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소그룹의 특징과 조선 개화당의 실패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⑧역사를 바꾼 ‘혁명적 소그룹’, 조선에는 왜 없었나 17세기 등장하는 ‘소그룹’, 근대과학과 필연 관계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개화파 인사들. 홍영식, 김옥균, 유길준등의 모습이 보인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개화파 인사들. 홍영식, 김옥균, 유길준등의 모습이 보인다.

“창조적인 지식, 예술, 제품을 만들어 낸 작은 네트워크들은 대개 호기심을 즐기고 기존의 경계를 무시하고 이를 뛰어 넘으려 하는 심성을 공유해야 하며, 미래에 대한 분명한 비전과 이루기 힘든 꿈을 동시에 유지하고, 실수에서 배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독립적인 개개인이 집단적 목표에 집중할 때 가장 창조적일 수 있음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홍성욱

무엇이 혁명적 소그룹을 만드는가

세상을 변화시킨 소그룹은 과학사 바깥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과학기술사에서 특정 시공간을 점유하는 혁명적 소그룹이 발견되는 건 과학기술이 가진 특성 때문인지 모른다. 과학은 패러다임의 변화에 의한 혁명적 변화를 자주 경험하며, 기술 또한 매우 빠르게 도약하는 특징을 보인다.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에서 활동하던 ‘잡종⁠’들에게서도 자주 혁명적 소그룹을 발견할 수 있다. 20세기 초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비엔나 학단/빈 학단/비엔나 써클’도 그들 중 하나다.

모리츠 쉴릭, 한스 한, 필립 프랭크와 같은 과학자, 루돌프 카르납, 오토 노이라트 같은 철학자와 오토 네우라스 같은 사회학자들은 격주로 세미나를 열며 통일과학운동을 벌였다.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흐의 영향을 받은 이들 일군의 학자들은 당시 완성되어 가던 자연과학의 모습에 열광하며, 논리학으로 자연과학을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비트겐슈타인과도 교류했으며, 논리실증주의라 불리는 철학사조를 만들어 20세기 분석철학과 과학철학의 시대를 열었다. 물론 이들의 통일과학운동은 실패했지만, 그들이 남긴 철학사조는 칼 포퍼를 비롯한 현대철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논리실증주의를 창조하는 바탕이 된 빈 학단의 주요 인물들.
논리실증주의를 창조하는 바탕이 된 빈 학단의 주요 인물들.

미국 실용주의 탄생시킨 ‘메타피지컬 클럽’

비엔나 학단이 사상적 영향력으로 철학이라는 학문적 지형을 변혁시켰다면, ‘메타피지컬 클럽’은 미국의 정신인 프래그머티즘을 창조해냈다. 1872년부터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법학자 올리버 웬들 홈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논리학자이자 기호학의 창시자 찰스 샌더스 퍼스를 주축으로 열린 토론 모임에서, 이 학자들은 관념적 형이상학에 몰두하던 유럽대륙의 철학을 반박하고, 인간의 이성을 신성한 것에서 상대적이고, 우연적이며, 오류 가능한 것으로 세속화함으로써 미국식 실용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미국식 실용주의를 완성시킨 존 듀이도 이 소그룹의 일원이었고, 이들이 구축한 실용주의는 남북전쟁 이후 미국이라는 국가를 완성시키는 이념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현재 미국의 장점으로 생각하는 많은 가치들, 즉 절대적 진리의 부정, 민주주의적 가치, 소수의 반대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 의사 표현의 자유 등은 모두 프래그머티즘으로부터 도출된 태도들이다.

홍성욱은 <네트워크 혁명, 그 열림과 닫힘>이라는 책에서 왜 소그룹에서 혁명적 사상이 나타나는지를 분석했다⁠. 혁명적 소그룹은 ‘10~15명 안팎의 느슨한 목표추구형 네트워크’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소그룹은 10~15명 내외로 구성된다. 경영학의 많은 연구결과 4명은 가장 작은 조직의 단위이며 대화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 단위라고 한다. 그리고 약 12명으로 구성된 그룹은 사람들이 ‘친밀한 연결’을 맺을 수 있는 최대 단위다. 보통 그 사람의 죽음이 심각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친척과 친구의 수, 즉 우리가 매우 자주 정규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가까운 사람의 숫자는 평균 12명이다. 150명은 흔히 ‘던바의 수’로 불리며 인간이 안정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적정한 숫자다. 150명은 씨족사회나 정착민 마을의 규모이기도 하며, 군대의 전투 단위이기도 하다. 소그룹은 12명 내외로 이루어진 모임이다. 즉, 소그룹은 가족이나 친척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정도의 가치를 지닌 숫자로 구성되어야 한다.

