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과학자의 ‘죽음’과 한국 과학저널리즘의 ‘무지’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에드워드 윌슨 보다 더 중요했을 토마스 브록 한국 저널리즘은 PCR 탄생 내막 모르나
에드워드 윌슨과 나
에드워드 윌슨(1929-2021)이 지난 26일 별세했다. 국내 언론은 일제히 그의 죽음을 타전했다. 대부분 ‘통섭’과 ‘사회생물학’을 윌슨의 유산으로 꼽았다. 뉴욕타임즈는 유명한 기생충 학자이자 생물학에 대한 대중적 저술로 유명한 과학 작가 칼 짐머에게 부고를 맡겼다. 칼 짐머는 글의 서두에서 “생물다양성, 곤충, 인간본성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두 차례의 퓰리처상을 수상한 생물학자이자 작가”로 윌슨을 표현했다.
개미연구로 하버드에서 박사학위
에드 윌슨은 1929년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엄에서 회계사 아버지와 비서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자연주의자>라는 책에서 회고했듯이, 윌슨은 어린 시절부터 숲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는 이혼한 부모 대신 자연의 식물과 동물에서 위안을 찾았다고 회고했다. 그의 시선을 가장 강렬하게 잡아끈 것은,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미였다. 개미 둥지를 뒤지길 좋아하던 윌슨은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생물학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하버드에서 개미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56년 하버드 교수진에 합류했고, 이후 46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논문과 저술을 남겼다.
윌슨은 자신의 꿈을 이룬 행복한 과학자였다. 왜 그런지 비루한 내 이야기로 비교를 해볼까 한다. 그의 사망 소식을 지하철에서 접하고 나는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그중 마지막 문장은 “내 정체성의 한 축을 만드는데 어찌어찌 기여한 몇 안되는 생물학자다. 윌슨, 좋은 삶이었기를.”
에드 윌슨이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이라는 책을 출판했던 무렵에 나는 서울 강북의 변두리 지역에서 태어났다. 나는 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면 항상 산으로 달려가 곤충과 물고기를 잡고 놀았다. 특히 곤충이 좋았다. 그들은 산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었고, 잠자리채만 있으면 꽤 많은 곤충을 수집해서 표본을 만들 수도 있었다. 막연하게 곤충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 건 그 무렵이었다. 당시 내 눈을 사로잡았던 것도 개미였다. 큰 개미굴을 찾은 날은 친구들과 개미굴을 파기도 했고, 개미굴 앞에 먹이를 가져다 주기도 하며 놀았다. 꿀벌도 신비한 곤충이었지만, 독침을 가진 벌은 날아다녀서 접근하기 어려웠다. 개미의 군집이 주는 신비로움이 나를 생물학자로 이끌었던 건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윌슨과 나의 경력이 비슷하다.
저물어가는 진화생물학
나는 한국이라는 과학의 주변국에서 태어났다. 지금이야 한국도 훌륭한 과학자를 많이 배출했지만, 내가 어린 시절엔 TV에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과학자들 외엔 대부분 외국의 과학자들이 과학자의 표본이었다. 그래도 어렵게 생물학과에 입학한 나는 어려서부터 꿈꾸던 개미 연구를 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한국은 당시 막 분자생물학이 생물학의 주류로 자리잡고 있었고, 유행을 빠르게 따라가는 한국 과학의 특성처럼, 이미 그 시절부터 대학에서 진화생물학처럼 오래된 생물학의 전통은 밀려나고 있었다.

사실 에드워드 윌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의 책 <자연주의자>에는 1950년대 하버드 생물학과 건물의 아래 윗층을 함께 쓰던 자신과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노벨상 수상자 제임스 왓슨이 대립하던 이야기가 나온다. 윌슨은 1956년 자신만만하게 하버드에 부임한 젊은 진화생물학자였지만, 당시 생물학은 이미 분자생물학으로 변모하고 있던 중이었다. 반면 왓슨은 윌슨처럼 낡고 오래된 생물학자를 쫓아내려하고 있었다. 둘은 오랫동안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윌슨은 박물학이라는 낡은 과학의 마지막 끝자락에 올라탔던 다윈처럼, 분자생물학에 밀려 주류에서 밀려나고 있던 진화생물학의 끝자락에 올라탔던 과학자였다.
