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의 좌절, 과학기술 근대화의 ‘기회 상실’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⑨서학의 종교적 수용과 과학기술 근대화의 지연
“과학과 기술은 오늘을 움직이고 있는 원동력이다. 그것은 근대산업의 근본이 되고 있는 산업경제의 힘일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의 사상계까지를 지배해 온 힘이기도 하다. ‘근대화’란 말이 ‘서구화’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여지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비서구세계 국가들이 서구의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부분에서 사회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박성래
성호학파의 서학 수용...과학기술 근대화의 ‘기회’
금장태는 조선시대의 사상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조선시대의 사상적 특징은 16세기 말까지의 조선전기가 대체로 주자학의 ‘도학’(道學)을 정착시켜가는 단계라면, 17세기부터 시작되는 조선후기는 ‘도학’이 정통이념으로 확고하게 정립되지만, 다른 한편에서 양명학의 ‘심학’(心學)이 수용되고 서양의 과학지식과 천주교 신앙을 포함하는 ‘서학’(西學)이 전래됐으며, ‘도학’의 이념적 전통과 달리 현실제도의 개혁과 실용적 방법을 추구하는 ‘실학’(實學)이 등장해 사상적 동요가 일어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금장태는 조선후기 사상사를 ‘도학-실학’의 두 흐름으로 서술해 온 시각의 문제를 지적하고, ‘서학’이야말로 ‘실학’의 전개과정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도학’의 주류와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점을 들었다. 따라서 조선후기 사상사는 ‘도학-서학’의 대립관계와 ‘실학-서학’의 영향관계가 얽혀 있는 복합구조라고 주장한다. 그는 “‘서학’은 조선후기 사상사의 주변적 사건 수준이 아니라, 조선후기 사상사를 형성하는 기본요소의 하나요,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가장 활성적 요인의 하나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조선서학’은 조선후기 사상사의 핵심적 과제가 된다. ‘조선서학’은 ‘과학기술’과 ‘신앙’이라는 두 요인 사이에서 전개됐다. 이 맥락 속에서 서학을 파악할 때 우리는 조선의 근대화가 뒤처진 이유를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6세기말 전파된 ‘서학’...그리고 긍정적 반응
서학은 16세기말 중국을 통해 조선에 처음 전파됐다. 중국에 서학을 가져온 이들은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신앙을 ‘양날개’로 삼아 서학을 중국에 확산시키는데 성공했다. 1577년 마테오 리치가 아시아로 향하던 시기에 서양은 아직 근대과학이 무르익기 전이었다. 선교사들이 과학서적을 들고 들어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유럽에서는 종교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이 대립하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현재적 시각에서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들이 서학을 종교와 과학으로 뚜렷하게 구분해 바라보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조선후기 유교사회에서 ‘유교’와 ‘서학’은 400여년이나 함께 했으며, 조선후기 100년 동안은 격렬하게 부딪쳤다. 그 갈등의 단초는 조선에 전래된 서학의 종교적 특성 때문이었지, 과학적 특성 때문이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에 전래된 서학이 전통사회에 미친 영향을 종교와 과학이라는 두 날개로 구분하는 방식은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
17세기 초 이수광이 서학을 서양문물과 천주교 교리의 혼합물로 조선에 소개한 이후, 150년이 지나서야 성호 이익이 서학의 서양 과학기술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단계로 이행한다. 이익의 성호학파는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일찍이 없었던 것, 중국이 미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학문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 반면,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의 종교와 윤리에 관한 학설은 자신이 믿는 바가 아니며 이단의 문자가 분명하다고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구만옥, “조선후기 西學 수용과 배척의 논리”).
