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학 운동과 과학적 역사학의 대결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20)조선학 운동을 주동한 최남선·정인보 이에 맞선 백남운 등 마크르스주의자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백남운. 그는 저서 '조선사회경제사'를 통해 조선학운동이 신비화해버린 단군을 조선의 현실로 불러온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백남운. 그는 저서 '조선사회경제사'를 통해 조선학운동이 신비화해버린 단군을 조선의 현실로 불러온다.

“우리 원시족의 생활발전사를 전반에 걸쳐서 구명하려면 유일한 과학적인 방법론에 입각하여 여러 과학 부문의 엄정한 비판적인 성과를 정리하여 통일적으로 고찰해야 할 것이다.”- 백남운

‘동경삼재(東京三才)’, 한말 일제 초에 일본유학을 통해 등장한 근대적 지식인 중에서 가장 기재가 넘치던 벽초 홍명희,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이들은 동양의 런던으로 불리던 일본 동경에서 근대를 뼛속까지 경험했고, 새로운 한국을 건설할 신청년으로 추앙받았다. 홍명희는 1888년, 최남선은 1890년, 이광수는 1892년 생으로 비슷한 연배의 이들은 일본유학파라는 공통점 외에도, ‘문학’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학술적 특징까지 공유했다. 근대학문의 세례를 받았으나 전형적인 인문학 지식인이었던 이들은 귀국 이후 홍명희의 경우 자연주의 문학을 통해, 최남선의 경우 역사와 조선문화라는 영역을 통해, 그리고 이광수는 문학과 사회평론이라는 영역을 통해 식민지 조선을 일깨우고자 했다.

이들은 “우리는 선배라는 것이 있지 아니하도다”라고 단정할 정도로, 윗세대 지식인들과 구분되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었다. 심지어 이들이 귀국 후 1919년 3.1 운동을 주도했을 때의 나이는 각각 32세, 30세, 28세에 불과했다. 서로의 신분차이에도 불구하고 동경삼재는 허물 없이 지냈는데, 그건 이들이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근대화를 경험하고 있던 일본에서 만났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서구의 모든 문물과 문명이 쏟아져 들어오던 동경에서 그들이 받은 근대화의 세례를 조국에 전달하기를 원했던 이들은, 하지만 그들이 습득한 문명적 사고와 물질적 기반이 조선에서 이루어질 수 없음을 곧 직감하고 신경쇠약을 차례로 경험하기도 했다. 조선은 근대화를 위한 사상적/물질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동경삼재, 일본에서 유학했던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왼쪽부터)를 부르던 말이다. 이들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었으나, 모두 문학에 심취한 인문학적 지식인의 전형이기도 했다
동경삼재, 일본에서 유학했던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왼쪽부터)를 부르던 말이다. 이들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었으나, 모두 문학에 심취한 인문학적 지식인의 전형이기도 했다

최남선의 조선학...신앙으로서의 학술

최남선은 기미독립선언서를 쓰기도 전에 이미 유명한 학자로 칭송받고 있었다. 그는 이미 30세가 되기 전에 ‘학자계의 태두’라 불릴 정도로 조선 학술계의 유명인사였다. 한국근대사학 성립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이병도는 “일생을 통하여 그가 가장 큰 취미를 가지고 노력한 부분은 원시사회, 특히 단군 문제에 있었으며 신화학적, 민속학적, 언어학적, 비교종교학적, 문헌학적, 기타 인류고고학적, 이러한 여러 면에서 이 문제를 고찰하고 연구를 통하여 일반적인 이론 체계를 수립하려 애썼던 학자” 라고 평했다. 최남선은 <소년>의 창간 이듬해인 1910년 신채호의 <독사신론>을 소환해 <국사사론>으로 고쳐 실으면서, 자신의 학술적 관점이 과학적 엄밀함을 추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는 순정사학의 산물로 보아 주기에는 너무 경솔하고 그렇다고 순연(純然)히 감정의 결정이라고만 하기도 바르지 못한지라. 다만 조국의 역사에 대하여 가장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참과 옳음을 구하여 그 오래 파묻혔던 빛과 오래 막혔던 소리를 다시 드러내려고 온 정성을 다한 한 소년의 속마음의 부르짖음으로 이에 이를 수록하노라. 그러므로 과학적 정확에는 기다(幾多)의 미비가 있을지요. 겸하여 논리와 문맥의 정제(整齊)치 못한 곳이 많으니 이는 분골(奔汨)한 중 홀망(忽忙)한 붓의 어찌하지 못함으로 용서함이 가(可)할 듯.”

