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람의 향기’...”삶은 타인을 돕기 위한 것”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서’] 부산영화제, 이란영화 개막작으로 택한 이유 우리의 삶에서 바람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타인 돕는 마음은 변하지 않아...바람처럼”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바람의 향기' 스틸컷. 주인공인 전력회사 직원은 시각장애인을 도와 약혼녀가 있는 데이트 장소로 데려다준다. 사진=부산국제영화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바람의 향기' 스틸컷. 주인공인 전력회사 직원은 시각장애인을 도와 약혼녀가 있는 데이트 장소로 데려다준다. 사진=부산국제영화제

코로나-19로 2년간 중단됐던 부산국제영화제가 10월 5일에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빛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전당에 불어오는 10월 초의 바닷바람은 쌀쌀했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매진될 만큼 영화제는 성황이었다. 양조위 특별전 기념 굿즈를 구매하기 위해 늘어선 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졌다. 여기저기 어디서나 축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양조위의 인기는 세대를 초월했는데, 본인도 기자회견에서 “젊은 세대들이 자신의 최신 영화에 보이는 관심이 놀라웠다”고 했다. 관객중에는 양조위의 최신영화를 보고난 뒤 과거의 양조위 주연 영화들을 모두 찾아봤다는 젊은층 도 있었다.

5일 개막한 부산국제영화제 표지판. 사진=이화정
5일 개막한 부산국제영화제 표지판. 사진=이화정

‘바람의 향기’, 원제는 죽어 있는 땅이라는 의미

14일까지 계속되는 부산국제영화제가 개막작으로 선택한 영화는 <바람의 향기>다. 영화제는 개막작을 시작으로 6일부터 본격적으로 다양한 작품들이 관객을 맞고있다. 거장 감독들의 작품들을 비롯해 장편 데뷔작이 처음인 신인 감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보편적으로 겪게 되는 가족 간의 갈등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국지적인 특색이 담긴 소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섹션별로 다양한 경향성을 다루고 있어서 풍성함을 더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에서는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영화에서 묘사되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으며 살아야 하는 인간들의 감정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 <바람의 향기>는 이란의 하디 모하게흐 감독의 작품이며 직접 주인공을 연기했다. <바람의 향기>는 영어 제목을 그대로 옮긴 것이고, 원제를 순화시켜서 번역된 것이다. 원제는 페르시아어로 ‘아무것도 생산되지 못하는 땅, 죽어 있는 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역설적인 의미가 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 즉 믿음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온갖 크고 작은 역경을 견디어야만 하는 삶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흔들릴 수는 있지만 그 정체성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는 뜻”이라는 게 감독의 설명이다.

개막작 에서 주연까지 맡은 하디 모하게흐 감독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이화정
개막작 에서 주연까지 맡은 하디 모하게흐 감독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이화정

<바람의 향기>로 번역된 제목이 훨씬 더 마음에 와닿는 것은 이 영화가 흙바람이 날리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의 향기를 물씬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첫 장면부터 위험하고도 힘겨운 작업이 보인다. 한 남자가 가파른 절벽 틈에서 뭔가를 힘들여 캐내고 있는데 심지어 하반신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곧 밝혀진다. 그리고 집에는 한 남자아이가 누워 있다.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아서 마치 죽은 듯이 보인다. 하반신이 마비된 남자는 요 위에 누워 있는 아이를 끌어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받게 한다. 아이는 전신마비 상태로 전혀 움직이지 못한 채 눈만 깜빡일 뿐이다. 남자아이의 크고 아름다운 눈이 더욱 관객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는 아이의 몸에 절벽에서 긁어온 흙을 발라준다.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척박한 환경에 놓인 남자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의미 이외에는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다. 주파수가 잘 잡히지 않는 라디오가 유일하게 바깥세상과 연결해주는 도구다.

삶의 여정은 함께 손을 잡는 일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들리지 않고, 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와 전등 불만이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소음과 함께 전기가 나가버린다. 전력회사에 수리를 신청하는 여정 역시 쉽지 않다. 휴대폰을 소유한 사람을 겨우 만나 전력회사에 수리를 신청하고 이 일을 계기로 영화의 본격적인 서사가 펼쳐진다.

파견된 전력회사 직원은 두 사람의 형편을 보고 감히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다. 그는 만사를 제쳐두고 수리를 위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 지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도로 표지판도 없고 흙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과정은 불안해 보인다. 게다가 자잘한 난관이 갈 길을 방해하지만 그는 단 한번도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탄식하지 않는다. 그의 행동 역시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바람결을 타고 흐르는 듯하다. 무전기로 본사와 연락하는 과정이 수시로 나오는데, 순탄치 않은 여정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늘 고맙다는 말로 끝난다. 발음을 잘못 들어서 다른 동네로 가기도 하고, 물속에 차바퀴가 빠져 옴짝달싹하지 못하거나, 도로에서 차의 시동이 꺼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시각장애인을 도와 데이트 장소까지 데려다 달라는 부탁까지 들어주고 꽃까지 꺾어다 준다. 시각장애인이 애인을 만나 꽃을 건네주고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은 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함께 손을 잡지 않으면 삶의 여정은 이어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죽음과 삶, 어둠과 빛은 동반자처럼 서로 얽혀 있다. 소년은 마치 죽은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만 깜빡일 뿐 전신이 마비된 상태라서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영화 중반쯤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죽음이 등장한다. 본사의 지시대로 전기 수리에 필요한 부품을 이웃 마을에서 떼어가려고 하는데 한 여인이 나오더니 전력회사 직원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면서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방해한다. 직원은 여기서도 한마디 항변도 하지 않고 마을 이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런데 이장과 함께 여인의 집에 와보니 여인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다. 삶이란 사라질 것 같지만 어떤 식으로든 지속되고, 역으로 계속될 것 같지만 어느 한순간 바람처럼 사라진다.

지난한 삶의 목적은 ‘타인을 돕기 위한 것’

하디 모하게흐 감독이 직접 주인공인 전력회사 직원 역을 한 이유에 대해 “본인만큼 캐릭터를 잘 이해하는 배우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고 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롱테이크로 촬영됐다. 그래서 풍경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듯하다. 시간은 바람이 불어오듯이 흘러간다.

<바람의 향기>는 이란 영화를 세계에 알린 거장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특히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나온 주인공 꼬마의 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학교에서 친구의 노트를 가져와 버린 아이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친구가 숙제를 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봐 친구의 집을 찾기 위해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여정을 밤 늦도록 한다. 자신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힘이 약하고 무력해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지난한 여정의 목적은 단 한 가지, 내가 타인을 돕기 위함이다.

하디 모하게흐 감독은 이런 힘든 여정을 통해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쉽게 얻는 것은 없으며 쉽게 얻는 것은 쉽게 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바람의 향기>를 개막작으로 택한 이유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지향하는 바를 짐작하게 한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하는 축제 속에서 지구 반대편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리고, 누군가의 나비 날갯짓 같은 소소한 움직임도 나아가서는 큰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에 그 의미를 두고 싶다.

글쓴이

이화정 영화심리상담사

영화심리상담사인 이화정은 영상번역작가로 일하면서 약 700편의 영화와 TV시리즈, 다큐멘터리를 번역했다. 그 후 영화이론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통합예술치료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예술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탐구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현재 영화와 심리에 관한 방송, <꿈꾸는 씨네 카페>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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