18세기 후반 성호학파 학자들은 서양 과학기술의 학문적 우수성과 실용성을 긍정했고, 이를 바탕으로 서학에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 특히 이익은 서학의 천문역법에 큰 관심을 보여 중국의 역법을 넘어선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익은 개방적 태도를 학문하는 이의 자세로 여겼고, 이러한 그의 철학은 성호학파의 서학에 대한 열린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호학파의 학자들중 일부는 천주교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탐구했다. 이익과 그의 제자들은 이단의 학설을 믿는다는 비방을 듣기도 했다. 성호학파의 인물들은 서학에 내재된 천주교가 유교 중심국가인 조선에 주는 이질감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위험성에 대해서도 간파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맥락 속에서 안정복은 <천학문답>으로 천주교를 비판했고, 이익의 조카 이삼환은 <양학변>을 저술했다. 서학을 받아들인 성호학파가 천주교가 아닌 과학기술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구만옥은 성호학파의 서학 수용론의 네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서학(=西器)과 西敎(=天學)를 분리하였다. 둘째, 서양 과학기술의 학문적 우수성과 실용성을 긍정하였다. 셋째, 개방적 학문자세를 바탕으로 이단의 학설에 대한 선별적 수용론을 제기했다. 넷째, 천주교를 비롯한 이단의 학설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탐구하였다(구만옥, “조선후기 西學 수용과 배척의 논리”)”
이처럼 성호학파가 천주교를 탐구한 것은, 그들의 개방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지, 천주교에 대한 호의는 아니었다. 당시 왕이었던 정조는 이런 성호학파의 서학에 대한 탐구를 가로막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서학에 우호적이지 않았는데, 이들 대부분은 서학이 아니라 서교, 즉 천주교의 교리 때문이었다. 반면 정조와 성호학파의 지식인들은 서학에서 서양 과학기술과 천주교를 분리해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개혁군주’ 정조는 그런 관점에서 정책을 추진하려 했지만, 천주교는 점점 확산되어갔고 보수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척사론’이 고조되고 있었다.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정조는 과학기술을 경학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았고, 반드시 진흥시켜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정조대의 과학기술적 관심은 과학기술상으로 획기적인 성과를 이루거나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큰 변화를 야기하는 단계로 발전하지도 못했다(노대환, “정조대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과 정조의 서학 정책”)”
천주교 박해에 위축된 과학기술
“서구 문물로서 서학은 실제적으로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천주교라는 서양의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서구의 과학과 기술이다… 실학자들은 서학을 나름대로 비판하면서 깊이 있게 연구하였으나 후에는 천주교 교리에 대한 연구에 치우치게 되었다. 그래서 실학자들 중에 천주교신자가 나오게 되었고, 그 세를 확장해 나가다가 ‘진산 사건’이 일어나면서 대부분의 지도층이 천주교와의 관계를 끊게 되고 서학에 대한 연구도 중단된다. 이후 천주교는 강력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신행철, “서학에 대한 후기 조선 지식인들의 대응- 진산사건에 관련하여-“).”
성호학파와 정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인 계열은 서학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1791년 정약용의 내종사촌이자,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은 모친상을 맞아 상복을 불태우고 조상의 위패까지 모두 없애버린다. 흔히 ‘진산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로, 남인들은 천주교를 박해할 명분을 갖게 되고, 정조 또한 채제공의 간언을 받아들여 윤지충을 참수하고 이승훈, 권일신, 이기경 등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해 문초한다. ‘신해박해’다. 이를 계기로 서학수용에 적극적이던 성호학파 또한 위축되기 시작한다.
진산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천주교를 엄금하고, 서학서를 모두 금지한다. 비록 성호학파가 서학의 수용에서 과학기술의 장점만을 취하려 했다고 해도, 그들은 유학자라는 한계를 가진 지식인이었다. 유학은 종교와 학문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는 태도를 지녔고, 따라서 서학을 받아들인 대다수의 학자들은 천주교를 과학기술과 같은 수준에서 연구하고 비판했다. 따라서 “단지 ‘속된 것’으로 남아 조선사회 속에서 계속 존재하며 연구될 수 있었던 과학 기술로서의 서학은, ‘성스러운 것’을 침해한 누명을 천주교와 같이 덮어쓰게 되었다(신행철, “서학에 대한 후기 조선 지식인들의 대응-진산사건에 관련하여”)”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나선다. 당시 조선의 정치적 지형은 복잡했고, 그나마 이를 조율하던 정조의 죽음으로 정치적 혼란은 가중됐다. 1801년 시작된 신유박해는 이런 정치적 배경 속에서 천주교를 빌미로 상대방 정치세력을 말살하려던 기획이었다. 이미 진산사건으로 불리한 지형에 놓여 있던 천주교 세력은 경주 김씨와 벽파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제거당했다.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도 모두 고문을 받고 귀양길에 오른다. 영화 <자산어보>는 바로 이 당시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집권세력은 천주교 탄압을 매우 효과적인 정치적 도구로 사용했다. 특히 정적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를 비롯한 서학 전체를 이단의 학설로 몰기 시작했으며, 이는 당시 천주교를 받아들인 민중들의 저항 움직임을 억누르는 기제로도 작동했다(변주승, “신유박해의 정치적 배경”).
