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만난 ‘아름다운 동화’같은 영화

[이화정의 부산국제영화제 돌아보며]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의 ‘ ’ 스칼렛 아버지와 딸, 죽은 아내 ‘가족의 사랑’

영화 '스칼렛'의 스틸컷. 사진=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 '스칼렛'의 스틸컷. 사진=부산국제영화제 제공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영화들은 새로운 형식의 연출로 신선함을 주었고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적인 서사나 연출방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영화에는 늘 옛것과 새것이 교차한다. 색다른 방식이 파격적으로 튀어나온다기보다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처럼 앞선 감독들의 연출로부터 영향을 받고 조금씩 변주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나아간다.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줄 운명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여성의 이야기 역시 사라지지 않고 변주된다. 시대가 바뀌면서 같은 서사속 여성 캐릭터가 수동적인 태도에서 능동적으로 바뀌게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익숙함 속에서 발견하는 새로움은 관객에게 안정감과 신선함을 함께 선사한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지극 사랑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초청작인 <스칼렛>은 그런 고전적인 서사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를 감독한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마틴 에덴>이라는 영화로 주목을 받은 이탈리아 감독이다. <마틴 에덴>은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돼 최고의 영화라는 찬사를 받았던 영화다. <마틴 에덴>이 잭 런던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했듯이 <스칼렛>도 알렉산드르 그린의 러시아 꽁트, ‘스칼렛 세일즈’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마르첼로 감독은 이 꽁트를 읽고서 영화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스텝 배우들과 의논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원작에서처럼 백마 탄 남성을 기다리는 여성이 아닌 좀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상으로 변형됐다.

마르첼로 감독은 아버지와 딸의 끈끈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독은 실제 딸의 이름도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인 줄리에트라고 밝혔다. 그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 줄리엣 캐릭터를 맡은 배우의 실제 이름 역시 줄리에트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중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페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왼쪽)과 여주인공 줄리엣 주앙. 사진=이화정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중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페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왼쪽)과 여주인공 줄리엣 주앙. 사진=이화정

시대적 배경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이며, 주인공의 아버지 라파엘(배우의 실제 이름도 라파엘이다)이 다리를 절뚝이면서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에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영향을 주는 여성이 있다. 라파엘의 죽은 부인인 마리인데 라파엘의 그림자 같은 존재다. 피폐한 모습을 하고 돌아온 라파엘은 ‘1888년에 태어나 1918년에 사망했음’을 알려주는 마리의 비석 앞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라파엘은 솜씨가 뛰어난 목수다. 그의 손을 거치면 어떤 목재도 훌륭한 작품이 된다. 그는 일터에서 가져온 자투리 나무토막을 다듬어서 딸 줄리엣을 위해 배나 비행기 모양을 한 귀여운 장난감을 만든다. 그의 솜씨를 알아본 장난감 가게에서 그가 만든 장난감을 구매할 정도다. 오래된 나뭇등걸처럼 투박한 손으로 만들어졌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장난감은 아기자기하고 섬세하다.

영화는 마법의 성에서나 나올 법한 장난감들과 줄리엣이 호수에 몸을 담그고 노래하는 장면을 통해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감독은 원작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장면들을 연출했다. 아버지 라파엘과 딸 줄리엣은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지만 서로 사랑하기에 외롭지 않다. 라파엘에게 삶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딸인 줄리엣에게서 나온다면 줄리엣에게는 또 다른 힘이 있다. 바로 마법 같은 믿음과 환상이다.

집주인인 아델린 부인과 마을의 마법사는 마법의 힘이 줄리엣을 지켜주고 있음을 믿는다. 아델린 부인은 주문을 외우면서 죽은 마리 부인이 늘 남편과 줄리엣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하고, 마법사는 어느 날 하늘에서 주홍색 돛을 단 배를 탄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데려갈 것이라고 예언한다. 라파엘의 마음속에는 늘 죽은 아내인 마리가 자리 잡고 있으며 못다이룬 사랑은 부인을 닮은 딸에게로 그대로 옮겨간다.