비록 고대신화인 단군에 천착하긴 했으나 초기의 최남선은 자신의 작업을 ‘과학적’인 연구로 칭하며 신채호와 자신을 대비시키고 있다. 그는 ‘감정의 결정에 치우침 없이 논리와 문맥의 정제를 갖춘’ 서술을 과학적이라고 불렀는데, 이후 자신이 창립한 조선광문회를 회상하면서도 “역사적, 언어적, 도덕적 삼방면을 자주적, 근대적, 과학적으로 연구/설명하려 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문헌자료의 고증을 넘어 고고학, 인류학, 인종학, 토속학, 종교학, 언어학, 금석학, 고전학, 문장학, 지질학, 지리학, 해부학, 생물학 등을 총동원해 역사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대사에 대한 지나친 집념과 천착으로 인해 “그는 차츰 ‘조선’ 중심의 문화권에 집착하면서 국수주의 경향성에 물들어 갔다.”

최남선이 처음으로 ‘조선학’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건 19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잡지 <소년>을 통해 ‘과학적 사유’를 보여주었던 최남선이 1920년대를 거치며 ‘조선학 운동’과 ‘불함문화론’ 등을 통해 고대역사와 단군신화 등에 집착했던 이유를 정확히 짐작하긴 어렵다. 1916년 ‘조선학’이라는 용어는 ‘조선 단위의 문화’이자 조선의 서적 등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문화의 토대가 된 조선의 사상과 문화를 총체적으로 일컫는데 사용되었는데, 이보다 더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 개념은 아니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문 작성과 민족대표로 활약했던 1919년의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1922년이 되자, 그는 <동명>이라는 잡지를 통해 ‘조선학’을 세울 것임을 선언한다.

조선학을 선언하는 이 글에서 최남선은 스스로의 학문적 정체성이 과학기술과 같은 형이하학이 아니라, 문화나 역사연구 같은 형이상학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3.1 운동이 실패한 시점에서 그는 독립의 의미를 이렇게 재정의한다.

“정신부터 독립할 것이다. 사상으로 독립할 것이다. 학술에 독립할 것이다. 특별히 자기를 보호하여 지닐 정신, 자기를 발휘하는 사상, 자기를 구명하는 학술의 상으로 절대한 자주, 완전한 독립을 실현할 것이다. 조선인의 손으로 <조선학>을 세울 것이다. 조선의 피가 속에 돌고, 조선의 김이 겉에 서리는, 활발한 대조선 경전을 우리 자리에서 우리 힘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부끄러운 줄 알 것이다. 마음과 힘을 떨쳐 일으킬 것이다. 나를 내가 알아 둘 것이다. 내 생명의 샘을 내 손으로 칠 것이다. 내 영광의 복을 내 손으로 돋을 것이다.”

최남선은 정신을 통해 스스로를 지키고, 사상을 통해 스스로를 발휘하고, 학술을 통해 스스로를 구하는 것으로 독립을 이루겠다고 말한다. 최남선에게 절대적인 자주, 완전한 독립은 학술을 통해 사상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정신으로 삼는 상태에서 구현되는 것으로 변해 있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정치로 조선을 다스리기 시작했고, 최남선은 수감생활을 하며 조선학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동경삼재의 나머지 2인이었던 이광수와 홍명희 또한 ‘준비론’과 ‘실력양성론’ 혹은 신사상을 학습하는데 주력했다. 최남선에게 조선학 운동의 귀결점은 민족의 독립이 아닌 개인의 독립으로 위축되었고, 학술의 구체적인 목표는 엄밀한 연구서의 출판이 아닌 ‘대조선 경전’을 만드는 것으로 퇴색했다. 김인식의 말처럼 “최남선의 조선학 운동 선언은 과학을 넘어 신앙의 영역으로 접어들었다.”

최남선과 정인보의 두 조선학

1922년 최남선의 ‘선언’은 말 그대로 선언에 불과할 뿐, 그 어떤 엄밀한 학문적 방법론과 성취를 보여주는 글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선언은 학자의 엄밀한 글이라기보다는 종교 지도자의 설교를 닮아있다. 예를 들어 최남선은 정신과 사상의 독립 외에도 조선학을 통해 시간상의 광복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일태극이 함장한 무한대를 반만년 사실을 통하여 동관 낭조할 것이다. 이것 하나만은 남의 손톱 하나 대지 못하게 하고, 온전히 내 정신, 내 준비, 내 적공으로 시간상 광복을 성취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 당면의 대급무는 공간상 광복보다 덜하지 아니한 의미로서 시간상의 광복이다. 아니, 공간적 광복보다 앞서서 시간상 광복을 이루어야 하겠다. 그리하여 신비와 성령의 태극을 영원히 신비코 성령케 하자.”

