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진보적 신자유주의’와 결별하라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2022] 민주당, 좌회전 깜빡이로 자주 우회전한 이유 ‘너를 위해’식 어설픈 진보에 이대남 ‘폭발’ ‘모든 시민이 함께’ 논의하는 민주주의로

지난해 민주당이 비대위-전국청년당 간담회를 개최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지난해 민주당이 비대위-전국청년당 간담회를 개최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대선이 한 달여 남은 지금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박빙이라고는 하지만, 정권재창출보다 정권교체를 원하는 여론이 훨씬 많다. 안철수 후보를 포함한 야권 후보들의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아 야권 단일화가 성공한다면 패배는 피할 길이 없어 보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윤석열 후보에 대한 이 후보의 압도적 우위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안철수 후보와의 ‘역단일화’ 같은 정치공학적 발상도 나오는 지경이다. 그러나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했던가, 지금 같은 절박한 상황은 민주당이 그동안 펼쳐 온 정치에 대한 냉정하고 근본적인 성찰 위에서 해답을 찾아 볼 것을 요구한다.

이대남의 충격적인 ‘복수극’

완만하게 상승하던 이 후보의 지지율이 이른바 박스권에 갇혀 정체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참으로 뼈아프다. 윤 후보가 이준석 대표와의 갈등을 봉합함에 따라 그를 지지하는 청년 남성, 특히 이른바 ‘이대남’의 지지를 다시 회복한 게 주된 배경이라는 분석이 많다. 비록 남성들에 국한되었다지만,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운동의 선봉에 서 왔으며 줄곧 든든한 민주당 지지층으로 평가되던 이십대 대학생들의 상당한 수가 군부 독재 세력의 후신이자 노골적인 기득권 옹호 정당인 국민의힘 후보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고 충격적이다. 여기서부터 출발해 보자.

많은 분석가들은 이 이대남들이 국힘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기보다는 그동안 지지해 오던 민주당에 등을 돌리거나 자신들을 배신한 민주당을 ‘응징’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단순히 이대남만이 아니라 청년 세대 전반이 마주하고 있는 불투명한 삶의 전망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다고 한다. 민주당은 지금 왜 이 이대남들을 포함하여 많은 시민이 민주당을 외면하고 정치적 복수를 다짐하고 있는지부터 차분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이대남이 민주당에 등을 돌린 이유와 가령 코로나 국면의 자영업자들이나 부동산 가격 폭등에 따른 피해자들이 민주당을 응징하겠다고 벼르는 이유를 무턱대고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이유들이 큰 틀에서 하나로 모일 수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바로 민주당의 어떤 본질적인 정체성 혼란과 관련이 있다.

청소년기후행동 회원들이 국회 앞에서 국회의 기후위기에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 연합뉴스
청소년기후행동 회원들이 국회 앞에서 국회의 기후위기에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 연합뉴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의 ‘진보적 신자유주의’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말기 한미 FTA 체결에 대한 진보 진영의 비판에 답하면서 당시 민주당 정부의 정체성을 ‘진보적 신자유주의’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무슨 진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한 때 자신을 지지했던 진보 진영의 비판에 답하면서 자조적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내가 볼 때 여기에는 민주당을 지금까지도 괴롭히고 있는 어떤 야누스적 본성에 대한 의도치 않은 고백이 담겨있다. 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민주당이 처해 있는 곤경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좋은 시사를 주리라 믿는다.