국내에서 진화생물학 연구를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나서, 게다가 힘들게 찾아갔던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에게서 대학원 입학 거절 통보 비슷한 걸 받은 후, 나는 그렇게 좋아하던 진화생물학 책들을 제쳐놓고 분자생물학자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했다. 분자생물학은 어려운 학문이었다. 윌슨 같은 진화생물학자들이 아마존 같은 열대 우림에서 멋진 모자를 쓰고 생물학 연구를 한다면, 분자생물학자들은 하얀 가운을 입고 실험실에서 아무도 이해 못할 분자구조를 써가며 연구를 한다. 처음엔 대학원에 적응하지 못했고 야외에 나가 진화생물학자가 되고 싶다던 꿈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미 자본주의에 포위된 분자생물학
그렇게 분자생물학을 받아들이고 나니, 분자생물학이 지나온 역사가 보였다. 유전학과 생화학의 합성으로 20세기 중반에 탄생한 이 학문의 역사야말로, ‘통섭의 역사’였다. 과학철학자를 만나 함께 생물학사 연구를 하며 꿈을 키워 나갔는데, 그러다 초파리라는 생물로 행동유전학을 창시한 ‘시모어 벤저’라는 과학자를 알게 됐다. 그는 나와 같은 분자생물학자로 경력을 시작해, 행동을 유전자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학문을 창시했다. 그의 길을 따라 미국으로 떠났고, 풍족하지 않은 유학생활을 거쳐 캐나다에서 교수 자리를 잡았지만, 기초연구에 주어지지 않는 연구비 덕분에 5년 만에 캐나다를 떠나 중국으로 연구실을 옮겨야 했다.
우리 세대 과학자들은 에드 윌슨처럼 ‘과학의 풍요로운 시대’를 경험할 수 없었다. 연구비는 부족하고, 박사는 지나치게 많다. 에드 윌슨이 과학자로 승승장구하던 시절에, 진화생물학은 점점 주류 생물학의 지위를 분자생물학에 물려주었고, 대학은 물론 연구소에서도 겨우 존재하는 분과가 되었다. 분자생물학 또한 의학과 연계된 질병연구에 편향되어가며, 지나친 경쟁으로 누구도 박사학위를 하려 하지 않는 분야가 되었다. 윌슨이 승리하던 그 시기에, 전 세계의 과학은 미국적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망가져버렸다.
사회생물학과 통섭
에드 윌슨은 사회생물학으로 유명하다. 그의 책 <사회생물학>은 분명 훌륭한 고전이 될 자격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아직 국내에 전체가 번역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이병훈 교수가 <사회생물학> 번역서를 출판했지만 요약본이다. 그의 제자 최재천 교수가 국내에 들어온 지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 책은 아직도 번역되지 않았다. 국내에서 사회생물학을 놓고 떠드는 사람들은 과학자가 아니라 대부분 철학자나 윤리학자들이다. 한국 과학자들 중에 자신을 사회생물학자라고 소개하는 사람은 최재천 교수 외엔 없을 것이다.
윌슨의 사회생물학은 과학계에 미친 영향보다 인문학계에 미친 영향이 더 큰 학문이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분과과학, 예를 들어 유전학이나 유전체학이 만들어지고 이 분과학문이 체계적으로 과학의 시스템에 편입될 경우, 해당 분과과학의 이름으로 된 학술지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의 질과, 그 논문들의 영향력으로 해당 분과의 성공여부가 판가름된다. 하지만 사회생물학은 이런 과정을 겪지도 않았을 뿐더러, 겪었다고 해도 실패해버린 학문이다.
구글에 들어가서 Sociobiology로 검색을 하면 ‘Sociobiology’라는 학술지가 하나 뜨는데, 윌슨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이 학술지에 그의 부고 같은 글이 하나 실렸으나 잡문에 가깝다. 학술지 편집자들 이름을 보면 대부분이 브라질과 멕시코 등 남미에 있는 학자들이다. 2020년 영향력지수는 0.98이라고 나온다. 이 학술지에 실린 논문이 평균 1년에 약 1번도 채 인용이 안된다는 뜻이다.
사회생물학이라는 이름으로 검색되는 학술지가 몇개 더 있고, 이 중에는 스프링어나 엘스비어처럼 거대학술지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 영향력지수가 채 1이 안된다. 물론 영향력지수가 모든 걸 대변하진 않지만, 국내에서 출판하는 분자세포생물학회지의 영향력지수가 4.58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 학술지들의 수준을 가늠해보면 될 듯하다. 사회생물학은 언론과 인문학계 그리고 대중을 사로잡는데는 성공한 기획일지 모르지만, 과학적으로는 실패한 기획이다.
최재천의 대중적 인기, ‘통섭’이 맞다고?