'네트워크 혁명, 그 열림과 닫힘'(홍성욱 저)에서.
‘네트워크 혁명, 그 열림과 닫힘’(홍성욱 저)에서.

둘째, 혁명적 소그룹은 느슨한 네트워크로 구성된다. 가족이나 친척과 비슷한 숫자로 구성되지만 소그룹의 연결은 이에 비하면 느슨한 연결이다. 즉, 혁명적 소그룹은 비공식적인 기반을 가진다. 한국사회에서 이익만 보이면 만들어지는 온갖 협회나 협의회 등과 소그룹은 완전히 반대의 특성을 보인다. 소그룹은 그들이 공유하는 목표 이외에는 서로를 구속하는 끈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목표 속에서 그들은 친밀하다. 주변에서 이런 조직을 찾아보는건 쉽지 않은 일이다. 소그룹의 느슨한 네트워크는 자주 모여 일상을 나누고 대화하는 친구들과의 관계와 다르기 때문이다.

혁명적 소그룹이 ‘새로운 학파’로 발전

이는 혁명적 소그룹의 세번째 특징, 임무중심적이며 문제해결기반의 목표 때문에 나타난다. 혁명적 소그룹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네트워크다. 즉, 그들은 목표를 위해서는 친밀하게 행동하지만, 목표 이외에는 느슨한 네트워크일 뿐이다. 그들은 가족도 친척도 아니며, 때로는 친구가 아닐 경우도 많다. 메타피지컬 클럽의 구성원들은 아홉 달의 토론 이후 거의 만나지도 않았고, 학문적으로 서로 극한적인 대립도 했다.

12명 내외의 비공식적 기반을 갖춘 임무중심적이고 공통의 관심사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혁명적 소그룹이 된다. 이들은 지식생산의 기본단위가 될 수는 있지만 실천조직이 되지는 않는다. 소그룹은 혁명적 사상의 씨앗이 잉태되는 장소일 뿐, 열매가 열리는 장소는 아니다. 혁명적 소그룹의 목표가 달성되면, 이들은 해체되거나 학파로 발전하기도 한다. 학파는 대학이나 연구소 등의 물리적 실체 속에서 공식적인 기반으로 작동한다. 즉, 하나의 학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이전에 혁명적 소그룹의 존재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북촌의 사랑방 그리고 혁명적 소그룹의 조건

“조선으로 눈을 돌리면, 조슈나 사쓰마의 하급무사와 같은 역할을 경상도나 전라도의 선비들이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경화세족이라 불리는 한성과 경기도 주변의 양반들은 기득권층이었으니, 기득권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경상도·전라도 양반들이 개혁에 불을 붙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다”- 문소영

대부분의 혁명적 소그룹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그들에겐 ‘공유철학’이 존재한다. 비엔나 학단은 자연과학의 통일법칙을 찾아, 이를 통해 과학적 세계 이해라는 목표를 이루려 했다. 오토 노이라트, 한스 한, 루돌프 카르납이 함께 쓴 <과학적 세계 이해: 비엔나 학단>의 마지막 문장엔 “과학적 세계 이해는 삶에 봉사하며, 삶은 그것을 받아들인다”라는 말이 쓰여 있다. 즉, 비엔나 학단은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이런 이해를 통해 인류의 삶에 봉사하려는 임무수행의 목표가 있었던 셈이다.

