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에서 김장해요”...단골 안봐주는 아랍상인

[신나리의 피라미드에서 아침을] 배추 사러 재래시장 ‘아랍쑥’ 방문해보니 ‘단골은 언제든 올건데”...사진찍기 좋아하는 이들

단골이라 해도 물건 값 깎아줄 생각이 없는 채소가게 아저씨. 사진을 찍자하니 냉큼 달려나온다. 사진= 신나리
단골이라 해도 물건 값 깎아줄 생각이 없는 채소가게 아저씨. 사진을 찍자하니 냉큼 달려나온다. 사진= 신나리

배추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김치 담그러 가자!

이집트의 덥고 긴 여름이 지나갔다. 11월 중순에 1년에 5번 올까 말까 한 비가 갑자기 오더니 기온이 영상 20도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도 충분히 춥다. 여기도 겨울이 시작된 것이다.

이집트에서 5년째 살고 있는 이방인의 생존 룰로 봤을 때, 1년중 20도 이하로 떨어지는 기간은 길어야 세 달이다. 그래서 이곳 집들은 난방이 잘되지 않는다. 에어컨과 히터를 겸한 냉·난방기로 겨울을 보내는데, 온돌에 익숙한 한국인으로선 공기가 답답하고 건조해지는 이곳 난방기가 정말 사용하고 싶지 않은 시스템이다. 그렇다고 기온이 떨어지는데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고.

이곳에 겨울이 찾아오면 전기장판과 한 몸이 된 채 좀처럼 침대에서 나오지 싶지 않지만, 그래도 꼭 나와야 할 때가 있으니 바로 한국교민들의 김장 시즌이다. 한국에서는 시댁과 친정에서 담궈 보내주시는 김치로 아무 걱정없이 밥상을 차렸지만, 비행기를 갈아타고 와야만 하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부모님이 담궈주시는 김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요즘 한국에서는 집에 누워 손가락만 잠깐 움직이면 취향에 맞는 다양한 김치를 먹을 수 있는 세상이라던데, 이곳 이집트에서 한국교민들은 ‘각자도생’이다. 물론 한국식당에서도 김치를 판다. 하지만 너무 비싸서 네 식구가 매일 먹을 김치를 감당하겠다는 건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래서 ‘중국 2년, 이집트 5년’ 도합 해외살이 7년차인 나는 제일 귀한 양식 김치를 무조건 담궈야 한다는 목표에 사로잡히게 됐다.

이곳 이집트에도 배추는 난다. 정확히는 중국 배추다. 날씨가 더운 5월에서 9월사이에 생산되는 배추는 별로 좋지 않다. 잎에 억세 숨이 잘 죽지 않는다. 키만 크고 속이 차지 않아서 질기기도 하고 맛이 없다. 찬바람이 불고 기온이 내려갈 때쯤 출하되는 배추라야 김장 담그는데 그나마 쓸모가 있다. 이맘 때가 바로 그 배추를 구할 때다. 이곳 한국식당은 배추를 직접 사서 교민들에게 판매도 하고, 주문만 하면 배추를 절여주기도 한다.

이집트 이방인 주부 5년차인 나는 현지인들이 가는 재래시장을 한번씩 가는데, 그곳에 있는 채소가게 주인에게 주문하면 도매시장에서 산 가격의 2배 정도 가격에 채소를 살 수 있다. 그 정도라도 괜찮다. 채소가 신선한데다 그나마 어디보다 싼 가격이라 넙죽 고마와라 받는다.

'아랍쑥' 이라 불리는 전통 재래시장의 풍경. 사진= 신나리
‘아랍쑥’ 이라 불리는 전통 재래시장의 풍경. 사진= 신나리

오늘은 한국 독자들에게 이집트 현지 상인도 잘 모를 만큼 족히 100년은 넘었고 이름이 ‘아랍쑥(쑥이 현지어로 시장이라는 말이다)’인 재래시장을 소개해 드리겠다. 놀라지 마시라. 여기 사는 교민들 중 많은 이들이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런 곳이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이집트 카이로 내에 이 전통 시장은 이집트의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다.

시장은 카이로 시내에서 동쪽 편에 있는 마을 ‘마아디’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마아디는 서울의 한남동처럼 대사관저가 즐비하고 가는 곳마다 야외 카페가 있는 ‘외국인들이 모여사는 동네’다. 여기서 차로 10분 가량을 가면 갑자기 정신 없이 꼬불꼬불한 길을 만나게 되는데, 그곳이 도시 속에 숨겨진 비밀의 장소 같은 전통시장이다. 어느 해 여름 필자가 이 곳 구경을 시키러 아이들을 데려왔더니 “자기들을 벌 주려고 데려 왔나”며 기겁했을 정도로 도시 분위기와는 동떨어져 있는 곳이다.

