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亡國), 그리고 좌절된 과학기술의 근대화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⑦조선과 일본, 과학기술을 대하는 세계관 차이

일본은 1871년 독일의 근대화를 배우기 위헤 100명 넘는 규모로 사절단을 구성해 떠나보냈다. 이름하여 이와쿠라 사절단이다.
일본은 1871년 독일의 근대화를 배우기 위헤 100명 넘는 규모로 사절단을 구성해 떠나보냈다. 이름하여 이와쿠라 사절단이다.

”이 시기 조선의 서양에 대한 관심은 서구의 발전한 문화를 물질의 발달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의 과학 기술에 대한 인식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적 태도와 연결되었다…동도서기론적 태도를 견지하며 그들이 추진한 개화정책의 목표는 자강이며, 문명국가로 서구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이었다. 즉 자강은 다른 나라와 동등한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강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지향했던 사회는 대동사상에 입각한 이상적인 국제사회였다. 국제사회가 약육강식의 사회임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매우 이상적인 것, 도덕적인 것인 것에 기대었다는 점에서 그 인식은 불철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즉 개화지식인들은 ‘개화’ 즉 새로운 지식의 수용과 습득이 시대의 현안을 해결하는 대안이라 강조하였지만 전근대의 학문적 전통에 토대를 두고 근대를 바라게 하였기 때문이다”-김수자⁠

김옥균과 후쿠자와 유키치-과학기술로 바라본 세계

19세기 중후반 동아시아 3국이 서양열강에 의해 강요된 근대화의 시대를 항해하고 있을 무렵, 각 국의 운명을 결정할 개화된 지식인들은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실천이 동도서기(東道西器)로 나타나건, 중체서용(中體西用)으로 나타나건, 서양열강의 존재는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국가존립의 위협이었다. 서구열강의 힘은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고, 각 국에서 이를 누구보다 먼저 인지하고 민중과 국가의 자립과 독립을 위해 근대화를 이루어내야 하는 책임은, 개화기 지식인들에게 있었다.

우리가 이미 역사를 통해 그 결과를 인지하고 있듯이, 19세기 개항 이후 20세기 중반까지의 역사에서 동아시아 3국은 서구열강과의 불균형적인 관계 속에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고, 오직 일본만이 서구와의 경쟁에서 승리해 성공적인 근대화에 안착할 수 있었다. 중국은 통일이 되는 20세기 중반까지 괴뢰국과 군벌 세력의 난립 속에 복잡한 투쟁사가 이어졌고, 일본은 과학기술을 통한 근대화에 성공했으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군국주의의 길’을 걸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망했고, 1910년 한일병탄으로 길고 긴 식민지의 길에 들어선다.

누군가는 일본만 가능했던 근대화의 한계를 일본이 일으킨 여러 전쟁과 원자폭탄으로 상징되는 인류의 비극으로 규정지으려 할 것이다. ‘아시아 연대론’을 외친 일본의 지식인들도 존재했으나,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급격한 과학기술 근대화는 일본 또한 영토 확장을 통해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합류해야만 한다는 사상으로 발전해나간다.

과학기술, 국민적 동의를 얻는 ‘핵심가치’로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은 산업화의 물질적 기반을 제공해준 학문인 동시에, 계속되는 전쟁에서 국민적 동의를 얻어내는 핵심적 가치로 사용됐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바로 이런 시기에 일본의 근대화를 고민하던 지식인이었고, 당시 일본의 개화지식인 중 누구보다 철저하게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을 알아본 인물이었다.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일본 근대지식인 후쿠자와의 당대 세계인식을 이렇게 표현했다.

“서구 각국이 제국주의로 향해가던 이 시대에 후쿠자와와 구메 등이 본 것은, 과학이 기술에 직결되고 산업발전과 군사력 강화에 불가결한 요소가 될 뿐 아니라 국가가 과학기술의 진흥과 혁신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 점이었다. 세계 분할전이 본격화되기 직전의 서구 상황을 후쿠자와와 구메는 정확히 포착했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과학기술과 경제성장이 협력하며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근대사회에 휩쓸려가게 된다⁠”

후쿠자와와 김옥균은 이 시기 일본과 조선에서 서구열강으로부터의 독립과 함께 근대화를 고민했던 대표적인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이미 살펴보았듯이, 김옥균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저술과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망명 이후에도 저술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후쿠자와에게서는 명백하게 보이지만, 김옥균에게선 찾기 어려운 인식의 전환이 있다. 그게 바로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국가와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의 여부다.

후쿠자와는 자신의 사상적 전회를 ‘윤리학에서 물리학’으로 표현했고, 일본의 근대화에 자신의 사상이 투영될 수 있도록 제자를 기르고 정치적 자문을 수행했을 뿐 직접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다. 이런 후쿠자와의 사상 덕분에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는 과학기술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김옥균은 스스로 정치인의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었고, 망명 기간에도 끊임 없이 복권(復權)을 노린 인물이었다. 그런 김옥균에게서 후쿠자와와 비슷한 수준의, 과학기술을 통한 조선 근대화의 세계관을 볼 수 없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북촌 사랑방과 난학숙 - 소그룹의 혁명과 좌절

한일 근대사의 격동기에 각 국의 운명을 가른 요소들을 꼽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조선의 타락한 정치와 당쟁을 꼽을 수도, 농경 중심의 경제체제를 지녔던 조선의 한계를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었던 간에, 19세기 중반 두 국가의 운명은 서양열강이 보여준 새로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새로운 지식과 사상이 가장 먼저 수용되는 계층은 언제나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새로운 지식을 얼마나 잘 흡수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변화를 도모하는 지가 결국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핵심요소가 됐다.

