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야 할 경계를 일깨우는 영화들

[이화정의 ‘영화의 한가운데에서’] 시리아 난민과 주민 갈등 다룬 英영화 ‘신부납치’ 악습 다룬 키르기스스탄 영화 “방관하는 자들 모두 죄인이다. 부당한 관습은 ‘자포자기’에 의해 유지되는 것”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의 올드 오크' 한 장면.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의 올드 오크' 한 장면.

한쪽은 죽음, 한쪽은 축제라니

부산영화제 기간 중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 소식이 지구촌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한쪽에서는 죽음을 코 앞에 두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축제의 마지막 순간을 즐기는 상황이 우리의 삶이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도 예년처럼 각국의 특성과 사회적 상황, 영화에 대한 고민들이 담긴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 중에서 특히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다양한 시각이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그리고 자신과 다른 처지에 있는 이들의 생각과 삶을 잠시나마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최적의 방법 또한 영화다.

영화는 평상시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수도 있었던 타인의 위치에 서게 만들고, 지구 어느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 말살 현장을 목격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소개하고 싶은 영화들이 많지만 그중에서 두 편을 선별해 보았다.

타인의 입장에 설 수만 있다면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영국의 켄 로치 감독 작품도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볼 수 있었다. 그의 최신작 <나의 올드 오크>는 몇 초만에 매진됐다. 항상 ‘열린 결말’로 마무리해왔던 켄 로치 감독의 기존 영화들과는 달리 <나의 올드 오크>는 ‘화합’이라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남긴 채 마무리된다. 자신의 이익과 인도주의적 차원의 갈등은 여전히 켄 로치 감독이 추구하는 주제다.

이 영화의 배경은 영국의 북동쪽에 위치한 폐광촌이다. 40년 전에 폐광되어 경제활동이 둔화되고 활기를 잃은 이 마을에 영국 정부에서 허가한 시리아 난민들이 집단 이주하면서 남은 주민들과 갈등이 시작된다.

술집 ‘올드 오크’는 주인공인 티제이가 운영하는 술집인데 한 때는 번성했지만 이제는 몇 명 되지 않는 주민들만이 단골이다. 그들에게 시리아 난민은 오붓한 저녁 술자리를 방해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남은 고객들의 눈치를 보느라 티제이 역시 시리아 난민을 꺼린다. 그러나 한 여성 난민과 친분이 생기면서 그들을 돕기로 하고 오랫동안 묵혀뒀던 빈 공간에 복지센터 만들기를 허락하자, 반대로 오랜 친구였던 주민들과 관계가 살벌해진다. 복지센터 설치를 위해 술집을 드나드는 난민을 향해 주민들은 “네 나라로 꺼지라”고 소리를 지르고 난민은 “우리도 가고 싶어요”라고 맞선다.

주인공 티제이는 낡은 방을 개조해서 복지센터를 만들고 구호단체를 통해 식자재를 무료로 공급받아 훌륭한 음식을 무료로 제공한다. 정말 무료냐는 말을 반복하며 행복한 표정으로 식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생겨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된다. 사고로만 생각했는데, 실은 믿고 맡겼던 친구가 일부러 허술하게 수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자리가 거의 없고 정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박탈감을 느끼는 폐광촌 주민들의 쓸쓸한 삶, 전쟁과 인권탄압을 피해 타국으로 올 수밖에 없는 난민들의 모습을 비교해서 보여주면서 양쪽 모두의 입장에서 상황을 관찰하게 만든다.

명쾌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의 심정을 그대로 전달하고 마무리하던 켄 로치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나의 올드 오크>는 타인의 입장에 조금만 공감해도 감정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면서 끝이 난다.

‘신부납치’를 강력히 주장한 집안 여자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지석상’을 수상한 미를란 압디칼리코프 감독의 키르기스스탄 영화 <신부납치>는 가장 충격적인 영화였다. 지석상은 고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기리며 만든 상이다. 이 영화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실제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제목 그대로 젊은 여성을 납치해 강제로 결혼시키는 풍습이다.

