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재앙인가, 축복인가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서’] 가족의 갈등, 영화는 쉽게 화해로 끝나지만 실제도 그런가...오죽하면 ‘유사가족’이 탄생할까
대권주자들의 가족 문제가 끊임없이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가족 관계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가족은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다.”
일본의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기타노 다케시의 말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자신의 아버지가 페인트공이었고 술을 마시면 늘 어머니에게 손찌검했다고 스스로 밝혔기 때문에 화목하고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다는 것이 짐작되지만, 유명해진 이 문장은 단 한 줄밖에 없고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각자의 몫일 것 같다.
그냥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다’라고만 했다면 그 의미는 딱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문이 상상을 자극한다. 가족 간의 관계를 형식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것은 남의 눈을 의식해서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족이라는 환상의 신화다. 가족이란 희생을 감수하면서 서로 사랑해야 하고 서로 돌봐야 하는 관계라는 환상이다.
가족 영화는 가족 간의 갈등을 바탕으로 서사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대부분은 용서와 화해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런 결말은 늘 개운치가 않다. 가족 간의 갈등이 그렇게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였나. 가족 간의 갈등은 그 뿌리가 깊기 때문에 해소도 쉽지 않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되고 다져져 왔기 때문에 문제가 일시적으로 해결됐다 하더라도 재발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인 가정은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가치관과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에 대한 학습이 시작되는 곳이다. 좋은 관계가 형성된 가족이라면,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힘을 받는 든든한 지지자원이 되겠지만 그 반대일 경우 트라우마의 원천이 되어 사사건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원수가 될 수 있다.
가족영화 거장,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동경이야기’
가족 영화에 대해 언급하자면,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오즈 야스지로가 남긴 많은 영화는 모두 가족 영화다. 가족이 겪는 일들이라는 게 대부분 대동소이한 것처럼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서사적 틀과 카메라의 시점은 대개 비슷하다.
오즈 감독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영화가 <동경이야기>인데 1952년에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가족 서사는 현대 사회의 가족 서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야마다 요지’ 감독에 의해 <동경가족>이라는 제목으로 2013년에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매달리지만 스스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늙은 부모가 곁에 있어서 자신의 생활이 방해받는 것을 꺼리고 부담스러워한다. 이런 현상은 순환하는 인간사의 일부분이고 <동경 이야기>는 그런 주제를 다루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가족의 일상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즈 야스지로와 비슷하다. 그러나 히로카즈의 가족 영화는 오즈의 영화와는 느낌이 다르다. 히로카즈의 가족 서사에는 오즈에게는 없는 신랄함이 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신세 한탄이나 분노 없이 자연스러운 인간사로 받아들이는 오즈 서사의 부모 자식과는 달리, 히로카즈의 영화에는 고요하게 흐르지만, 그 밑에는 심장을 에일 듯 차가운 냉기가 숨어 있다.
오즈 감독의 <동경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자식들의 일정 때문에 머물 곳이 없어지자, 웃으면서 아내를 보며 “드디어 잘 곳이 없어졌구먼”이라고 말하고 아내도 “그러게요”라고 웃으면서 응대한다. 그리고 의사가 된 큰 아들이 모처럼 동경에 마실 온 자신과 아내를 기대 이하로 소홀히 대하는데도 덤덤하게 “큰 애도 변할 줄은 몰랐어”라고 말한다. 역시 허탈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히로카즈 감독, 억지로 ‘가족’ 유지하는 모습에 냉소를
반면, 히로카즈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지만 마음속에는 큰 아들을 잃은 분노가 있다. 가장 기대했던 큰아들은 바다에서 다른 사람을 구조한 뒤 사망했고 덕분에 목숨을 구했던 사람은 매년 큰 아들 기일 때 찾아온다. 그가 죄인처럼 안절부절 못하다가 돌아가면, 아버지는 “저런 하찮은 놈 때문에 우리 큰 애가 목숨을 잃다니”라고 분노한다. 게다가 앞에서는 친절하게 굴던 어머니도 비장한 표정으로 “매년 오게 할 거야. 그 정도 고통은 감수해야지”라고 말한다. 또한 아버지의 말에서 여러모로 큰아들에 미치지 못하는 둘째 아들에 대한 실망감이 나타나고, 어머니는 한때 바람을 피운 남편에 대한 분노를 매우 냉소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젊은 시절에 큰 애를 업고 바람피우는 남편을 찾아 여자의 집까지 갔을 때 방안에서 들리던 노래의 가사가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걸어도 걸어도”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는 그 노래를 잊을 수 없다. 어머니는 남편과 아들 부부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 노래를 틀어놓고 곡에 맞춰 고개를 까닥거린다. 그것이 자신에게 상처를 남긴 남편에 대한 복수의 방식이다. 히로카즈의 가족 영화에서 이른바 피해자들은 상대방을 직접 힐난하거나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들의 체념은 자신의 살을 파고들 정도로 깊고, 주인공들은 그런 자기 학대를 묵묵히 견디어 내면서 표면적으로는 가족이라는 범주를 지켜낸다. 감정의 폭발적인 노출로 발생하는 감정의 정화보다는 가족이라는 껍질을 깨뜨리지 않고 유지하는 쪽을 택한다.
현대에서 혈연보다 더 중요한 ‘가족의 탄생’은
현대로 오면서 피가 섞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가족의 개념은 바뀌고 있다. 가족의 형태에 나타난 변화의 조짐은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에서부터 감지된다. <가족의 탄생>은 엄밀히 말하자면 새로운 형태의 가족 탄생을 의미한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한 집에 모이게 된 사람들의 출발점은 비록 원치 않은 데서 시작됐지만, 함께 밥을 먹고 살면서 같은 정서를 공유하게 되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족이 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정되는 혈연관계 대신 생활공간 공유와 심리적 안정을 근거로 가족의 개념을 규정하고 싶은 현대인의 갈망이 반영됐다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결정됐다는 이유만으로 희생과 인내를 강요하는 가족보다는, 자신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선택하고 싶다는 의미다.
혼자 살기는 외롭고, 폭력적인 가족 신화는 피하고 싶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유사 가족’이다. 싱글들이 모여 사는 공동 주거 형태가 그런 것이다.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식사를 나눠서 준비하고 함께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 심리적인 위안을 받고 싶은 것이다.
실리적인 목적을 지향하고 있지만 어떤 형태가 됐든 공동체란 약간의 희생과 양보를 필요로 한다. 모든 것을 공평하게 똑같이 나누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곳에는 늘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함께 사는 신개념 가족 역시 언제든지 갈등을 발생시킬 소지는 있다. 그러나 혈연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적인 압박이나 배신감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축복은 없고 인내만 강요하는 가족 신화라면, 그 역시 깨뜨려져야 하는 두꺼운 알이 아닐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