각을 지니고 치열하게 세계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화가 진행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는 19세기의 그들보다 좁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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