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교사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학생인권과 교권은 제로섬 관계아니다 교사들도 당연히 인권을 가진다” 독일엔 교사출신 정치인 많은데 우리는... 선생님들, ‘정치적 금치산’에서 풀려나야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 사망 사건과 관련해 서울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전국에서 모인 교사들이 구호를 외치며 교사 인권 보호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 사망 사건과 관련해 서울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전국에서 모인 교사들이 구호를 외치며 교사 인권 보호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비극을 정쟁화하는 포퓰리스트들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에 이어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서 이번 서울 서이초 교사의 비극적 사건을 과도한 학생인권 탓으로 돌리며 지방자치단체들의 학생인권조례를 손보겠다고 나선다. 보수 언론들과 국민의 힘도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모양새다. 이미 모든 시나리오가 완벽하게 짜여 있었다는 듯이 손발이 척척 맞는다. 보수 진영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접근할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막상 이런 모습을 보니 그저 헛웃음만 나온다.

이번의 비극은 누가 보더라도 과도한 학생인권 때문이 아니라 몇 몇 학부모의 지나친 교사 괴롭힘 때문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런 괴롭힘이 일어나는 진짜 이유를 파악하고 그것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고민해 보는 게 우선적인 일일 터다. 그런데도 이런 접근은 생략한 채, 그동안 우리 사회 일각에서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둥 하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폐지를 주장해 온 학생인권조례가 원인인 듯이 사안을 호도하고 문제를 바꿔치기 한다. 그러면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고 옹호하는 진보 교육감들과 전교조 같은 교사 단체들이 척결해야 할 ‘적’이 되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정쟁화가 초점이라는 이야기다.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정치적 술수인데, 일부 교사들조차 이에 동조하는 듯해서 안타깝다.

정부와 보수 진영의 이런 접근은 문제를 호도하면서 정치적 이득만 챙기려는 부도덕한 ‘정치질’일 뿐이다. 이런 정치질은 불합리한 교육 현장의 관행과 교육 활동에 대한 학부모의 감당할 수 없는 괴롭힘과 압박 때문에 스스로 이 세상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청년 교사에 대한 적절한 추모가 될 수 없다. 불거진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도 아니다. 만약 사태가 여권의 의도대로 흘러가면, 이는 그 교사의 죽음에 대한 지독한 조롱이자 모욕이 될 것이다.

안타까운 이유로 이 생과 이별해야 했던 청년 교사에 대한 가장 좋은 애도는, 아마도 그를 죽음으로 이끈 우리 교육 현장의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 위에서 올바른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일 거다. 많은 문제가 얽혀 있어 쉽게 접근할 일은 아니겠지만, 교사들과 시민들의 슬픔과 분노를 동력 삼아 참된 문제해결을 위한 사회적 모색에 나설 때다. 차분하면서도 문제의 근본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모두의 성찰이 필요하다.

교권은 학생인권을 ‘위해’ 있는 것이다

학생인권과 교권의 관계부터 따져 보자. 사실 그 동안에도 학생인권이 지나치게 보호되는 바람에 교권이 추락하고 있다는 지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인과관계는 원천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학교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위해 존재한다. 교사들은 이런 학교가 있어야 의미있게 존재할 수 있다. 학생인권은 이 교육의 과정에서 ‘학생이 지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침해되어서는 안된다’는 민주 사회의 근본 원칙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권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런 학생인권을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학생인권이 보호된다고 교권이 침해된다는 것은 벌써 개념적으로,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학생인권과 교권은 무슨 제로섬 관계에서처럼 서로 대립하고 길항하지 않는다.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권리인 만큼, 교사들도 당연히 인권을 가진다. 특정한 사람들의 인권이 더 잘 보장된다고 다른 사람들의 인권이 침해되는 일은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없다. 인권은 제한된 양 밖에 없어 사람들이 서로 가지겠다고 다투는 자원이나 소비재 같은 것이 아니다.

인권은 모든 인간이 지닌 존엄성에 대한 사람들 사이의 상호인정을 전제로 한다. 학생인권은 학생들이 서로가 서로의 존엄성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교육적 관계에서 만나는 교사는 물론 청소부나 급식 종사자나 다른 학교 직원들 모두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데서만 성립할 수 있다. 이런 상호인정의 원리가 부정되는 곳에서는 참된 인권존중이 일어나지 않는다.

학생인권은 교권 존중을 전제하고,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의 인권이 최대한 존중되는 곳에서만 충분한 교권 존중이 이루어질 수 있고, 교사의 교육적 권한과 권위가 제대로 인정될 때에만 학생들도 제대로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활동은 바로 이런 인권의 상호인정 관계를 일상적으로 배우고 실천하며 심화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인권은 침해될 수 있다. 사실 냉정하게 보면 우리 사회의 교육과 관련된 제도, 관행, 문화는 그 자체로 학생들의 인권뿐만 아니라 교권도 근본적인 수준에서 침해한다. 인권의 이념은 학생들이 저마다 가진 재능과 다 다를 수밖에 없는 성장의 속도를 배려하며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요구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라나는 세대를 획일적인 교실 안으로 몰아 놓고 치열한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살아남으라고만 강요하고 있다. 인권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의 목표는 학생들이 제대로 인권을 보장받고 실현할 수 있는 주체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지만, 우리 교육은 성적에 따른 학생 줄세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교사는 교사대로 그런 과정의 도구가 되라는 압박에 시달린다. 그러나 이런 거대하고 본질적인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자.

