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은 왜 조선의 패망을 못막았나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⑩기학, 동학, 그리고 과학-영성에 좌절된 한국과학기술의 씨앗

최한기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일지 몰라도 과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사상을 과학사상으로 불러야 할지도 미지수다. 그는 여전히 유교적 질서에 사로잡혀 있었다.
최한기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일지 몰라도 과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사상을 과학사상으로 불러야 할지도 미지수다. 그는 여전히 유교적 질서에 사로잡혀 있었다.

최한기의 과학기술 수용과 그 한계

“18세기 중반 서구 천문학과 수학에 가장 깊은 소양을 보인 인물이었던 홍대용이었다...홍대용은 관측과 계산의 전문적 연구 활동을 수행한 과학자라기보다는 서구 과학의 대체적 특징을 파악하고 지구설 등 서구 과학 지식이 지닌 세계관적 함의에 천착한 ‘과학사상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박성래의 눈에는 홍대용이 훗날 근대 한국이 서구과학에 대한 교양 수준의 이해를 넘어 ‘전문적’ 과학기술의 수용에 실패하게 될 전조이기도 했다. 홍대용은 19세기 말 이래 서구 과학 지식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고 과학이 국가의 부강에 중요하므로 적극 진흥해야 한다는 인식도 널리 확산되었지만, 정작 과학기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하는 과학기술자 집단의 양성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요컨대 전문화 없는 아마추어적인 근대 과학기술의 수용이었다는 것이다.” -임종태, “과학사 학계는 왜 실학을 저평가해 왔는가?”

논문 “천주교가 조선 후기 사상사에 끼친 영향”에서 윤사순은 이미 15세기부터 시작된 서양인들의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해 각 민족과 국가들이 하나의 ‘세계’로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지만, 조선이 유독 그 세계와의 관계를 맺는데 순탄하지 않았던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번째 이유는 서양 세력의 팽창 정책이다. 천주교를 앞세워 동양에 진출한 서양세력은 동아시아 3국 모두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조선이 내부에서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 방안’을 확립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천주교와 유교의 이념이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서학 전래 초기에 과학기술에 우호적이었던 노력조차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윤사순은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구미 주도의 과학기술 세계의 진입에 뒤떨어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신유박해 이후 위정척사파가 정치적 파벌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고, 천주교는 민중 속으로 숨어들어가 점점 세력을 키웠다. 비록 서학에 대한 탄압이 19세기 초반부터 80년 동안 지속됐지만, 이 시기에도 시대적 조류를 거스르며 위정척사와 쇄국을 비판하며 서학의 수용을 강조한 지식인은 존재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최한기, 이규경, 홍대용 등이 거론된다.

이들 세 명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지식인은 아니다. 홍대용은 1731년, 이규경은 1788년, 최한기는 1803년 태어났다. 조선후기에 활동했던 이들의 공통점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던 사상가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홍대용과 최한기는 과학과 종교를 완전히 분리하고 서양의 종교에는 무관심한 상태에서 서양의 우주관을 전통적 우주관과 통합시키려던 과학사상가의 면모를 보였다.

이들은 서학을 과학의 관심 때문에 받아들였다가 결국 천주교의 교리에 빠진 다산 정약용과 대립된다. 신행철의 논문 ‘서학에 대한 후기 조선 지식인들의 대응’에 따르면 다산이 진산사건 즈음에 올린 상소에서 자신은 서양과학에 대한 흥미에서 서학에 접근했을 뿐, 천주교리에 대해서는 깊이 살피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거짓이다. 다산은 제사폐지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 천주교의 독실한 신자였다. 이는 다산이 얼마나 유교적 세계질서에 깊이 빠져있던 전통적인 유학자였는지를 보여준다.