복잡한 골목을 비집고 ‘아랍쑥’에 들어서면 길가에 이집트 아저씨들이 시샤(물담배)를 피고 있고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아이들은 외국인인 나를 신기한듯 구경한다. 골목골목 가게마다 어디서 왔는지 다양한 채소들과 과일들이 가득가득 쌓여있고, 생선 가게에는 10대로 보이는 아이들이 생선을 다듬고 있는 모습이 그냥 우리네 시장같았다. 걔네들끼리 큰소리로 뭐라뭐라 이야기하는데, 아마도 오늘 들어온 생선 종류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생과일 쥬스집에선 아랍 음악이 큰소리로 흘러나오고, 고기집에는 소세지 갈비, 양고기와 가죽을 벗긴 덩어리에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염소 고기가 천정에 걸려 있다. 이집트 사람들의 주식인 걸레빵(한국 교민들이 빵 모습을 보고 부르는 별칭. 현지 말로는 애쉬 빵)집 앞에 줄 서있는 사람들, 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가는 ‘툭툭이’에 탄 손님들, 어느 시장이나 비슷할 것만 같은 모습에 ‘나도 살아있구나’하는 생기가 들어 참 좋다.

그런 기분을 뒤로 하고, 나는 익숙하게 단골 채소 가게로 가서 배추상태를 살핀 뒤에 아랍 상인에게 가격을 흥정했다. 참, 이곳 아랍 상인들은 손님에 대해 ‘단골’ 의식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들은 ‘단골이 되면 어차피 자신의 가게에 올 사람인데’라며 가격을 절대 안깎아준다. 우리나라 정서와는 사뭇 다르다.

그래도 내 맘속 단골 가게라고 생각하는 가게에서 배추 값을 흥정한 뒤 차에 배추를 실으려고 하는데, 8~10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나타나 “실(أشيل)?” 이라고 말을 건넨다. “이 배추 들어줄까?”라는 말이다. 30㎏는 족히 넘는 배추를 몸무게 30㎏도 안되어 보이는 꼬맹이 둘이서 나르겠다며 내 앞에서 티격태격한다. 겨우 200원 정도의 팁을 받으려고.

내가 채소 가게 아저씨와 사진 한 장을 찍고 지나가려고 하니, 과일가게 아줌마가 자기랑도 사진을 찍자고 나선다. 장사하기 바쁠 시간에 작은 즐거움을 찾으며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는 순박한 아랍 상인들이다. 단골이라도 물건값을 깎아 주지도 않더니, 갑자기 나에게 “하비비(연인이나 친구를 부르는 친근한 현지어)”라 부르며 사진을 찍자고 달라붙기는. ㅎㅎ

과일가게 아줌마가 낯선 외국인인 나와 같이 사진을 찍자며 나섰다. 사진= 신나리
과일가게 아줌마가 낯선 외국인인 나와 같이 사진을 찍자며 나섰다. 사진= 신나리

중학교 시절 필자는 부산에 살았는데, 외국인들이 신기해서 해운대 바닷가에 가서 외국인들에게 말을 걸고 사진도 찍었다. 한국인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높아진 지금, 어쩌면 이들도 어린 시절의 나처럼 외국인을 좋아하고 함께 사진 찍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해 잠깐 행복감에 젖기도 했다.

머나먼 이역만리 이집트에서 심심찮게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냈고, 그 파장이 100년 넘은 현지 재래시장 상인들도 한국사람을 좋아하는 환경을 만들어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살짝 뿌듯했다.

카이로에서 동쪽편으로 떨어져 있는 '마아디'라는 마을에서도 10분 거리에 있는 이집트 재래시장 '아랍쑥'.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진= 신나리
카이로에서 동쪽편으로 떨어져 있는 ‘마아디’라는 마을에서도 10분 거리에 있는 이집트 재래시장 ‘아랍쑥’.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진= 신나리

중국에서건, 이집트에서건 그 나라의 재래시장은 ‘화개 장터’ 같은 곳이다. ‘있을 건 다 있고, 없는 건 없는 곳’. 그 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거처를 두고 있는 땅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범위내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이방인으로 오래 살다보면 그런 생각이 굳어진다. 오늘은 특별하게 ‘아랍쑥’에서 사온 속이 꽉 찬 배추와 노르웨이산 고등어, 시금치, 부추로 저녁상을 차릴 생각이다. 노릇노릇한 고등어구이, 달큰한 시금치 된장국이 밥상에 오르면 가족들 모두 엄마의 수고에 감탄해할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토끼굴에 빠져 신기한 모험을 한 것 마냥 나는 이날 꼬물꼬물한 길을 거쳐 들어간 그 굴을 지나 펼쳐진 ‘아랍쑥’에서 순박한 아랍상인을 만났고, 맛있는 저녁 식탁을 가꿨다. 그리고 K-한류를 머금은 이집트 사막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고향 하늘을 그리워한다.

글쓴이

신나리 칼럼니스트

신나리 이집트 통신원 겸 칼럼니스트는 한국에서 '신나리 영어교실'을 운영하며 즐거운 생활을 하다가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뜻밖의 이집트 생활을 하고 있다. 코로나19 감염증 사태로 불안한 속에서도 씩씩하게 두 아이를 키우며 지내며 이집트 생활을 송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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