통섭도 마찬가지다. 그의 제자 최재천 교수의 대중적 영향력 덕분에, ‘통섭’이라는 책은 한국에서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는 ‘통섭원’까지 만들며 무언가를 해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실제로 윌슨이 말하는 통섭이 적어도 한국에서 통섭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적은 없다. 아직도 생물학은 생물학이고, 물리학은 물리학이다. 생물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되는 일은 안타깝게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나도 오래전 <통섭의 경계>라는 글로 썼지만, 초파리 진화유전학자인 앨런 오는 <큰 그림>이라는 뉴욕타임즈의 서평을 통해 윌슨의 이 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긴 서평에서 앨런 오는 윌슨의 의도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 책의 요점은 매우 단순하다. 모든 지식은-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을 넘어 자연과학까지 모두-통합될 수 있다. 윌슨은 이를 ‘통섭’이라고 부르는데,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한 층위의 사실들과 이론들을 다른 층위의 것들과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지식을 통째로 뛰어넘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자연과학은 이미 그런 연결을 시도해 왔는데, 생물학은 화학으로, 화학은 물리학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이다. 윌슨은 이제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그런 대열에 동참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자들은 행동생물학의 결과들을, 생물학자들은 예술의 기원에 대해 고민해야만 한다. 이러한 융합은 인문학을 고무시킬 것이고, 그동안 진보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던 사회과학의 운명을 뒤바꿀 것이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윌슨의 통섭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지독한 과학만능주의와 환원주의의 죄악에 대해 항변하면서도, 윌슨은 통섭이 몇몇 사회과학 분야의 붕괴를 가져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인문학조차 ‘과학에 가까워질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과학과 융합할 것’이다. ‘미지의 것들을 관조’해온 철학의 경우는 특히 안 좋은데, 통섭의 기제는 ‘가능한 많은 철학 분야를 과학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앨런 오는 <통섭>의 가장 큰 문제를 그 모호함에서 찾는다. 즉, 윌슨은 통섭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 어떤 구체적 실현계획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윌슨의 당혹스러울 정도의 모호함은 그의 계획에서 추구하는 논의의 심장부에서도 문제가 된다. 그건 통섭 그 자체에 대한 그의 비젼에서부터 시작된다. 가끔 통섭은 아주 강한 의미를 갖는다. 모든 지식은 물리학의 몇몇 법칙들로 환원된다. 이것이 엄밀하게 말하면 ‘지식의 대통합’이다. 하지만 때때로 통섭은 매우 약하게 표현되는데, 예를 들어 그가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는 부분에서 경제학자들과 생태학자들이 환경재앙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다룰 때 그렇다. 이런 종류의 생각은 “당신의 학문분야와 나의 학문분야가 대화를 좀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라는 아주 약하고 실용적인 의미의 통섭이다. 강한 의미의 통섭 없이, 약한 의미의 통섭만(누구인들 그러고 싶지 않겠느냐만)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당신은 환경의 건강성을 경제적 지표들로 측정하면서도 사회과학이 자연과학으로 붕괴되지는 않는 방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모호함이 윌슨이 애용하는 방법이다. 통섭은 그 강한 주장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라도 그 약한 측면이 가지는 방어적인 측면으로 인해 매력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그런 흐릿한 표적이다(당연히 여러분은 경제학자가 환경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앨런 오는 그의 글을 ‘불가지론’에 대한 존중으로 마무리한다. 세상과 자연엔 우리의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윌슨은 그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다윈의 ‘불독’ 토마스 헉슬리가 신의 존재에 대해 사용한 전략이었고, 바로 그런 태도가 과학이 우생학이나 사회진화론처럼 오용되지 않도록 하는 방어막이기도 하다.
<통섭의 경계>라는 글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경계 같은 건 원래 없었다. 17세기 학자들의 다양한 관심사가 전문화 이전의 역사라는 이유로, 그들을 폄하할 이유도 없다. 경계는 언제나 모호했고, 지금도 모호하다. 학문의 역사는 지속적인 간섭과 충돌과 화해의 역사였을 뿐이다. 융합과 통섭이란 말장난일 뿐이다. 언제나 융합과 통섭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이뤄낸 학자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입이 아니라 손으로 그걸 한다. 그것이 경계를 넘고 통섭을 바라는 과학자들이 윌슨에 대해 조용한 이유다(김우재, ‘통섭의 경계’, 물리학과 첨단기술).”
나는 여전히 내가 그 글에서 대비시킨 막스 델브릭의 통섭을 사랑한다. 과학자의 저술은 중요하지만, 과학자는 말보다 실천을 통해 세상을 더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 토마스 브록의 죽음
토마스 브록(Thomas Brock, 1926-2021)은 미생물학자다. 그는 올해 4월 4일에 별세했지만, 국내 언론사 중 단 한군데서도 그의 죽음을 다루지 않았다. 미국 언론은 뉴욕타임즈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언론이 토마스 브록의 부고를 실었다. 뉴욕타임즈는 “토마스 브록, PCR 검사의 길을 닦은 과학자 94세로 숨지다”라고 제목을 달고, 그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1996년 그는 옐로우스톤 공원의 온천에서 열에 내성이 있는 박테리아를 발견했다. 바로 이 발견이 지금 코로나19 바이러스 검사의 화학적 과정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브록은 1926년 오하이오의 에리 호수 근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자연에 호기심을 가졌다. 그의 부모님은 자연에 대한 브록의 호기심을 지원해주었다. 그는 2차대전 당시 해군에 입대했다가 제대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식물학으로 학사를, 미생물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몇 군데의 회사에 다니다가 1960년이 되어서야 인디아나 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얻었다.