마을에 사는 한 남성은 인물이 나쁘지 않은데도 아직 미혼이다. 실은 그가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성이 있는데 딸이 있는 이혼녀다. 둘은 원래 사귀던 사이였지만, 여성이 납치를 당해 다른 남성과 강제 결혼을 한 뒤 이혼했음을 여성의 대사를 통해 알려준다. “내가 신부납치만 당하지 않았더라도 너랑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라는 여성의 말에 남성은 차가운 얼굴로 돌아선다. 사랑하는 여자를 억울하게 뺏겼으니 이 남성도 피해자인 셈이다. 그런데도 문제는 이 남성이 ‘신부납치’라는 관습의 부당함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는 관습이 얼마나 끔찍한 악행인지 절감할 수 있게 한다. 남성의 가족은 이 남자가 이혼녀와 결혼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고 가족회의를 열고서 관습에 따라 쓸만한 신부를 납치해오자고 계획한다. 그런 뒤에, 간호조무사로 일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무트를 강제로 차에 태워 납치한다.

이 영화에서 절정은 납치된 여성 우무트와 남자쪽 집안 여성들의 몸싸움 장면이다. 우무트가 울부짖으며 온몸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카메라는 길게 포착한다. 영화는 한 인간에 대한 집단적 유린이 ‘전통’이라는 모호한 이름 하에 잔인하게 이뤄지는 모습을 오래 지켜보게 한다.

그들은 “우리 모두 그렇게 시집왔어. 그렇게 살다 보면 정이 드는 거야. 이렇게 반항하면 네 부모를 욕되게 하는 거야”라면서 여성을 진정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당사자인 남성을 들여보내 억지로 첫날밤을 치르게 한다. 말 그대로 강간이다. 그런 다음 우무트의 집으로 찾아가서 결혼을 제안한다. 대부분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결혼한다. 우무트는 가까스로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오지만 결혼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집을 떠날 결심을 한다. 우무트는 경찰서로 가서 신고를 하고 짐을 꾸려 집을 떠난다. 힘들지만 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작 중 가장 충격적인 영화였던 '신부납치'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아직도 자행되는 악습을 다뤘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작 중 가장 충격적인 영화였던 ‘신부납치’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아직도 자행되는 악습을 다뤘다.

변화와 희망이 생기지 않는 이유

영화는 악습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는 이유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신부납치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쪽은 이 집안의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피해자’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가해자’로 위치를 바꾼다. 이미 체제에 익숙해진 사람은 현실의 부당함도, 변화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여자가 들어와야 자신들의 생활이 더 편해진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생각뿐이다.

신부납치로 연인을 뺏겼던 남성도 마찬가지다. 본인의 의지도, 도덕성도, 판단력도 없는 이 남성은 가장 강력한 가해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남자의 집안에서 유일하게 신부납치에 반대했던 사람은 이 집안의 어르신이었다. 신부납치로 이 집안에 시집온 여성들의 비명을 들어왔기에 반대를 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밀지는 못한다. 방관하는 자들 모두 죄인이다. 부당한 관습을 유지하게 하는 힘은 변화의 가능성조차 스스로 묻어버리는 ‘자포자기’에서 나온다. 신고서를 접수한 경찰이 집을 찾아왔을 때야 비로소 그들은 뭔가 잘못됐음을 짐작한다.

이 영화는 현재 키르기스스탄에서 실제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신부납치’라는 악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납치된 여성들은 대부분 신고를 하지 않거나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사건이 종결된다고 한다.

글쓴이

이화정 영화심리상담사

영화심리상담사인 이화정은 영상번역작가로 일하면서 약 700편의 영화와 TV시리즈, 다큐멘터리를 번역했다. 그 후 영화이론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통합예술치료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예술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탐구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현재 영화와 심리에 관한 방송, <꿈꾸는 씨네 카페>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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