소중했던 ‘기회’는 사라지고
천주교에 대한 공격이 격화하면서 서양 과학기술의 학문적 우수성과 실용성에 대한 논의 또한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18세기 후반 이후 서학은 척사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아가 19세기에 서양의 과학기술은 그 우수성마저 부정당했다. 예를 들어 위정척사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인 이항로와 김평묵 등은 서학이 불교나 도교처럼 유학의 진리를 어지럽히는 폐해를 유발했다고 비판하고, 나아가 서양의 과학기술 또한 ‘금수나 벌레의 편벽된 기술’이라고 폄하했다.
흥미로운 점은, 서양의 과학을 무시했던 김평묵조차 서양 오랑캐가 ‘기예’에는 능한 측면이 있다고 인정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는 서양 오랑캐는 한 가지 재주를 가졌을 뿐, 우주의 원리와 사람과 사물을 안정되게 하는 일에는 무지하다고 혹평했다(구만옥, “조선후기 西學 수용과 배척의 논리”).
개혁군주 정조가 통치하던 18세기 후반의 조선은, 국가적 차원에서 과학기술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품은 중요한 역사적 시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은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압살됐다(펑웨이, “조선 西學 발전에 미친 신유박해의 영향”).”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에는 조선 후기에 벌어진 천주교 탄압과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가 주요한 시대적 배경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시기에 조선은 과학기술을 국가의 원동력으로 받아들일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고, 그 기회는 과학기술과 함께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천주교에 대한 정치적 탄압 때문에 좌절됐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진산사건을 계기로 양반 계급에 주로 퍼져있던 천주교가 중인과 양인으로 번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의 봉건적인 압제와 차별 속에서 유교적 질서는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였던 반면, 유교적 질서와 사회 규범의 압박 속에서 고통 받던 하층민들에게 천주교는 내세에 얻게 될 희망을 전해주는 이론으로 진화하고 있었다(펑웨이, “조선 西學 발전에 미친 신유박해의 영향”).
조선의 19세기는 서학에 대한 탄압으로 시작됐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과학기술에 대한 탄압으로 전이됐고, 정치권력을 얻는데 혈안이 된 정치인들에게 그 둘은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서양에서 들여온 것은 나쁜 것’이라는 위정척사운동은 조선의 모든 계층으로 퍼져나갔다. 금장태는 조선 후기에 벌어진 유교와 서학의 만남을 이렇게 요약한다.
“유교와 서학의 만남에서 상호 이해와 교류의 조화로운 모습은 초기에 잠시 비쳤을 뿐이고, 대부분의 기간 동안 탄압과 잠복, 배척과 저항의 격렬한 대결구조로 이어져 왔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는 얕은 수준에 머물었으며 독선과 힘에 의한 적대적 공방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토착기반을 지닌 유교전통이 여지없이 붕괴하고 외래의 종교문화로서 서학이 확고하게 승세를 잡는 양상으로 근대화의 대세가 방향을 잡아갔다(금장태, “조선서학의 전개와 과제”)”
간신히 살아남은 과학기술, 80년을 기다리다
민중 속으로 스며들어간 ‘조선서학’의 반쪽 천주교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대안과는 멀어졌고, 개인적 구원과 내세신앙에 기울어졌다. 천주교가 조선에 던진 파장은 이후 100년 동안 조선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특히 민중 속으로 숨어들어간 천주교는 서학의 문제에 자극을 받은 최제우에게 ‘동학사상’의 씨앗을 뿌렸다. 신행철은 서학에 대응했던 조선후기 지식인들에 대한 논문의 결론에서 서구의 과학문명을 인지하고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그들의 한계를 이렇게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당시 실학자들을 포함하는 지식인들이 종교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서구의 과학문명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능동적으로 추구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조선사회의 근대화는 훨씬 지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신행철, “서학에 대한 후기 조선 지식인들의 대응- 진산사건에 관련하여-“).”
금장태의 지적처럼 서학의 이름으로 과학기술과 함께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는 ‘조선서학’의 이름으로 “사회적 모순의 해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 무리한 방법을 추구하다가 반국가적 성격을 드러내고 외세의 내응세력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서학의 수용에서 드러난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종교적 편향성은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유교의 도덕형이상학이 지닌 한계를 그대로 노정한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으로 더불어 위축됐던 과학기술은 실학의 학문 체계에 기여하며 살아남았지만, 이후 80여년이 지나 개화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전까지 조선사회의 주류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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