메타피지컬 클럽에게 그것은 미국의 정신을 찾아, 미국적 근대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클럽의 멤버들이 살던 시기의 미국은 유럽에 비해 후진적이라고 인식되고 있었으며, 당시의 미국 지식인들은 19세기말 조선과 일본의 지식인들과 비슷한 사상적 전회를 경험중이었다. 요시다 쇼인의 촌숙은 서양문물을 배워 일본을 근대국가로 만들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공유하는 소그룹이었다. 요시다에게 배운 대부분의 제자가 정계에 진출한 이유도, 이들의 목표가 막부를 청산하고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는 위대한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혁명적 소그룹은 소수로 구성되기 때문에 리더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해진다. 코펜하겐 그룹의 리더는 닐스 보어였고, 그는 젊은 물리학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원로 과학자였다. 비엔나 학단의 모리츠 쉴릭과 오토 노이라트, 로스 알라모스의 로버트 오펜하이머, 그리고 메타 피지컬 클럽의 웬델 홈스 모두 소그룹을 이끄는 리더였으나 위계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고 그룹의 구성원들과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했다. 즉, 혁명적 소그룹은 수평적 네트워크이며, 리더는 지배하지 않고 이끌 뿐이다. 소규모 네트워크에 만들어진 경직된 위계구조는 소그룹의 창조적이며 혁명적인 생각을 방해할 뿐이다. 어쩌면 한국의 정당조직이 보여주는 경직된 위계구조야말로, 한국 정치에서 혁명적인 소그룹이 탄생하지 못하는 원인일지 모른다.

혁명적 소그룹의 리더들은 대부분 공유하는 목표에 대해 강인하고 분명한 비전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런 특성은 리더에게만 보이지 않고, 소그룹의 일원 대부분이 공유하는 특징이기도 했다. 소그룹은 동기를 부여하는 교육조직이 아니라, 이미 동기가 부여된 사람들이 모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문제해결형 조직이기 때문이다. 문헌에 등장하는 요시다 쇼인은 분명 그런 리더였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혁명적 소그룹은 대부분 기존 제도에 저항하는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오래된 제도와 관습의 실패에서 등장하는 것이었고, 혁명적 소그룹은 이런 문제들을 새로운 학문적 방법론 혹은 제도적 혁명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혁명적 소그룹에 대한 홍성욱의 연구에서 드러나지 않은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건 바로 역사에 등장하는 혁명적 소그룹 대부분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과학기술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홍성욱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들, 20세기 독일의 바우하우스 음악그룹 등의 예를 통해 예술가들이 만든 혁신적 소그룹을 소개하지만, 이들의 혁신은 세상을 이해하고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혁명적이었을지 몰라도, 과학기술과 과학기술의 주변에서 탄생한 소그룹들처럼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혁명성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세상을 변화시킨 역사 속의 소그룹 대부분이 17세기 근대과학 이후에 등장하는 점도, 혁명적 소그룹과 과학기술 사이의 미묘한 상관관계를 재확인시켜주는 근거다.

명문세가 자제들이 모인 박규수의 사랑방

북촌 사랑방을 열고 개화파를 이끈 박규수(1807~1877)
북촌 사랑방을 열고 개화파를 이끈 박규수(1807~1877)

이제 눈을 돌려 19세기 말 한양 북촌에 있던 박규수의 사랑방을 생각해보자. 박규수는 세도가는 아니었으나 조선 명문가의 거족이었다. 그의 제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윤치호 등은 모두 서울 명문가의 수재들이었다. 이 중 박영효는 왕의 사위였고, 홍영식은 영의정의 자제였다. 이들은 모두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일본과 미국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고, 이들이 만든 개화당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정치그룹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요시다 촌숙은 변방의 하급 무사로 채워졌다. 이토 히로부미는 농민 출신이었다. 이런 신분 차이는 당연히 그룹의 권위적인 문화로 연결된다. 요시다 촌숙 뿐 아니라, 당시 일본은 대대적으로 배움의 기회를 하층에 개방했고, 이런 문화 속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배출한 오사카의 데키주쿠도 등장하게 됐다. 이들은 대부분 하급무사 출신이었고, 이들이 일본의 근대를 만들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모두 명문가의 자제였고, 20대의 나이에 유학은 물론 관직까지 얻은 엘리트였다. 박규수가 죽자, 개화당의 리더는 김옥균이 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은 혼자 30대로 다른 개화당 일원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다. 김옥균이 뛰어나서 리더가 되었는지, 아니면 나이가 많으니 자연스레 리더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요시다 쇼인의 촌숙은 그보다 세 살 어린 제자들을 받을 정도로 수평적 문화를 가진 소그룹이었다.

