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서’] 진실된 세계는 고통이 따르고, 거짓된 세계에는 안락함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코로나 사태로 인해 언택트 시대가 가속화하면서, 기왕에 개발돼 실험단계에 있던 ‘메타버스’ 시스템이 현실화되었다. 메타버스는 가상공간에서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현실처럼 일하는 신문물이다. 영화 ‘아바타’처럼 말이다.
영화 아바타가 나올 때만 해도 먼 미래의 공상과학영화라고 치부한 게 엊그제 같은데, 메타버스는 이미 현실화되었다. 컴퓨터에 접속하는 순간 가상 공간이 펼쳐지고, 실생활에 필요한 활동을 그 공간에서 실제처럼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공간인 셈이다. 어떤 게 진짜 세상이고 어떤 게 가짜 세상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다.
이런 꿈같은 세상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에 품었던 엉뚱한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아이들의 특성 중 하나는 엉뚱하고 기발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필자 역시 어린 시절에는 엉뚱한 생각을 많이 했다. 그중 하나가 내가 사는 이 세상 말고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특히 꿈을 꾸고 일어난 후에는 현실에 금방 적응하기가 힘들었는데 혹시 우리가 사는 현실이 꿈이고, 꿈을 꾸는 순간 진짜 세상으로 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을 했다.
동화책을 보면서 다른 세상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당시 즐겨보던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는 허공에 대고 마법의 지팡이로 치면 아무데나 입구가 생겼다. 이상한 나라의 폴과는 달리 다른 동화에서는 옷장 안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옷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는 행운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숲속 동굴에 들어갔는데 안쪽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 계속 그 빛을 찾아 들어가자 갑자기 구멍이 넓어지더니 무릉도원처럼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졌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그런 세상을 찾아가 보고 싶기도 했다.
꿈은 그냥 꿈일 뿐일까...또다른 현실은 아닌가
현실과 가상세계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있다. 그런 서사가 황당무계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렇게 두 가지 세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에야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한 여성의 꿈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데이비드 린치는 마치 신이라도 되는 양 현실과 꿈의 관계를 매우 흡사하게 엮어내고 있다. 영화는 스릴러 장르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관객은 현재 의문시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사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본다. 그러나 주 서사가 꿈이라는 것이 암시되면서부터 혼란에 빠진다. 영화를 보다 보면 깊은 잠 속에 빠져 꿈을 꾸듯 영화 속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 영화를 두 번째 봤을 때는 이미 꿈속 장면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신비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꿈이라는 것을 안 뒤에 보니 정말로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에서 나오미 왓츠가 연기한 캐릭터가 꾸는 꿈은 자신의 욕망대로 현실을 변형시킨 것이다. 현실에서 느꼈던 두려움과 욕망이 변형되어 꿈으로 나타난다. 꿈은 한 번만 꾸면 그것으로 끝이다. 한번 꾸었던 꿈은 다시 재생되지 않는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다시 보면 한 번 꿨던 꿈을 반복해서 그것도 선명하게 복기하는 것 같아서 섬찟할 때도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우리의 삶도 꿈처럼 허망하게 끝나리라는 예감 때문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이 세상도 사실은 진짜가 아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가짜에게 사육당하는 진짜? 진실을 택하기 주저하는 이유
워쇼스키 감독의 영화 <매트릭스>는 많은 사람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기존의 영화 관습을 완전히 뒤집은, 말 그대로 상상을 초월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는 인공지능 컴퓨터와 기계에 의해 인간이 양육되는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소름이 끼쳤던 것은 영화에서처럼 가짜를 진짜로 믿는 상황이 지금의 내 현실일 수도 있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다만 영화처럼 AI에 의해 지배되는 대신 진실만 등록하지는 않는, 가끔은 가짜도 진짜인 것처럼 등록하는 나의 뇌에 지배당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처한 상황이나 주변 인물에 대한 인식이 수시로 바뀌는 걸 보면 어떤 걸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심지어 십여 년 전, 혹은 몇십 년이 지난 과거인데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내 행동이나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이제야 인식하고 등에서 식은땀이 날 때가 있다. 더 나아가서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이 사실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아는 것만큼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매트릭스>에서처럼 빨간색 약과 파란색 약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가 많다. 빨간색 알약을 먹으면 가짜 현실에서 벗어나 진실을 알게 되지만 힘든 여정이 시작되고 파란색 알약을 택하면 지금처럼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가짜 세상에서 계속 살게 된다.
키아누 리브스가 맡은 영화 캐릭터, ‘네오’처럼 모든 사람이 빨간 알약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외로 파란 알약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편견일 수도 있지만,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은 대부분 파란색 알약을 택하지 않을까.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변화를 감당하기에 버겁고 남은 시간이 많지도 않으니까. 그냥 지금 알고 있는 세상에서 그대로 머물다가 떠나기를 원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무리 안전하게 보일지라도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사는 것이 만족감을 줄 수 있을까.
굳이 진실을 찾아야할까...평화로운 거짓세계를 버리고
내부에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외부 세계는 위험하다는 공포의 환상을 계속 만들어내야 하는 모순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트루먼 쇼>가 그런 영화다. <트루먼 쇼>에서는 모든 사람의 흥미를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킨다. 짐 캐리가 연기한 ‘트루먼 버뱅크’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처럼 꾸며진 거대한 TV 세트장 내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이 진짜라고 믿고 산다. 그리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생방송으로 대중에게 중계된다. 트루먼은 꾸며진 세상에서 별문제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어느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결국 세트장 밖에 진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배신감에 분노한다.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던 모든 경험과 역사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며 자신만 빼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일이다.

트루먼은 무의 세계로 추락해 어른의 몸을 하고서 탄생부터 자신의 인생사를 다시 시작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트루먼이 진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금기를 깼기 때문이다. 바다로 나가서 끝까지 가다 보면 죽게 된다는 경고를 어기고 노를 저어 끝까지 간다. 그렇게 간 바다의 끝에는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었다. 프로그램 제작자는 오히려 바깥세상은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 찬 세상이며 트루먼이 사는 세상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안전한 곳이라고 주장한다. 깨끗한 세상을 인위적으로 만들고 안전성을 인식시키려 든다면 그것 역시 또 하나의 거대한 거짓이 된다.
진실을 알려주는 약을 먹으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진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모른 채 묻어두고 거짓이지만 안정될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새로 시작할 각오로 용기를 낼 것인가. 쉽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애매모호한 경계선에 서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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