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중인들, 왜 ‘근대화의 주역’이 못됐나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⑪한국의 첫 엔지니어 그룹, 그들은 누구인가

조선 후기, 의원, 화가, 역관 등의 중인계층은 사회의 숨은 실력자로 급부상했으나 과학기술근대화의 주역이 되지 못하고 망국을 맞이했다. 그림은 1853년(철종 4년) 유숙이 그린 ‘수계도’로 30명의 중인출신 문인들이 시회를 여는 장면이다.
조선 후기, 의원, 화가, 역관 등의 중인계층은 사회의 숨은 실력자로 급부상했으나 과학기술근대화의 주역이 되지 못하고 망국을 맞이했다. 그림은 1853년(철종 4년) 유숙이 그린 ‘수계도’로 30명의 중인출신 문인들이 시회를 여는 장면이다.

“갑신정변 참여층은 단순히 주도세력의 하수인으로서 정변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개화사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개화된 새로운 세상을 희망하였고 사회적 변혁을 기대하고 있었다. 근대화 초기 단계에서 나타난 갑신정변은 결코 주도세력만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참여층의 적극적 참여와 행동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그들은 고변하여 출세할 수 있는 안전한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고발하지 않고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정변에 적극 동참하여 행동했다.”- 박은숙, 논문 <갑신정변 참여층의 개화사상과 정변 인식> 중에서

갑신정변과 근대여명기의 조선 ‘중인’들

갑신정변은 흔히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고, 당시 조선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해 실패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주도층과는 계급적 기반이 다른 참여층의 역할과 목소리를 역사 밖으로 밀어버렸다. 갑신정변의 주역들 중엔 ‘중인계층’이 꽤 섞여 있었다.

박은숙의 논문 <갑신정변 참여층의 개화사상과 정변 인식>에 따르면, 주도층에 의해 정변에 동원된 사람은 약 100명 정도에 이르며 이들 중 양반이 10명, 중인이 5명, 그리고 상한이 39명으로, 상한이 가장 많았다. 조선시대의 신분은 원래 ‘양반-중인-양인-천인’으로 구분됐으나, 후기가 되면 ‘양반-중인-상한’으로 나뉘게 된다. 갑신정변의 참여층은 모두 정변이 ‘역모’인 것을 알고 있었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도 모두 인식한 상태였다.

이들이 정변에 참여한 동기로 양반의 경우 관직에 대한 집착이 강했지만, 상한의 경우 ‘관직을 통한 출세와 더불어 개화의 세상에 대한 기대와 사회변혁에 대한 갈망’이 높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갑신정변에 참여한 참여층은 대부분 개화사상이 확대 및 보급되는 분위기 속에서 양잠·우두·영어·화학 등의 서양기술과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개화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진정한 개화를 위해서는 정치적 변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고, ‘정변’이 세상의 도를 뒤집어 바꿀 것으로 믿었다. 정변 참여자들 중 중인 5명은 오창모, 유홍기, 변수, 박대영,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왼쪽부터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왼쪽부터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유홍기, 호는 ‘대치’

이들 중 유홍기는 ‘개화사상의 시조’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흔히 박규수와 함께 ‘김옥균의 스승’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역관 출신으로 청나라에서 서양서적을 조선에 들여와 개화사상을 널리 알렸던 중인 오경석과 동갑이었고, 직업은 한의사로 알려져 있다. 그의 호는 ‘대치’로 당시 그의 동료들은 그를 유대치라 불렀다고 한다.