역사학계와 과학사학계의 ‘이견’

20세기 후반 역사학계는 실학에 대한 활발한 연구활동을 펼쳤고, 홍대용, 이규경, 최한기 등의 인물들도 그런 작업 속에서 재발견됐다. 이런 사조의 기저에는 망국으로 이어진 조선후기의 역사에서 근대화의 씨앗을 찾으려는 의도가 녹아 있었고 특히, 근대화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과학기술 수용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역사학계가 발굴한 인물들이 바로 이 세 사람이었다. 하지만 과학사학계는 이런 경향에 회의적이었다. 한국 과학사학의 1세대인 전상운, 박성래, 김영식은 모두 실학자들의 과학기술을 저평가하거나, 역사학계가 주장하는 것만큼 그들의 사상이 근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임종태는 ‘과학사 학계는 왜 실학을 저평가해 왔는가?’ 라는 논문에서 이 세 학자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실학자들은 외래의 과학을 주체적으로 소화하는데 실패했고(전상운의 주장), 그들이 보유한 서구 과학기술 지식은 동시대 일본, 중국의 수준에 비해 현격히 낮았으며(박성래), 그들의 사상은 주자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전근대 사유의 범위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했다(김영식)”

최한기의 도덕형이상학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실천철학

이들 중 19세기에 태어나 개항을 경험했던 최한기의 과학사상은 2000년대 들어 역사학계에 광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도올 김용옥은 최한기를 대중화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도올은 2004년 출판된 <혜강 최한기와 유교>에서 혜강 연구에 걸려 있는 세 가지 문제를 거론한다.

첫번째는 최한기에 대한 연구가 북한에서 시작되었고, 남한에서는 여전히 초기단계라는 점이다. 즉, 최한기라는 인물이 지금처럼 학계와 대중에 회자되기 시작한 건 불과 20년이 못된다. 두번째는 최한기의 학문을 실학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다. 김용옥은 1990년 <독기학설>에서 실학이라는 개념이 근원적으로 성립불가능하다고 주장한 학자다. 실학자들이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학문을 일컫지 않았다는 것이 도올의 핵심적인 주장인데, 도올의 주장은 이미 역사학계에서도 충분히 논의되어 있는 것으로 별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세번째는 혜강 철학의 이해에 걸림돌이 되는 필로로기(philologie)의 문제다. 이런 문제는, 고전학자인 도올에게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혜강의 과학사상이 한국 근대과학의 성립과 어떤 연관관계에 있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적들이다.

김선희는 ‘19세기 지식장의 변동과 문명의식: 홍한주, 이규경, 최한기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19세기 지식장의 변동 속에서 최한기의 사상을 검토하면서, 우선 최한기가 특별한 사승 관계없이 스스로 터득한 학문으로 독자적인 체계의 학문을 쌓아올렸다고 지적한다. 최한기는 평생 재야학자로 살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장서가이자 독서가였고, 책을 사느라 가산을 탕진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런 독서중독자 최한기의 눈에 들어온 서적들중 가장 그의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서양과학서들이었다. 최한기는 실용적 차원에서 이익이 있을 만한 것이라면,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히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진흥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최한기는 보편학으로서 ‘기학’을 구성하려 했다. 그의 학문체계 속에서 기학은 가장 상위 체계에 놓이며, 그 아래에 서양 과학이 분과 학문으로 배치된다. 하지만 그의 기획은 당대에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고 그의 서양과학수용은 구체적인 과학분야나 일상생활에 적용되지 않고, 추상적인 사상으로 집약됐다. 김선희는 최한기의 기학이 내놓은 결과를 이렇게 요약한다.

