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호랑이 길들이기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서’] 폭력 피해자들이 공포를 이겨내려면 영화심리치료의 역할은 ‘상상력 근육 키우기’
몇 개월간 사귀다가 헤어진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가 계속해서 폭탄 문자를 보내거나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필자도 대학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교감이 없는 사람에게서 구구절절한 심정을 담은 편지를 계속 받아야 하고, 원치 않는 시집을 받아야 할 때, 심지어는 예상치 않은 장소에서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낼 때 당하는 사람의 심리는 어떨까. 피해자는 남성일 수도 여성일 수도 있지만, 공포심이나 불안감은 극심할 수밖에 없다. 직접 물리적인 폭력을 휘두르지 않아도, 언어처럼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 폭력도 충격이 만만치 않다.

좋은 폭력은 없다
‘폭력’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는 영화감독이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다. 그는 폭력의 영화적 재현에 관심이 많았다. 하네케 감독은 할리우드 영화 방식의 폭력 재현은 옳지 않다고 판단해 그와는 차별되는 자신의 독특한 영화 세계를 구축했다. 나쁜 폭력을 좋은 폭력이 징벌하는 권선징악 식의 할리우드 영화는 관객에게 카타르시스와 만족감을 선사할지 모르지만, 그런 식의 표현은 폭력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네케 감독은 생각한다.
그는 폭력의 무자비함과 잔혹함을 그대로 폭로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하네케 감독 영화에서 폭력을 피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영화적 시공간에서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숨이 막히고 고통스럽다.
1997년에 발표한 <퍼니게임>은 중산층 가정의 별장에 침입한 두 청년이 한 치의 관용도 없이 한 가족에게 행사하는 끔찍한 폭력을 보여준다. 제목처럼 그들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이 가족을 농락하다가 결국에는 모두 살해한다. 그리고 태연스럽게 옆집으로 이동한다. 보안장치를 갖춘 별장에서 어떻게 쉽게 침입자들을 허락하게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영화를 보면 물에 잉크가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순간적인 폭력을 방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침입이 일어난다.
그리고 다음 순간부터 평화로운 휴양지에 세워진 아름다운 집은 지옥으로 변한다. 침입자들에게는 어떤 동기도 목적도 없다. 굳이 동기를 따진다면, 타인을 희생해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폭력은 상대가 방어할 틈도 주지 않고 비집고 들어가 대상을 무력화시키고 피해자의 자존감을 땅에 떨어뜨리며, 극단적인 공포감으로 몰고 간다.
폭력을 전면적으로 만난다면
폭력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예술치료를 진행한 적이 있다. 경찰서에서 피해자들을 위해 마련한 후속 프로그램인데 내담자들은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스토킹을 당한 피해자들로 사례가 다양하다.
예술치료는 언어를 통해 내담자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상담과는 다르다. 내담자는 예술매체에 자신의 현재 심리상태가 어떤지 투사하고, 상담자는 분석을 통해 심리를 파악한다. 상담이나 치료 방식들은 모두 장단점이 있다. 그래서 어떤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내담자에게 더 맞는 방식을 찾을 뿐이다.
예술 매체를 통해 현재 심리상태를 파악하는 방식의 장점 중 하나는 안전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담자가 직접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부담을 피해 영화 속 캐릭터에 투사하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심리상태가 어떤지 상담자에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담자들은 대인기피증, 불안증, 무력증 등 다양한 증상을 가지고 있다. 참여동기를 물었을 때, “힘이 생겼으면 좋겠어요”라든가 “화를 조절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타인들과 만나는 것을 꺼려하면서도 타인들과의 교제를 동시에 그리워한다. 자신을 스스로 만든 울타리 안에 가둬놓으면서도 한편 그 고통으로부터 탈출을 꿈꾼다.
탈출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마음의 근력이 필요하다. 내담자들은 그림과 영화 같은 예술 매체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인식하게 된다. 자기 인식이 첫 단계다. 분위기는 대체로 밝게 진행된다.