무슨 형용모순 같은 조합이지만, 진보적 신자유주의는 김대중 정부 이래 민주당이 위태롭게 추구하고 실천해 왔던 정치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이름이 아닐까 한다.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민주당이 정치적 진보를 대변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지지층의 계급적 위치나 이념적 성향을 보아도 그렇고, 추구해 왔던 ‘더 많은 민주주의’나 ‘보편 복지’의 확대 같은 정치적 지향을 따져도 그렇다. 하지만 민주당은 또한 동시에 신자유주의적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끊임없이 더 많은 ‘성장’을 추구해 왔으며, 합리성과 효율성의 이름 아래 재벌과 대기업을 옹호하고 시장 논리에 순응해 왔다. 단순히 경제 정책에서만이 아니고, 가령 학교에서는 신자유주의적으로 물든 ‘경쟁 교육’ 체제를 적극적으로 완성하기도 했다(이는 지금 이대남 현상의 중요한 배경 중의 하나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두 모순적 지향의 정치적 접합이 언제나 매끄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늘 민주당의 정치적 혼란을 부추겼다. 선거 승리를 위해 불가피하게 포괄정당을 지향해야 하기는 했지만, 민주당은 지나치게 자주 ‘좌회전 깜빡이를 켠 채 우회전을 하는’ 일을 반복했다. 말과 구호는 더할 나위 없이 진보적이지만, 실제 정책은 보수적 선택지에 머물고 마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동산 가격 폭등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면서도 종부세는 터무니없이 완화하고 재개발을 부추기는 등 오히려 시장을 자극하는 식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대전환을 외치고 있는 이재명 후보의 많은 ‘실용주의’나 ‘소확행’ 공약들도 이 맥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재미있게도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이 진보적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가지고 트럼프의 포퓰리즘을 낳았던 미국 민주당의 정치적 본성을 규정한 적이 있다. 그는 경제적 차원의 ‘(재)분배’와 문화적 차이의 존중과 관련된 ‘인정’이라는 두 개념 축을 통해 현대 민주정치를 조망하는 정치철학자인데, 쉽게 말해 미국 민주당은 인정의 정치라는 맥락에서는 성소수자나 유색 인종을 포괄하는 등 매우 진보적이지만 분배정치의 측면에서는 신자유주의적인 상층 계급 지향을 드러내 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국 민주당의 이런 모순적 정체성은 많은 지점에서 한계를 드러냈고, 트럼프식 포퓰리즘이 그 틈새를 파고들어 승리하게 된 결정적 배경을 제공했다.

정치적 르상티망, 美 극우 포퓰리즘, 韓 이대남 현상

나는 프레이저식의 분석틀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인정과 재분배의 이원론 그 자체도 따져 볼 지점이 많지만, 가령 인종 문제 같은 건 우리나라에서는 핵심적인 정치적 의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미국 민주당이 진보와 신자유주의라는 모순적 지향의 어설픈 접합에 기댄 정치를 하면서 지지층의 균열을 낳았고, 그 결과 일부 지지층에게는 정치적 르상티망(원한 감정)마저 불러일으켜 트럼프식 극우 포퓰리즘을 불러들였다는 분석은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좋은 교훈을 준다.

미국의 민주당은 전통적 강세 지역이었던 이른바 ‘러스트 벨트’의 백인 육체노동자들을 버리는 바람에 트럼프에게 패했지만, 한국의 민주당은 특히 이대남으로 상징되는 청년들과 코로나로 심각한 위기에 빠진 자영업자들을 버려서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사실 이들의 삶의 위기와 불안은 진보를 자처해 온 민주당의 좋은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었건만, 민주당은 그들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 우파들이 그 틈새를 파고들었고, 이준석과 윤석열은 꼭 트럼프 방식으로 젠더와 세대, 나아가 국민과 비국민을 갈라치기 하는 포퓰리즘적 선동으로 정치적 이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기본적으로 민주당식 진보적 신자유주의 정치의 혼란이 만들어냈다고 해야 한다. 민주당과 지지자들의 뼈아픈 성찰이 필요하다.