“중화를 초월한 새로운 문명의식이 담긴 그의 기학은 당대에 인정받지 못했고 활용되지 못했다. 그의 학문 지향은 지나치게 호한했고 구체적인 실증을 위해 그토록 매진했던 서양 과학 이론은 동아시아의 지식과 모호한 형태로 절충되면서 그 맥락을 이탈해 버렸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중국, 서양, 조선간 당장의 경쟁과 갈등이 자연스럽게 일통의 상태로 수렴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의 낙관적 보편 문명의 구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돌파력과 설득의 논리는 충분히 계발되거나 제안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규경과 최한기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서양의 과학기술을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들은 모두 후대에 영향을 미치는 지식의 토대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들의 진정한 관심과 학문의 목적은 조선이라는 전통적 문명세계를 보존하는 것이었고, 이들에게 공자는 초역사적이고 초시간적인 이념으로 여전히 우뚝 서 있었다.

서양어 번역에 몰두했던 니시 아마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서학이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지식인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임태홍은 당대를 살았던 최한기와 니시 아마네의 실학을 비교하면서 둘을 가르는 방법론적 차이를 지목한다.

임태홍의 논문 ‘사상: 근대 전환시기 최한기와 니시 아마네의 학문관 비교’에 따르면 최한기의 ‘기학(氣學)’은 거대한 사상체계를 구축하려 한 반면, 니시의 ‘양학’은 새로운 학문 체계의 구축보다는 서구 문명의 사상과 학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전달하려 했다. 니시 아마네가 서양어 번역에 특히 힘을 쓴 이유가 바로 그런 의지의 반영이었다. 니시 아마네를 통해 서양학문의 인식적 난제들은 그대로 일본에 이식됐지만 , 최한기의 학문은 그 모호하고 비약적이었다(김성근, 니시 아마네와 최한기의 ‘학역(學域)’과 근대학문의 구상’에서).

현재 사용하는 대부분의 학술어가 니시 아마네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철저히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웠어야 할 시기에 조선의 재야 사상가는 그런 시대와 조우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결국 사상적으로 단절되어버릴 형이상학의 구성에 온 힘을 쏟았다. 최한기의 사상은 한국의 근대학문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서학에서 종교를 완전히 분리하고 과학의 영역에만 관심을 기울인 최한기였지만, 그 역시 유교의 도덕형이상학에 갇혀 있었고 조선에 과학을 이식하지 못했다.

이능화, 근대화 대신에 토착 종교 연구로

일본의 동양철학자 사사키 슌스케는 바로 이 시기에 일본과 한국에서 실학이 어떻게 근대화됐는지를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능화(李能和)를 통해 분석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일본과 한국에서 진행된 근대화의 과정에서 실학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벌어진 과학과 종교의 영향력이 향후 두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갈랐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는 논문의 결론을 이렇게 요약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종래의 동아시아적 세계관과 결별하고 서양의 과학사상에서 태어난 기계론적 세계관에 기초했다. 한편 이능화는 동아시아에서의 ‘실학’의 고증학적·절충학적 태도를 계승하면서 새롭게 접촉한 서양문명을 의미지었다고 할 수 있다.”-사사키 슌스케·카타오카 류 “일본과 한국에서의 ‘실학’의 근대화”

니시 아마네는 최한기보다 28세 아래로, 서양의 번역에 힘쓴 계몽가다.
니시 아마네는 최한기보다 28세 아래로, 서양의 번역에 힘쓴 계몽가다.

사사키는 매우 순화된 표현으로 말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보다 무려 한 세대 늦은 1869년에 태어난 이능화는 ‘무능거사’로 불리던 인물로, 일제침략기에 한국의 모든 종교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조선이 망하고 개항 이후 근대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이능화가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물리학이 아니라 종교, 그것도 고대 신교였다. 이미 한 세대 전에 일본에서 후쿠자와는 유교적 세계관을 과학적 세계관으로 변용하며 그의 독특한 실천철학을 통해 메이지 유신을 이끌고 있었지만, 망국을 경험한 이능화는 아직도 토착 종교의 연구를 근대화로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런 연구조차 친일행적으로 얼룩져 있다.