그 당시 즐겨 사용했던 영상 매체 중 하나는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영화였다. 영화 치료는 영화 한편을 모두 감상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대략 20분 정도로 편집한 파일을 사용한다. 영화의 주제와는 큰 상관이 없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안 감독이 만든 영화로 동명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 안의 힘을 끌어내도록 돕는데 초점이 맞춰진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가족이 선박으로 캐나다로 이동하는 과정 중 풍랑을 맞은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가족과 다른 동물들이 모두 죽고, 구명보트에 호랑이 한 마리와 주인공인 파이 둘만 남게 된다. 크지도 않은 구명보트에 호랑이와 사람이 공존하는 환경이 상상되는가. 망망대해에서 먹을 것도 없는 상태로 몇날 며칠을 버티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굶주린 호랑이의 눈빛과 마주 대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파이는 자신이 호랑이한테 먹히지 않기 위해 손도끼를 움켜쥐고 언제든지 내려칠 눈빛으로 경계하는 한편, 열심히 물고기를 잡아서 호랑이에게 먹인다.
호랑이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음에도 파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보조 구명장치에 의지한 채 바다 위에 떠있는 파이를 쳐다보는 호랑이의 눈빛과 구명보트 안에서 손도끼를 쳐들고 호랑이를 쳐다보는 파이의 눈빛이 강렬하게 부딪히는 장면이 있다. 손을 내리치는 순간 호랑이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결국 죽게 될 것이지만 파이는 차마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호랑이는 또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파이에게 있어 호랑이와의 공존은 호랑이가 존재함으로써 공포감과 긴장감을 유지하여 생존력을 극대화할 수 있고, 호랑이를 돌봄으로써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호랑이는 파이에게 자신의 생존 의지를 지탱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내 앞에 있는 공포의 대상을 의식하는 한편, 상대를 돌보면서 나를 인식하게 되는 힘의 원천이 된다.
폭력과 공포를 이기는 힘은 어디서 오나
거의 죽기 직전에 가까스로 해류에 밀려 배는 어느 해안에 접안하게 되는데, 배에서 뛰어내린 호랑이는 숲을 향해 걸어간다.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호랑이는 한동안 숲을 응시한다. 마치 숲으로 들어가기 위한 결심을 굳히는 것처럼. 백사장에 쓰러진 채 이 모습을 지켜보던 파이는 호랑이가 헤어지기 직전에 한번쯤은 뒤돌아보며 그동안 돌봐준 자신에게 작별인사를 고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호랑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숲으로 사라진다.
한편, 원주민에 의해 구조된 파이는 숲을 바라보며 절규에 가까운 눈물을 흘린다. 그 공포의 대상이, 자신이 목숨 걸고 보살펴 준 호랑이가 미련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에 가슴이 저려 왔기 때문이다.
파이가 호랑이를 경계하면서 생존전략을 펼치는 장면을 편집해 내담자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을 고르게 한 후, 자신에게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지 살피게 했다. 그리고 영화에서 파이가 그랬듯이 어떤 생존법을 만들 것인지 생각하도록 했다. 파이에게 호랑이가 경계해야 할 상대였던 것처럼 내담자들에게는 호랑이를 자신 내부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 극복하고 싶은 심리상태로 인식하도록 도운다. 그들이 고른 공간이 바다 위에 있는 구명보트라고 상상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충분히 빠져들게 시간적인 여유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내담자들은 각각 자신의 과거 트라우마를 떠올리거나, 주변 시선에 대한 두려움,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두려움을 표현했다. 그들이 구명보트 안에서 자신들이 가진 부정적인 감정과 대면하면서 영화에서 파이가 절대절명의 순간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열심히 생존책자를 만들었듯이 자신만의 책자를 만들도록 한다. 예술매체를 통한 치료는 상상력이 자신 안에 발현되지 않은 마음의 근력을 찾게 돕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파이의 마지막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파커(호랑이)가 없었으면 난 죽었을 것이다. 난 파커의 친구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무심히 가버린 파커가 야속해서 가슴이 아팠다. 생사를 같이 했는데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삶이란 그런 거다.”
공포란, 트라우마란 그런 것이다. 공포는 내게 위협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내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힘의 원천임을 깨닫는다면 과히 나쁜 현상이 아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