안타깝지만, 얼마 남지도 않은 선거 기간 동안 민주당이 환골탈태하여 대중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주당은 왜 대중들이 지지를 철회하는 정도를 넘어 아주 적극적으로 민주당을 응징하겠다고 나서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진보적 지향에 대한 거대한 반동의 물결에 휩싸일 조짐을 보인다.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인 색깔을 가진 터라 쉽게 ‘내로남불’에 대한 비판을 자초했던 어설픈 민주당식 진보 지향 탓이 크다고 해야 한다. 민주당 주류는 그마저도 선거 때가 되거나 조금이라도 여론만 나빠지면 마치 진보 지향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엉뚱한 우경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해 왔다. 그 결과는 게도 우럭도 다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반대 진영의 지지는 얻어내지도 못하면서 본래의 지치층도 흩어버렸다는 말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그런 오류는 반복되지 않았나 싶다.

‘내가 함께’ 삶을 결정하는 구조 만들어야

무턱대고 민주당이 진보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문제는 진보 개념 자체의 불투명성이다. IMF 체제 속에서 처음으로 집권했던 민주당의 신자유주의 지향은 오늘날의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얼마간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고, 4차 산업혁명과 기후 위기 속에서 단순히 전통적인 분배정치를 반복하거나 강화하기는 힘들 것이다. 소셜 미디어의 확산 등에 따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지형도 급변하고 있다. 변화된 상황과 조건에 맞는 새로운 ‘시민적 진보’에 대한 모색이 절실하다.

이 새로운 시민적 진보가 어떤 것일지 여기서 길게 이야기할 여유는 없다. 내 생각에 마이클 샌델은 지난번 이재명 후보와의 화상 대담에서 이 문제와 관련한 중요한 실마리 하나를 제시했는데, 이 이야기만 좀 더 하자. 그 대담에서 샌델은 이 후보에게 빈부격차 해소나 계층 상승의 사다리에 오르기 위한 공정한 기회 제공만큼이나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이 함께 공동선을 논의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내가 볼 때 민주당과 이 후보는 샌델이 제시한 이 실마리를 제대로 살려오지 못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샌델이 강조한 대로 그동안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계층이 더 많이 공공의 삶에서 차지하는 몫을 늘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대남을 포함한 청년 세대나 자영업자들의 민주당에 대한 불만의 핵심도 단순히 젠더 갈등이나 적은 지원금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통과 불안이 제대로 경청되고 존중받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한다. 시민들은 단순히 ‘나를 위해’ 이익이 되는 소소한 공약들이 아니라 ‘내가 함께’ 만들어 갈 미래를 더 원한다.

샌델의 제언은 ‘민주주의적 정의’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지금 대선 국면에서 제기돼 있는 ‘정치개혁’의 과제와도 연결된다. 정치개혁은 단순히 일각에서 이야기되는 ‘586 세대 용퇴’ 같은 인적 쇄신과 등치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정치적 질곡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념적, 정치적 지향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해 분열과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를 일상이 되도록 만들고 있는 승자독식 원리의 단순 다수결 선거제도다.

정치개혁의 핵심은 이 제도를 좀 더 민주적으로 정의로운 ‘연동형 비례대표제’ 같은 제도로 바꾸는 데 있어야 한다. 위성정당은 당연히 금지시켜야 하고, 필요하다면 더 정의로운 대의제를 위해 국회의원 정수도 늘려야 한다. 어쩌면 이런 식의 정치 개혁 구상과 비전은 지금 한 표라도 아쉬운 민주당이 국민의당이나 정의당과 함께 새로운 연합정치를 설계할 수 있는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쓴이

장은주 영산대 교수

장은주는 영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정치철학자다. 어떻게 하면 한국 민주주의가 좀 더 안정되고 성숙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필요한 철학적 인식을 다듬는 게 주된 관심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 대학에서 ‘비판사회이론’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 사회의 고유한 삶의 문법과 발전 동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고 싶어 한다. 최근에는 시민들의 민주적 역량 함양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에 관심이 많다. <인권의 철학>, <정치의 이동>, <유교적 근대성의 미래>, <시민교육이 희망이다> 같은 책을 썼다. 최근에는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적 공정 담론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고 ‘민주적 평등주의‘라는 대안을 제시한 <공정의 배신>(피어나)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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