‘시대에 대한 저항’ 의식 수준이 달랐다

김옥균이 호방하고 달변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혁명적 소그룹을 이끌 정도로 근대적인 리더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변이 실패하고 그에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그 기간동안 김옥균이 후일을 위해 제자를 길렀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김옥균의 개화당은 정변이 끝나고 뿔뿔히 흩어져, 이후 한반도의 역사에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물론 개화당의 성립과정에는 ‘근대적 중인’ 오경석과 유대치 등이 참여했고, ‘개화승’ 이동인과 ‘궁녀’ 고대수 등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갑신정변의 핵심세력은 김옥균을 비롯한 북촌 사랑방의 개화당이었지만, 상당수의 중인들도 이에 동참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결코 수평적이지 않았다. 똑같은 근대를 항해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혁명적 소그룹은 이미 신분을 넘어선 협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조선은 여전히 ‘반상’의 구분에 갇혀 있었던 셈이다. 정변의 세력에게 과연 조선을 넘어서려는 태도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김옥균도, 개화당의 다른 일원들도 대부분 입헌군주제를 선호했다. 막부를 끝장내고 일본을 만들겠다던 쇼인의 촌숙과 개화당의 시대에 대한 저항 수준은 달랐다. 어쩌면 그 차이는 그들의 신분에서 기원된 것인지도 모른다.

혁명적 소그룹과 과학기술간 특별한 관계

마지막으로,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에서 등장했던 혁명적 소그룹은 대부분 과학기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후쿠자와 유키치다. 난학의 도입에서 시작된 서양의 과학기술은 메이지 시대가 되면 아래에서부터 일본사회를 근본적인 혁명으로 이끌 동력으로 성장한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과학기술의 흔적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개화당의 일원들은 모두 서양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중 누구도 과학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정변에 참여했던 변수가 유일하게 미국으로 도망쳐 농학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그의 실천은 조선에 전해지지 않았다.

요시다의 촌숙은 메이지 유신의 상징으로 보존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고, 박규수의 사랑방은 사라져 지금 그 자리는 헌법재판소 뒷마당으로 변했다. 근대적 여명기, 조선과 일본에 등장했던 소그룹의 혁명성은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씨앗이 되었다. 망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우리가 반드시 직시해야 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문소영의 책 <조선의 못난 개항>의 부제는 ‘일본은 어떻게 개항에 성공했고 조선은 왜 실패했나’로 되어있다⁠. 이 책에서 문소영은 일본 개화기의 하급무사들과 그들이 만든 소그룹의 부재를 한탄하며, 경화세족이라 불리던 한성과 경기도 주변의 양반이 아니라, 경상도나 전라도의 주변부 양반들이 그 역할을 했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상상한다. 그는 또 갑신정변과 같은해 일어난 전주의 동학농민운동세력에게서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곧 포기한다.

“또는 1894년 전라도와 충청도의 동학농민운동세력들을 일본의 하급무사들에 대입시켜보기도 했다. 유학자들이나 농민운동세력들은 일본의 존왕양이파들과 똑같이 외세배격을 부르짖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역의 양반이나 동학농민운동세력들이 조선 개화의 주도세력이 되기에는 서구 열강의 현실이나 아시아의 위기에 대해 너무 몰랐다.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그래서 조슈나 사쓰마의 존왕양이파처럼 서양을 직접 경험한 뒤 사고의 한계를 스스로 깨고 나가는 과정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16세기부터 ‘주자학’과 ‘소중화사상’에 함몰되었던 조선의 한계였다. 조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식한 오랑캐 나라인데 외부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조선의 선비나 농민들이 고수하고 있던 사상으로는 당대의 세계를 해석할 수도, 조선을 변혁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우리는 개화당과 같은 시기, 조선의 개혁을 요구했던 동학농민운동이 왜 조선 근대화의 씨앗이 될 수 없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동학의 실패야말로, 조선을 넘어 한국에서까지 과학기술의 근대화가 지연된 한국문화의 특유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글쓴이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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