최남선은 일본 학자들과 식민주의자들이 조선학 연구를 수행하는 것에 대응하려 한 결과, 조선인이 수행하는 조선학만이 그런 주체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학자로 훈련받은 그는 조선학이라는 학문이 종교성을 갖게 되어선 안된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최남선은 이 선언의 곳곳에서 자신의 연구가 과학적 연구이며 합리적 해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선언의 귀착점은 경전, 즉 신앙의 영역이었다. 따라서 1922년의 선언은 학계의 반응을 끌어내지 못하고 잊혀진다.

1927년 <삼국유사>를 보급하면서 그는 다시 조선학 건설에 나선다. 1922년의 선언이 무반응으로 끝났음을 의식했던 듯, 그는 조선학을 더 자세히 정의하고 조선학의 내용, 자세, 목적 등을 여러 표현으로 밝혔다. 그는 조선학이 조선문화에 대한 연구이며, 연구 주체는 조선인이고, 연구의 태도와 자세는 자주적이어야 하며, 반드시 ‘조선아의 자각’을 동반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행히 1927년의 시도는 다른 지식인들에게 조선학이라는 용어를 인지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긍정과 부정의 반응 모두를 불러일으켰다.

불완전한 최남선의 조선학을 학계에 논쟁적으로 소개한 이는 위당 정인보였다. 1893년 태어난 정인보는 이건엽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우고 양명학을 전공으로 연희전문에서 한문과 국사를 가르치던 학자였다. 민족주의 계열로 분류되는 정인보는 당시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학계의 사조 중에 ‘국학’과 ‘국수주의’가 사상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시대적 조류 속에서 조선학을 주창하고 ‘조선 얼’이라는 개념으로 홍익인간의 정신을 구체화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인보의 <조선학>은 대종교를 만난다.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하는 한국 고유의 종교로, 1909년 홍암 나철이 동료들과 함께 다시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종교는 3.1운동은 물론 청산리전투 등의 독립투쟁에도 참여했으며, 개천절의 국경일 지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인보의 선배 학자인 신채호와 박은식은 실제로 대종교에 직접 입교해 활동했고, 단군에 대한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인보는 이들처럼 유교를 외래문화로 보지 않았고, 단군사상을 우리의 뿌리로서 강조하는 정도로 사용했다. 또한 <조선학>을 통해 다른 문화와 대비되는 조선만의 고유한 것을 찾거나, 조선 문화의 상대적 우위를 드러내려 했던 최남선과 달리, 정인보의 조선학은 식민지적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주체를 세우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제”로 정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인보의 조선학 또한 일제의 식민사관에 물든 민족의 혼을 되찾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고대사, 특히 단군조선론에 집착했다. 이는 일본의 역사학계와의 투쟁의 방편이기도 했다.

마르크스를 만난 단군

최남선이 그 시작을 알리고, 정인보가 진지한 학술의 주제로 정착시킨 <조선학>은 1930년대의 식민지 상황에서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을 지적으로 흥분시키는 주제가 되었다. 단군은 조선학의 중심 축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직후인 1948년 9월 25일 법률 제4호인 ‘연호에 관한 법률’을 통해 ‘단기(檀紀)’가 ‘서기(西紀)’와 함께 국가의 공식 연호로 법제화됐다. 1949년 10월 1일에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 및 공포돼 단군의 조선건국일이 10월 3일 개천절로 선포됐다. 하지만 사회주의자였던 신남철은 해방이후 벌어진 이런 시도들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한다.

“팔굉일우(八紘一宇)’가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변하였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무엇을 인민의 생활과 민족해방에 기여 공헌한단 말이냐.”

‘팔굉일우’란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일본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 사상으로, 태평양 전쟁을 위해 일본이 만들어낸 구호였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신남철에게 단기 연호는 식민지 시기 매일같이 확인하며 살았던 다이쇼, 쇼와 등의 천황을 중심에 둔 제국 일본의 달력을 연상시키는 식민지의 잔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1934년 정인보가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발간하는 자리에서 꺼내든 ‘조선학’이라는 용어는 민족주의계열의 학자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유물사관론으로 무장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의 거대한 반발을 마주해야 했다. 1934년 9월 11일 동아일보의 한 기자가 ‘조선학’이라는 불명확한 개념을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역사학계의 권위자인 백남운, 안재홍, 현상윤 세 사람을 찾아 인터뷰를 시도한다. 세 사람 가운데 안재흥은 조선학이라는 용어의 수용에 적극적이었고, 백남운과 현상윤은 이를 부정하는 반응을 보였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자였던 백남운은 그의 저서 <조선사회경제사>를 통해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특수사관을 비판해온 인물이었고, 최남선과 정인보의 조선학에 대한 거부반응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현상윤은 아예 <조선학>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면 안된다고 못박았다. 이는 서양인들이 ‘이집트학’이라는 이름으로 이집트를 연구하듯이, 조선학이라는 용어에는 식민주의 지역학의 냄새가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나아가 그는 학문적 방법론의 측면에서도 조선이라는 대상을 총괄적으로 이해하려는 것보다 문화현상의 각 부분을 세심하게 연구하는 전문성이 더욱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해방 이후 현대에까지 이어진 단군을 국조로 하는 한국사회의 단일민족의식은, “구한말 서구의 내셔널리즘의 영향 아래 한국 민족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이데올로기적 상징으로 재부각”된 것이다. 근대 이전에도 단군을 국조로 하는 경모는 존재했지만 식민지 지배체제가 성립된 이후 대종교를 중심으로 단순신앙운동이 전개되었고, 학술계에서는 조선학 운동을 중심으로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사 연구가 활발해진 것이다.

