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죽었지만 잘 지낸단다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서’] 영화 ‘로스트 도터’, 엄마의 양면적 감정 자식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성 신화’ 양육중 죄책감, 절망감으로 괴로워하기도
엄마가 되는 순간, 끝난 내 인생
“내가 만든 생명체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이렇게 해서 25세에 내 인생은 끝났다. 아이들 아빠는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무릇 자식이란 모든 불안의 근원이다.”-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 중에서
한때는 한 몸이었다가 분리된 두 생명체의 관계는 태생적으로 순탄하지 않을 가능성을 안고 있다. 분리된 후에도 밀착도가 크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체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을 기쁨과 보람이지만, 기쁨은 늘 실망과 쌍을 이룬다. 기쁨이 큰 만큼 실망도 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엄마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미리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두에게 엄마의 경험은 처음이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엄격히 말하자면 엄마 되기를 배워가는 과정이라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 밖에 없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생활을 희생하는 엄마는 미디어에서 무리 없이 공감과 감동을 주는 캐릭터다. 우리는 모성이라는 ‘환상’에 길들여져 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에 반기를 드는 영화가 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로스트 도터>는 엄마에 대한 기대를 깨뜨린다. 매기 질렌한 감독의 <로스트 도터>의 원작은 이탈리아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이다. <로스트 도터>에서 주인공 레다(올리비아 콜맨 분)는 대학교수인데, 그리스에서 휴가를 보내며 자신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태도는 품위 있고, 지적이며, 절제되어 있지만 우울하고 불안정하기도 하다. 그녀가 지닌 불안의 요소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추적하는 과정을 서사로 삼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확실한 원인을 완전히 노출하지 않은 채로 끝난다. 엄마로서 자식에게 갖는 감정의 모호함을 묘사한 것이다.
엄마한테서 원인을 찾는 아이들
해변에서 햇볕을 받으며 책을 읽고 있던 레다에게 두 명의 여성이 눈에 들어온다. 한 여성은 임신을 했고 다른 여성은 엘레나라는 이름의 어린 딸과 함께 있다. 엘레나는 레다의 상처를 열어젖히는 역할을 한다. 인형을 가지고 노는 여자아이를 지켜보는 레다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젊은 엄마와 딸을 보면서 레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영화는 레다가 자신의 딸들과 함께 했던 과거의 장면을 교차편집하면서 레다의 심정을 짐작하게 만든다.
공부와 육아를 병행하면서 지칠 대로 지친 레다는 아이들을 심하게 대하기도 했다. 아이들의 요구는 끊임이 없고, 아이들은 수시로 상실감과 결핍을 느낀다. 엄마가 ‘나’라는 개체의 발생지라는 이유로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의 근원을 엄마에게서 찾으려는 태도를 보일 때가 있다.
아이들이 자신의 결핍을 깨닫는 순간이 오면 엄마에게 왜 자신을 이렇게 낳았느냐고 원망한다. 왜 더 예쁘고, 더 똑똑하고, 더 사랑받을 만한 매력적인 인물로 태어나게 해주지 않았냐고 묻는다. 레다는 딸에게서 그런 투정을 받고 난감해한다.
엄마라는 단어는 블랙홀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아이는 엄마가 모든 것을 다 받아주기를 기대하지만 그런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음을 실감하는 날이 온다. 자신이 엄마가 됐을 때다. 그때야 비로소 왜 자신의 엄마가 과거에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짐작이 된다. 엄마라는 존재 역시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한 지 깨닫게 된다.
레다는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자신도 아이들에게 상처를 줬다. 그리고 그 상처는 성인이 되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엄마라는 절대적인 대상을 향한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기대를 포기하기란 힘들다. 엄마와 자식은 분리됐고 탯줄은 끊어진 지 오래지만 마음의 탯줄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좋은 엄마였나”와 “나의 욕망은”
엄마로서 레다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다고 죄책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다 자란 후에도 자아는 ‘나는 좋은 엄마였나’에 대해 반추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그렇다면 나의 욕망은?’이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자아와 부딪힌다.
레다는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한다. 분노와 즐거움, 후회가 뒤범벅되어 레다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레다의 혼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물이 엘레나의 인형이다. 레다는 해변에 있는 엘레나의 인형을 집으로 가져온다. 엘레나가 잃어버린 인형 때문에 발작을 하고 열이 오르는데도 레다는 되돌려주지 않고 자신의 집에 보관한다. 그리고 수시로 꺼내 보고 입을 맞추고 매만진다.
레다는 주변의 시선이나 상황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사람이 아니다. 해변에서 다른 가족들이 함께 있고 싶으니 레다의 자리를 옆으로 옮겨달라고 얘기했을 때, 레다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냥 이 자리에 있고 싶다고 꿋꿋하게 말한다. 영화관에서 불량스런 청년들이 영화관람을 방해하며 제멋대로 구는데, 레다는 참을 수가 없어서 소리를 지른다. 다른 관객은 오히려 그런 레다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레다가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래서 레다는 숨 막히는 엄마 역할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위해 아이들을 떠났다. 하지만 3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 자신의 발전을 향한 강렬한 욕망을 포기할 수 없었고, 끊임없이 관심을 요구하는 아이들 옆에서는 폭발할 것만 같아서 떠났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딜레마를 레다는 보여준다.
레다는 아직 엄마 역할이 뭔지 파악하지 못한 임신한 여성에게 까칠하게 대하고, 인형을 잃어버려 칭얼대는 아이에게 지친 엘레나의 엄마가 “(이 고통이) 지나가긴 하는 거죠?”라고 묻자,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모성 신화’는 없다면서도
레다는 엘레나가 인형을 잃어버려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형을 되돌려주지 않고 시간을 끈다. 영화는 레다가 왜 인형을 돌려주지 않는지 이유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레다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놓쳤던 애정이 그 인형 안에 담겨 있는 것처럼 인형을 안고 돌본다. 그런 레다의 모습은 유년 시절로 퇴화한 것처럼 보인다. 인형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고 행복해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충분히 주지 못했던 모성,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포기했던 모성을 인형에게 발휘하는 듯하다.
현재의 레다는 성인이 된 두 딸들과 다정하게 통화하며 순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육아 시절에 자신이 아이들에게 함부로 대했던 기억, 그리고 자신이 아이들을 떠났던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레다는 엄마로서 자신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이 영화는 모성 신화에 반기를 들면서도 엄마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또한 보여준다. 엄마라는 위치의 양가성을 이토록 잘 보여준 영화가 또 있었던가 싶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로부터 도망쳤던 과거를 후회하는 레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그렇지 않다. 어느 쪽을 택해도 행복할 수 만은 없는 엄마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희생을 택하는 엄마의 삶은 더 큰 문제라는 대답도 냉소적으로 던지고 있다. 아이들은 성장하고 언젠가는 자신의 삶을 선택해서 떠나간다. 레다는 이제는 성장한 딸들로부터 과거의 자신을 이해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3년간 왜 자신이 떠났는지 설명하는 편지를 썼지만, 각자 자신의 삶을 살기에 바쁜 딸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레다가 어린 딸들과 과일 껍질로 뱀을 만들면서 정서를 공유할 때 행복했던 과거의 모습이 몇 차례 삽입된다. 레다가 기억하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하지만 그 순간은 영원할 수 없다. 그래서 엄마인 레다는 슬프지만 행복하고, 행복하지만 슬프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는 대사가 소설에는 나온다. “연락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다”며, 안부를 묻는 딸과 통화하면서 내뱉는 레다의 마지막 대사는 “엄마는 죽었지만 잘 지낸다”이다. 이 역시 엄마라는 위치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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