유대치는 중인임에도 귀족이었던 김옥균 등의 개화당 일원을 ‘군(君)’이라 불렀고, 김옥균은 유대치를 ‘선생’이라 부르며 깍듯이 모셨다고 한다. 유대치는 윤치호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고종과 미국공사 간의 외교문제에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유대치는 민란을 일으킨 자들을 토벌의 대상으로만 여겼으며, 민란 진압에 청의 도움을 받으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와의 조약을 통해 청의 내정간섭을 막을 수 있다고 윤치호에게 조언했으나, 서구세력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에 대한 인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변 이후 유대치는 오대산으로 들어갔다는 소식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는데, 1910년 정3품의 품계를 받고 규장각 부제학에 추증됐다. 유대치는 근대 이행기에 중인으로서 개화사상의 선구자 역할을 했고, 갑신정변의 주역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당시 지배층인 양반들에 맞닿아 있었다. 유대치의 이런 역할은 조선의 중인 계층을 ‘근대화의 한 주역’으로 설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유대치의 친구 오경석

유대치의 친구였던 오경석은 역관이었는데, 그는 1853년부터 1875년까지 무려 13번에 걸쳐 북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북경에 갈 때마다 세계지도, 자명종을 비롯한 서구의 문물과 서적을 가져왔으며,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당은 그가 들여온 책을 공부하며 개화사상에 심취됐다.

나아가 오경석은 북경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서구 자본주의 세력의 침략이 어떻게 청나라를 무너뜨리는지 목격할 수 있었다. 또 조선의 쇄국 정책이 초래할 조선의 국가적 위기를 인지하게 됐다. 오경석은 “서구의 침략으로 예상되는 조선의 국가적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당면 과제이기는 하지만, 보다 더 큰 과제는 조선도 하루바삐 선진 자본주의 문명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함으로써 서구 자본주의 열강과 같은 문명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경석의 개화사상은 유홍기를 거쳐 이동인, 김옥균, 박영효로 이어지며 개화파의 정치활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 최초의 미국인 유학생 ‘변수’와 근대 중인의 한계

개화사상은 대부분 유학을 통해 외국 문물을 직접 접촉한 인물들에 의해 싹이 돋았다. 이들 중 특히 미국에 유학을 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야말로 청나라와 일본을 넘어 진정한 서양문물의 새로움과 힘을 조선에 전달할 운명이었다. 잘 알려져 있는 개화기 미국 유학파는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 김규식, 신흥우 등이다. 그리고 이들보다 훨씬 늦은 1905년 유학을 떠났던 이승만은 훗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즉, 미국 유학파는 훗날 한국의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미국 유학파 대부분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정치학과 외교학을 배워왔고, 서재필이 의학을 배웠다고는 하나 그는 의사로서가 아니라 독립신문을 통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하게 된다. 특히 서재필은 갑신정변에 가장 어린 나이로 참여했던 엘리트였으나, 미국 유학 이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조선을 미개하다고 여기며 “조선 민중의 무지 때문에 정변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등 제국주의에 포섭된 면모를 보였다.

한국최초 이학학사학위자 ‘변수’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도피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변수’가 있다. 변수는 1861년 태어나 1891년 31세의 짧은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에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과학자’로 꼽을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개화기 대대로 역관을 했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개화파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시인이었던 아버지가 소개시켜준 조선 말기의 한학자이자 개화사상가 강위에게 직접 교육을 받았던 그는, 강위와 친하게 지내던 김옥균 등 개화파 청년들과 금세 동료가 되었다. 1882년 김옥균을 따라 일본에 간 변수는 동경에서 양잠술과 화학을 공부했고, 1883년 7월에는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변수는 돌아오는 길에 민영익, 서광범을 따라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 귀국을 했다.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사람이 됐다.

정변이 실패하자, 변수는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86년 1월 갖은 고초 끝에 민영익의 정치자금 일부를 빼돌려 미국에 건너갈 수 있었다. 일본에서 양잠과 화학에 관심을 보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미국에 도착한 후 메릴랜드 농과대학에 입학해 1891년 이학학사학위를 받았다. 아직 미국에서조차 대학 교육이 널리 퍼지지 않았던 시절, 한국 최초의 학사학위자가 된 셈이다.