후쿠자와의 실학은 과학에 의해 근대화되었고, 이능화의 실학은 종교에 의해 전근대로 퇴행했다. 이능화보다 두 세대 전에 최한기가 서양과학을 두루 섭렵하고 주체적인 과학사상을 출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망국 조선의 실학은 과학이 아닌 종교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동학의 탄생과 서학에 대한 저항

얼마전 도올 김용옥은 동학혁명국가기념일 3주년을 기념해 <동학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 글은 “동학은 전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평화를 향한 민중의 갈망입니다”로 시작해서 “봄은 오고 있습니다”로 끝난다. 한국의 미래를 말하는 이 선언문 어디에도 과학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도올의 동학사상에 영향을 받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대동세상을 꿈꾸던 동학혁명의 가치를 자주 언급하며, 일본군의 캐틀링건에 몰살당한 우금치 전투의 패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과학기술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재명 후보는 일본과의 소부장 사태에서도 이를 독립전쟁에 비유하며 비슷한 철학을 드러낸다. 19세기 말, 조선에 필요했던 사상을 21세기 한국의 대통령 후보에게서 발견하는 느낌은 기묘하다.(나중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과학기술중심주의가 어떻게 제국주의적 사상으로 발전하는지를 다루면서 이야기하겠지만, 과학기술을 지나치게 국가경쟁력의 차원에서 다루는 태도는 20세기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 논리에 빠질 위험이 크다. 과학기술에 대한 한국 정치지도자의 논리는 좀 더 정교하고 수준이 높아야 한다.)

동학은 조선후기 체제의 모순을 혁파하기 위한 민중운동이었다고 오수창은 ‘조선후기 체제인식과 민중운동 試論’에서 주장한다. 오수창은 당시 조선의 민중들이 양반이라는 귀족 계급에 맞서기 위해 이념이 필요했고, 천주교와 동학은 모두 이런 민중의 필요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말한다. 혼란스럽던 조선후기의 민중을 생각하면, 민중이 서학에서 과학기술이 아니라 천주교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동학이 발생한 시기는 1860년 ‘철종 시대’였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천주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에서 박해를 당하며 민중 속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수운 최제우는 최한기보다 23년 늦고 후쿠자와 유키치보다 12년 이른 1824년 경상도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했던 인물이다. 그는 신비체험 이후 동학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민중에 유행하던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한 안티테제로 창시한 종교에 ‘동학’이라는 이름을 붙혔다.

도올의 말처럼 수운은 천주교의 초월적 독재자 천주가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고 생각했고, 이를 ‘인내천’ 사상으로 뒤집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동학 교도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에 위협을 느낀 조선 정부가 최제우를 처형한 이유는, 그가 ‘서학’을 전파한 인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었다. 임상욱의 논문 ‘동학의 정체성 형성과정에 미친 서학의 영향:동학의 성장과 몰락’에 따르면 당시 조선왕조의 눈에 동학 교도들은 천주교의 한 분파쯤으로 보였던 것이다. 교주가 시해당하고 나서 동학은 기존의 사회질서, 즉 조선의 봉건적 제도와 충돌하며 성장해나간다.

하지만 천주교와 함께 민중종교로 성장하던 동학은 외세에 대한 반발을 그 이념의 중요한 가치로 삼으면서, 반외세운동에 천주교를 포함시켰다. 반대로 천주교 세력은 동학을 미신이나 이교로 단정하고 그들을 폭도로 비하했다. 동학처럼 반외세운동을 벌인 기득권의 위정척사운동은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동학을 탄압했다.(박대길, “동학농민혁명 이전 천주교와 동학의 상호 인식”)

19세기 조선사회는 무너져가는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그 어떤 통일된 대안이념을 찾지 못한 채, 귀족과 귀족이 ‘개화파 대 위정척사파’, 귀족과 민중이 ‘기득권 대 민중종교’, 민중 대 민중이 ‘천주교 대 동학’으로 각각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의 모순을 간파하고 변화를 추구해야할 지식인들은 대부분 유랑지식인이 되거나 재야에 파묻혀 있었다. 이들 유랑지식인은 19세기 근대화에 실패하고 망국을 향해 가던 조선에서 피어난 작은 희망이었지만 그들에게 과학기술은 너무나 먼 지식이었다.(윤병철 논문 “조선후기 유랑지식인의 사회사적 의미”, 장영민 논문 “유랑지식인과 사회변혁운동”)