조선은 일본에 비해 분명 열악한 상황에서 근대를 맞이했지만, 갑신정변을 시도할 만큼 충분히 근대화된 지식인 집단을 보유한 국가였다. 서양의 과학기술은 조용히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력은 북학파와 실학의 등장으로 또한 최한기나 이규경과 같은 서양 과학기술에 밝은 유학자들의 등장으로 나타나곤 했다. 이들 중에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도 있었다.

세계를 바꾼 과학소그룹들

과학사는 물론이고, 많은 학문과 혁명의 역사에는 세상을 바꾼 소그룹이 등장한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혁신적 아이디어들이 도대체 왜 주변부의 소그룹에 의해 탄생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과학기술학자 홍성욱은 1999년 ‘세상을 바꾼 소그룹과 세미나’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과학사를 통해 볼 수 있는, 역사를 바꾼 “위대한 세미나와 소그룹”이란 문제’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보통 학파(school)가 대학이나 연구기관과 같은 공식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반면에, 소그룹은 더 비공식적인(informal), 주로 ‘임무 중심적인(task-oriented; problem-solving)’ 모임”이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동네에서 취미로 모이는 독서모임부터 세상을 바꾸는 소그룹까지 다양한 종류의 소그룹이 존재한다. 과학사로만 주제를 좁혀도 양자역학의 기초를 만든 이론 대부분이 탄생한 ‘코펜하겐 그룹’이 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노버트 위너의 주관 하에 메이시 학회를 통해 모인 ‘사이버네틱스 그룹’이 있었다. 과학사는 이런 혁명적 소그룹으로 가득하다⁠.

17세기 로버트 보일과 로버트 훅이 주도했던 ‘보이지 않는 대학(invisible college)’은 베이컨적 실험과학의 추구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회원간의 서신교환과 정기적 회동을 이어갔으며, 훗날 연금술을 넘어 실험과학을 탄생시키며 영국왕립학회로 발전해나간다. 18세기 영국의 버밍엄에선 다윈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즈 다윈, 영국의 정치인이자 교육자 리처드 에지워스, 제조업자이자 엔지니어로 부유했던 매슈 볼턴과 그의 동료이자 증기기관을 만든 제임스 와트 등의 인물들이 달이 뜨는 밤에 모여 영국의 교육과 공학 및 산업 그리고 과학에 대해 미친 듯이 떠들었다. 우리는 이들을 ‘버밍엄의 만월회(lunar society)’라고 부른다.

이들은 당시 영국의 주류 지식인이 아닌 주변부에 속한 인물들이었지만 산업혁명을 거치며 최초의 엔지니어 그룹으로 재탄생한다. 토머스 헌트 모건의 ‘초파리방’도, 일리야 프리고진의 ‘브뤼셀 열역학 그룹’도, 인터넷을 건설한 ARPA의 엔지니어들과 전설적인 제록스팀도, 마지막으로 미국 MIT와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해커운동도 모두 주변부의 조용하고 열정적인 작은 모임으로 시작되어 작게는 한 분야의 학문을, 크게는 세상을 바꾼 혁신을 이끈 역사 속의 소그룹이다.

18세기 영국 버밍엄의 만월회. 산업혁명의 주역들과 과학자, 철학자, 발명가 등이 매달 모여 영국 계몽운동기의 변화를 이끌었다.
18세기 영국 버밍엄의 만월회. 산업혁명의 주역들과 과학자, 철학자, 발명가 등이 매달 모여 영국 계몽운동기의 변화를 이끌었다.

박규수의 사랑방과 요시다 쇼인의 촌숙

선우정은 ‘한일 근대사에서 자주 비교되는 두 공간’으로 박규수의 사랑방과 야마구치현 하기의 요시다 쇼인 촌숙을 꼽았다. 지금으로부터 150년전 바로 이 공간에서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바꾼 청년 진보적 그룹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진 인물로 현대 일본 우익정치의 원조로 숭상되기도 한다.

그는 흥선대원군보다 10년 늦은 1830년 조슈번에서 태어나, 23세에 미국 제독 매슈 패리의 흑선이 에도만에 들어오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최고의 양학자였던 스승 사쿠마 쇼잔의 가르침을 따라 미국에 유학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이후 그는 촌숙에서 열정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서양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조언을 정부에 자주 올렸고, 이후 29세의 나이에 막부에 의해 처형당한다. 불과 2년간 제자들을 가르쳤을 뿐이지만, 그 제자들 중에서 막부 타도 운동의 리더들이 등장했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시나가와 야지로 등의 메이지 정부 수상과 대신들이 배출됐다.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는, 일본 근대화의 운명을 가른 소그룹이었다.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을 가르친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을 가르친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실학의 계승자이면서 개화사상의 선구자였던 박규수의 사랑방에도 시대의 변화를 직감한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 가장 급진적이고 연장자였던 인물이 바로 김옥균이었고, 갑신정변의 주역 대부분도 바로 이 북촌 사랑방에 모인 소그룹이었다. 하지만 북촌 사랑방에 모인 이들 개화당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간다.

어쩌면 조선의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를 이들의 실패 이후, 조선은 망국의 길에 접어들었다.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조선의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조선의 마지막 진보적 소그룹의 실패로, 과학기술이 다시 한국 사회의 원동력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한 세대, 3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조선에서 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과학기술의 수용은 지체될 수 밖에 없었다.

글쓴이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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