하지만 라파엘은 딸을 자신의 곁에 두는 대신에 넓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싶어한다. 줄리엣이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했을 때, 마법사의 말처럼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영화 포스터는 나무에 기대앉아 사랑스런 눈길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줄리엣의 모습을 보여준다.

<스칼렛>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줄리엣이 운명의 남자를 만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영화라기보다는 부녀간의 사랑이 중심 서사다. 스칼렛이 만난 사랑은 그녀가 성장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사건일 뿐이다. 한 인간은 가족의 품 안에서 자라나 사랑의 대상을 외부에서 찾고 자신의 진정한 삶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후반부에서 줄리엣이 독립적으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줄리엣이 진정한 사랑을 찾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줄리엣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여성이며 자신을 구해줄 왕자를 찾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줄리엣이 아버지의 손재주를 물려받아 바이올린 제작 기술을 배우는 모습도 나온다.

마르첼로 감독은 줄리엣 배역을 위해 수많은 후보자들을 보았는데 그 중에서 딱 맞는 이미지를 가진 배우를 찾아냈다고 했다. 그는 이상과 현실을 계속 오가는 영화들이 많고 이 영화 역시 원작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몽환적으로 그리려고 했다고 설명한다. 전작 <마틴 에덴>에서도 마틴을 작가로 성장시킨 강력한 계기는 한 여자에 대한 갈망이었다. <스칼렛>에서 라파엘은 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죽은 아내와의 사랑을 완성하고 숨을 거둔다.

먼저 떠난 아내를 닮은 조각상

라파엘이 택한 사랑의 완성 방식 역시 상징적이며 로맨틱하다. 그는 자신의 손재주를 최대한 발휘해서 뱃머리에 다는 조각상(선수상)을 만든다. 선수상 제작 요청을 받은 그의 얼굴은 마치 마법에 휩싸인 듯,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빛난다. 선수상은 아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내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세상을 마감했지만 아내의 얼굴은 넓은 바다를 마음대로 누빌 것이다. 어쩌면 마법사의 예언은 줄리엣이 아닌 라파엘의 아내에게 이뤄진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애에서 비롯된 마법 같은 이야기는 극적 반전 같은 자극도, 특별할 것도 없는 클리셰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좋아하는 서사다. 영화 <작은 아씨들>이나 <비밀의 화원>이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해서 리메이크되고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면 냉소로 가득찬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사람들은 마음 한구석에 따듯한 가족애와 인간애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영화 '스칼렛'의 주역들. 왼쪽부터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 딸 역을 맡은 줄리엣 주앙, 아버지 역을 맡은 라파엘 티에리. 사진=이화정
영화 ‘스칼렛’의 주역들. 왼쪽부터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 딸 역을 맡은 줄리엣 주앙, 아버지 역을 맡은 라파엘 티에리. 사진=이화정

마르첼로 감독은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듯, 시대가 바뀐다고 해도 전통의 뿌리, 가족이라는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빠가 딸에게 행복과 세상에 대한 꿈을 전달해주고 싶은 마음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마찬가지라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소위 ‘기적이라는 것은 당신의 손으로 이뤄낼 수 있다’라는 자막이 먼저 깔린다. 원작에서 인용한 이 문구를 넣은 이유를, 영화가 끝난 후에 생각하게 된다.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은 결코 거대하거나, 먼 곳에 있지 않음을 줄리엣과 라파엘이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 옆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알려주고 싶은 의도가 아니었을까.

글쓴이

이화정 영화심리상담사

영화심리상담사인 이화정은 영상번역작가로 일하면서 약 700편의 영화와 TV시리즈, 다큐멘터리를 번역했다. 그 후 영화이론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통합예술치료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예술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탐구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현재 영화와 심리에 관한 방송, <꿈꾸는 씨네 카페>를 진행 중이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