도올은 동학정신을 구현할 정치인으로 이재명 후보를 꼽았고, 이재명 후보는 자주 동학과 대동사상에 대해 언급한다.
도올은 동학정신을 구현할 정치인으로 이재명 후보를 꼽았고, 이재명 후보는 자주 동학과 대동사상에 대해 언급한다.

‘영성’ 중심적 세계관, 그리고 겨우 피어난 과학의 씨앗

도올은 동학혁명에서 한국사회의 미래를 찾는다. 그가 <동학선언문>에서 주장하는 요지는 19세기 말 동학농민혁명의 주장이 구현되는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언문이 지금 한국에 주는 메시지는 모호하다. 수운과 동학농민군이 꿈꾸던 세상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었다면 이미 한국은 민주공화국으로 그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도올은 남북통일을 선언문에 등장시키며, 남한과 북한의 화해가 인류평화의 핵심이라고 공표하지만, 종전선언과 통일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왜 실패한 동학을 소환해야 하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미·중 패권경쟁으로 한반도의 정세가 불안정한 지금은 분명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던 시기와 비슷한 시대인지 모른다. 하지만 반도체와 인공지능 기술력을 두고 세계가 경쟁하는 21세기에 동학을 소환하려면, 적어도 이재명 후보처럼 캐틀링건에 도륙당한 농민군의 비극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21세기의 사상가는 동학혁명이 실패한 지점에서 한국의 미래를 말해야 한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쓴 오구라 기조 교수는 ‘19세기와 동학’이라는 논문에서 ‘조선의 암흑기’라고 인식되는 19세기 초반의 80년을 재조명한다. 정치의 정체, 민중의 피폐, 그리고 학문의 정체로 상징되는 이 공백의 80년 동안 조선에는 산업의 정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서학의 수용 과정에서 종교적 취사선택이 일어났던 18세기에 이미 이런 사태는 예견되어 있었다. 조선의 민중이 서학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이던 시기에, 일본의 민중은 <해체신서>를 통해 서양의학을 수용했다.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메이지유신으로 더욱 벌어졌고, 일본이 제국주의적 행렬에 동참한 이후엔 아예 근대화는 일본의 주도로 실행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암흑의 80년에 대한 연구가 최근 들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과연 그 시대가 암흑기였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겨나고 있다. 오구라 기조는 좌절하는 한국 학계를 위해 당시 등장했던 독창적인 철학자와 문학자의 이름을 거론했다. 추사 김정희, 김정호, 최한기, 최제우, 김삿갓 등이 모두 이 암흑기에 태어났다는 것이다.(흥미로운 것은,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추사 김정희를 제외하곤, 이들 중 그 누구도 현대 한국의 학문지형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역사학에 의해 소환될 뿐이다.)

또한 동학을 비롯한 수많은 신흥종교가 왕성하게 출현했고, 보부상의 네트워크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더해도 그 19세기를 암흑기에서 구해내긴 어려워 보인다. 반면, 한국의 사상체계를 연구하는 오구라 기조 교수에게 당시 민중 사이에서 탄생한 동학은 분명 매력적일 것이다. 그는 박맹수, 장일순, 김지하 등에 의해 ‘죽음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라는 현대적 사상으로 동학이 재탄생하고 있다고 우리를 위로한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그런 동학은 일개 ‘아이돌 그룹’보다 영향력 없는 존재임을 일본인 오구라 기조 교수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현대화된다고 해도, 동학은 종교다. 21세기에 종교를 통해 국가를 발전시키자는 사상처럼 퇴행적인 운동은 없다.