PCR이 없었다면 지금 코로나를 어떻게?
1964년에 옐로우스톤으로 떠난 그는 온천에 사는 미생물을 발견하고 이를 학계에 보고한다. 영상 70도가 넘는 온도에서도 살 수 있는 이 박테리아에 Thrmus aquaticus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그의 발견은 사이언스지에 실렸다. 이어 1976년 앨리스 치엔이라는 과학자는 이 박테리아에서 DNA를 복제하는 효소를 발견하고 학명을 따서 Taq polymerase라는 이름을 붙였다. 바로 이 효소가 우리가 지금 코로나 19 PCR 검사에서 사용하는 효소다. 이를 이용해 PCR이라는 DNA 연쇄중합반응의 가능성을 밝힌 캐리 멀리스는 1993년 노벨상을 수상한다.
브록은 1971년 인디애나 대학을 떠나 위스콘신-메디슨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990년 은퇴하기 전까지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미생물학에서 가장 유명한 교과서를 썼고, 은퇴 후에도 아내와 함께 위스콘신에 자연보존습지를 만들어 그 곳에서 멸종해가는 종에 대한 연구를 지원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비슷한 업적을 남겼는데도 한 과학자의 이야기는 국내에서 너무나 유명하게 다루어지고, 한 과학자는 아예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발견이 코로나 19를 막는 인류의 무기를 제공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언론과 대중은 과학자의 아름답고 과장된 이야기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에드워드 윌슨의 죽음을 듣고, 우연히 내 페이스북 피드에 뜬 토마스 브록의 죽음을 보며, 나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에드워드 윌슨이 죽었다. 국내 언론은 대부분 그의 부고를 기사로 다뤘다. 해외 언론도 마찬가지다. 과학자의 부고가 국내 언론에서 다루어지는건 흔한 일이 아니다. 윌슨은 ‘통섭’이라는 책으로 한국학계를 한번 뒤흔들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의 제자 또한 윌슨 같은 대중과학자로 유명하니, 그럴만하다.
얼마전 토마스 브록이 죽었다. 국내 언론은 그의 죽음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그가 없었으면 PCR이라는 기술은 존재할 수도 없었고, 지금처럼 코로나19 테스트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국내 언론 단 한군데서도 그의 죽음을 다루지 않았다. 해외 언론은 뉴욕타임즈를 비롯해서 이미 그의 죽음을 자세히 다루었다. 한국의 과학저널리즘? 과학기자협회는 반성 좀 하시라.”
한국 과학저널리즘은 왜 눈길을 주지 않았나
과학이 한국에 자리를 잡은지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국내엔 제대로된 과학저널리즘이 자리잡지 못했다. 그렇게 전문가적 관점이 결여된 과학언론 탓에, 한국사회가 과학에 대해 갖는 편견도 강화될 뿐이다. 우리는 정말 사랑해야할 과학자는 모르거나 무시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과학자가 TV에 나와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하는 강연에는 열광한다. 언론은 과학논문을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과학기사는 외국 것을 베끼거나 경제효과만 강조하는 헛소리로 일관한다.
그런 언론을 접하는 정치인들이 과학을 어떻게 소비할 지도 뻔한 일이다. 그들에게 과학은 어쩔 수 없이 다뤄야 하는 ‘계륵’일 뿐이다. 과학저널리즘이 어떻게 정치와 연관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관심조차 없다. 미·중 패권경쟁의 핵심에 과학기술 경쟁력이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제대로 된 과학기자 한 명 가지지 못한 나라다.
이런 과학저널리즘 수준을 가진 한국에서, 에드워드 윌슨의 죽음은 과대포장됐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하지만 우리는 에드워드 윌슨을 소비한 한국적 유치함으로부터 정말 많은 걸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최재천 교수가 목놓아 부르짖는 학문으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되지 않을까. 그래야 진화생물학 연구소 하나 없는 한국에서 에드워드 윌슨을 뛰어넘는 한국의 진화생물학자가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최재천 교수는 아직 스승인 에드워드 윌슨의 부고를 쓰지 않았다. 그의 부고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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