단군신화의 마르크스주의적 해석

훗날 아나키스트가 되는 단재 신채호는 1925년 동아일보에 <전후삼한고>, <평양패수고> 등을 발표하며 1900년대 일본 학자들의 단군말살론을 반박하는 동시에 조선고대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한다. 이를 이어받은 것이 최남선, 정인보, 안재흥 등의 국학 계열 학자들이었고, 이들의 조선학 운동을 통해 단군은 민족주의의 중심적 표상으로 부각되었다.

신채호의 고대사 속에서 고조선은 광대한 영토를 영유하고 중국과 대등하게 존재했던 제국의 형상을 띤 국가로 현현하고, 부여족의 고대 국가들은 중국 영토 대부분을 영유한 대국가로 제시된다. 이어 “중국문화를 타자로 삼아 단군을 기원으로 하는 한민족 고유의 문화적 원류”가 구성되며, 이후 국선도, 화랑도, 풍류, 낭가 등으로 계승된 것으로 설명된다. 이런 단재의 고대사 기술 속에는 당시 그가 빠져들었던 사회진화론의 논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정종현은 단재 신채호의 이런 시도를 “힘이라는 왜곡된 형태의 보편성에 대한 욕망”이라고 해석하며, 이런 작업을 통해 단재는 “민족의 경계를 넘어 세계사적 보편과 접속하는, 혹은 보편을 자처하는 상상력”을 추구했다고 주장한다.

1925년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조선을 통하여 본 동방문화의 연원과 단군을 계기로 한 인류문화의 일부면>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그는 “동양학의 진정한 건립은 조선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의 비밀의 옛 문이 열림을 기다려 비로소 시작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한다. 단군이 단순한 조선의 건국신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을 포함하는 동방문화권 공통의 표상이라는 이 주장 속에서 오키나와, 일본, 조선, 동부중국, 만주, 몽고, 중앙아시아, 발칸반도에 이르는 광활한 권역이 동일한 문화권으로 포섭된다. 그의 이런 범아세아주의는 이후 그가 친일행위에 동원한 내선일체의 논리가 된다. 나아가 최남선 또한 신채호처럼 단군신화를 통해 세계사적 보편성과 만나려는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당대에도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은 그 비과학성으로 강력한 비판에 직면했다. 비판의 선두에 선 인물들은 사회주의 계열 역사학자들로 대표적인 인물이 백남운이었다. 백남운은 “단군신화는 문헌상에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건국신화인 만큼 귀중한 사료이지만, 그것을 실재화하거나 신비화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단군신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다. 백남운에 따르면 단군은 특정한 인격자나 민족시조가 아니다. 단군은 농업공산사회가 붕괴하던 시기에 원시 귀족이었던 남계 추장이며, 우리 민족이 원시사회의 발전사를 통해 경험했던 역사적 지표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단군신화를 “인간의 현실적인 관계의 세계사적 유사성의 표명”으로 파악한 백남운의 해석은 여러 사회주의 계열 학자들을 통해 반복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적 역사관을 따르던 이들 좌익계열의 학자들에게 있어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발상신화이자 조선역사의 초기지표임을 넘어 “원시공산사회의 붕괴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전환기 남계 추장의 확립에 대한 전설이 봉건 및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그 시대의 외피를 입고 나타난 것”으로 해석되었다. 즉,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라는 보편적 과학의 이름으로 사적 유물론의 맥락에서 조선사의 특수성이 세계사적 보편성의 맥락과 동일한 계통구조를 밟고 있음”을 논증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과정에서 <조선학>은 특수성만을 탐구하는 민족주의적 학술의 범주를 넘어, “‘과학’이라는 보편의 표상언어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학문으로 재인식되었던 것이다.

관념과 종교적 신비주의로 단군을 역사학에 등장시킨 민족주의자들의 시도는 현실과 과학적 실증주의로 단군을 재해석하려는 새로운 학자들을 만났고, 조선학운동은 ‘과학’적 학문을 둘러싼 신구 학자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재점화되기 시작한다.

글쓴이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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