오구라 기조 교수는 한국 사상의 특징을 영성에서 찾는다.
오구라 기조 교수는 한국 사상의 특징을 영성에서 찾는다.

모든 사고가 ‘영성’으로 통한다

오구라 기조 교수가 동학을 분석하면서 개관한 한국사상사의 특징은 ‘영성(靈性)’이다. 그는 사상의 순수성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 속에서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진영이 다른 진영을 불순하다고 규탄하고 탄압한 역사가 한국사상사의 큰 특징이라고 말한다. 조선 시대의 유교와 해방 후의 남한과 북한의 이데올로기 투쟁은 모두 그런 사상의 순수성을 둘러싼 투쟁을 보여준다. 어쩌면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진행중인 진보와 보수의 논쟁 또한 사상의 순수성을 둘러싼 투쟁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한국 사상의 순수지향성을 ‘한국적 영성 네트워크’로 연결시킨다. 그는 “순수성을 획득하려고 운동하고 있을 때에도,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도, 순수성이 쇠락해가는 과정에서도, 한국의 사상은 현저한 영성을 띤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사상의 순수지향성은 “지성으로도, 이성으로도, 감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현상이며, 이를 ‘영성’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학은 천일합일의 도를 추구했던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은 최제우 아버지의 영향 속에서도, 원효나 화랑의 영향을 받아 검무를 중시했던 최제우의 사상에서도 지극히 영성적인 종교다.

한국 사상사는 영성이라는 종교적 특성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런 특성은 동학에서 끝나지 않고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동학을 억지로 과학과 합일시키려는 시도는 역사에 대한 통찰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다(최민자 논문 “과학과 영성 그리고 진화-지구 문명의 새로운 지평 탐색”). 민족역사학을 주창한 신채호와 삼국유사를 유행시킨 최남선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한국의 사상적 주류는 바로 이런 영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지금도 흐르고 있다.

영성에 대한 강조는 한국 사회를 둘로 가르는 진보와 보수조차 가르지 않는다. 박근혜를 위해 거리에 나오는 태극기 부대에도, 촛불혁명으로 박근혜를 탄핵시킨 민중 속에도, 영성은 강력한 힘으로 한국사회를 움직이고 있다. 철학자 김상봉은 전태일을 ‘한국 사상사의 혁명적 영성’이라고 부른다. 도올은 <동학선언문>에서 그의 종교적 영성에 대한 취향을 평화나 환경주의로 포장한다. 조선은 지배층부터 민중까지 모두 과학 대신 종교를, 합리성 대신 영성을 선택했고, 실학자들의 학문이 단절된 그 식민지 역사 속에서도 영성에 대한 그 취향만은 현대까지 이어졌다.

철학자 김상봉은 전태일의 의미를 '혁명적 영성'에서 찾는다.
철학자 김상봉은 전태일의 의미를 ‘혁명적 영성’에서 찾는다.

‘영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의 탄생

역사는 분명히 말한다. 과학기술이라는 현실적 합리성과 아무런 접점 없이 구축된 영성 중심의 사상은 나약했고 결국 나라를 빼앗기는데에 일조했을 뿐 아니라, 그걸 다시 찾는데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조선의 망국과 식민지의 역사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광복이 되기 전까지의 역사적 공간에서 살아간 식민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를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과학기술의 근대화는 유교적 세계관은 물론 종교적 영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인물들이 탄생할 때까지 지연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이 망하고,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19세기말, 20세기 초에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가 되는 인물들이 대거 태어난다. 정조대왕의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어야 할 과학기술 근대화는, 그들이 자라나고 조국이 해방되는 1945년까지 시작조차 될 수 없었다. 유교의 도덕형이상학적 세계관과 한국 사상의 영성적 특수성은 서양의 과학기술이 한국에 이식되는데 큰 방해물로 작동했고, 그런 갈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글쓴이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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