이후 그는 미국에 남아 살기로 결심을 했고, 1890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신청한다. 또 미국 농무부에서 촉탁 과제를 받아 ‘일본의 농업’이라는 보고서를 완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1891년 10월 22일 그는 철도역에서 기차에 충돌해 사망하고 만다. 미국에 있는 그의 묘지 비석엔 “변수를 기념하여. 그는 이 나라에 왔던 최초의 조선 사절단의 한 사람이었고, 1891년 6월 메릴랜드 농대를 졸업했으며, 1891년 10월 22일 대학역에서 열차에 치어 죽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한국인 최초 미국 학위취득 유학생 '변수'의 묘소.
한국인 최초 미국 학위취득 유학생 ‘변수’의 묘소.

한국의 첫 ‘엔지니어 집단’ 중인의 기득권 한계

전문직 중인은 분명 조선 후기 근대 사회로의 이행기에서 사회 변동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한국에서 엔지니어 집단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한 한경희는 그의 책에서 당시 전문직 중인 집단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전문직 중인은 조선 후기 사회 변동의 한복판에 있었다. 비록 양반과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누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상당한 수준의 명성과 지식,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일의 특성상 중인들이 갖게 된 새로운 지식과 경험은 그들을 변화의 물결을 가장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집단으로 만들었다. 조선 후기의 전문직 중인 집단은 새로운 사회적 상상을 바탕으로 그것을 구현할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잠재력과 에너지를 가진 집단이었음에 틀림 없다.”(한경희, 책 “한국 엔지니어의 형성과 발전”에서)

앞에서 살펴본 오경석, 유대치, 변수 등이 개화사상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당대 양반 권력층과도 교분을 쌓으며 사회 변혁을 꿈꾸었다는 점을 보아도, 분명 조선 후기 중인 사회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집단임에 틀림없었다. 1910년까지 전문직 중인의 숫자는 6,303명에 이르렀고 이들 대부분이 ‘역과’와 ‘의과’ 합격자였다. 서양의 문물을 번역하고 외교를 보좌하는 역관과 국가 통치를 위해 백성의 건강을 돌보는 의관의 역할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고, 조선 후기 중인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은 ‘안정적이고 유연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가업으로 물려줄 정도의 가치’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들은 신분 유지를 위해 가숙을 지어 시험공부를 시켰고, 혼인도 같은 중인 집안 내에서 맺으려 했다.

개항 이후 중인은 상당한 경제력을 쌓고 이를 통해 근대화에 앞장선 개화 관료가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개화당의 인물들 외에도 일본 전보학교 출신의 역관 백철용, 청나라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뉴욕대와 보스턴대에서 유학했던 현정,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 의숙과 도쿄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안형중과 현귀 등은 조선의 지배권력이 근대화를 거부하며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고 있던 당시에 중인 사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과학기술을 통한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중인 계층은 망해가던 조선을 구할 수 있을 만큼 세력을 확보하지도 못했고, 그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던 안정적인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해 기존의 사회 체제를 변혁시키려는 의지가 부족했다. 오경석의 아들이자 훗날 독립협회 활동 및 동학 교주 손병희와 함께 갑진개화운동(1904년 손병희 등 동학교도들이 일본과의 협력으로 개화를 추진한 운동)을 주도한 오세창을 연구한 김경택은 근대화 이행기 중인층의 개화활동의 한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러한 주권의식의 취약성은 일본 자본주의체제에의 편입을 통해 자본주의경제의 발전을 추구했던 그들의 실력양성론의 성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개항 이후 근대화기에 지주 및 부르주아계층은 일본과의 미곡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역사적 조선 속에서 일제침략에 대해 정치적으로 대결하면서 국가적 주권을 확립하려 하기보다는 일제의 정치적 보호하에 자신들의 경제적 실력양성만을 추구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의식은 근대적인 ‘민족’의 차원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었다⁠.”(김경택, 논문 “중인의 사회적 성격과 친일개화론 한말 중인층의 개화활동과 친일개화론-오세창의 활동을 중심으로”에서)

이 시기 훗날 과학기술의 근대화로 이어지는 토양은 표면의 정치 영역이 아니라 의학과 공학처럼 민중의 실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식민지 시기 과학자 혹은 엔지니어라 불리게 될 인물들은 대부분 유학길에 올라 있었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글쓴이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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