일상적 현실에서 학생들의 인권은 전형적으로 교사의 폭언이나 폭력에 의해 침해될 수 있다. 성적이나 외모, 성별 등에 따른 부당한 차별이나 무시 행위도 마찬가지다. 과거 우리 사회의 학교에서 그런 침해는 정말 일상적이었다. 그러나 학생에 대한 그런 행위들은 교사의 정당한 권리에 속하지 않는다. 미성년자라 해도 그의 인격이 지닌 고결성이나 불가침성을 침해할 수 있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누군가를 허용하는 사회는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학교도 예외의 공간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육을 하는 학교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들은 어떤 경우에도 제한되어야 마땅하다. 학생인권조례는 그 핵심에서 이런 당위를 실현하려는 법적 장치다.

하지만 교육 활동을 방해하거나 다른 학생을 괴롭히는 등의 행위를 하는 학생을 교사가 적절한 방식으로 제재하는 행위는 학생인권 침해가 아니다. 학생인권 개념은 학생의 그런 행위를 정당하다고 하지 않는다. 인권의 기본적인 전제를 부정하는, 그래서 반인권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행위를 묵인하고 방조하는 것도 반인권적이다. 그런 행위를 한 학생은 적절한 교육적 행위를 통해 제재를 받고 교정되어야 마땅하다. 교권에는 이런 제재나 교정의 권한도 포함된다. 그런 일은 교사의 의무이기도 하다.

누가 교권과 학생인권을 침해하는가

학교라는 공간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교육적으로 접근할 것을 요구한다. 반인권적 행위를 한 학생이 가능하면 스스로 문제를 성찰하면서 성숙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돕는 것이 교육자의 1차적 의무다. 말하자면 어떤 ‘교육적 인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어쩌면 교사의 직업적 숙명이다. 물론 이러한 교육적 인내가 무제한적인 것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이 과정에서 교사에게 좀 더 무거운 도덕적 책무가 부여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종종 교사의 그런 책무가 오해되고 오도되기도 하지만, 이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확실히 교권도 침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학생인권을 과도하게 보호해서 생겨난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교권을 침해하는 학생도 틀림없이 있겠지만, 그 학생은 인권 규범을 일탈하는 행위를 한 것이고 따라서 제재되고 교정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은 교사의 권리이자 의무다. 문제는 때때로 이런 교육적 관계가 다양한 교육 외적 요소들과 행위자들에 의해 침범당한다는 것이다. 이게 진짜 문제다.

교권 침해의 가장 결정적인 당사자는 교육청과 교육부, 학교의 관리자, 학부모다. 교육 당국은 자주 고용이나 업무 평가나 승진 등과 관련해서 ‘갑’의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일상적으로 교사가 수행하는 교육 활동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교권을 침해한다. 어떤 학부모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여 교사의 인격을 모욕한다거나 불합리한 민원을 제기하고 법적 고발을 협박하면서 교권을 침해한다. 그리고 승진 등을 위한 고과 평가를 걱정하는 학교 관리자는 관료적 편의성을 이유로 교육 당국의 눈치를 보고 학부모 편을 들기 십상이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지금 드러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사회에는 이런 침해 행위를 막을 보호 장치가 거의 없다는 사실인 것 같다.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해법의 방향은 분명하다. 바로 그렇게 교육적 관계 밖의 권력이 교육 활동을 지배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많은 이들은 지나치게 느슨하게 ‘아동학대’ 개념을 규정한 아동보호법이 남용되어 교사가 법적으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하는 모양인데, 좋은 대책이 마련되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현장의 목소리에 기반해서 적절한 해결책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문제 하나는 지적해 두어야겠다. 아동보호법의 남용 문제라는 것도 진짜 핵심은 법 자체가 아니라 그 법을 악용하여 교사를 괴롭히는 학부모와 이를 막지 못하는 교육 당국의 무관심이라고 해야 한다. 현장을 잘 모르는 사법당국의 잘못된 판단도 한 몫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모두와 관련해서 교사는 아무런 대항력을 갖지 못한 채 일방적인 권력의 논리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 교사들은 무엇보다도 이런 과정에서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

이런 힘은 물론 다양한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통해 보장될 수 있다. 가령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학부모와의 갈등에서 교사들에 대한 ‘법률적 지원장치’를 만든다거나 학부모들의 민원을 전담해서 처리하는 교육 조직을 만든다든가 하는 일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장치들만으로는 교육 당국이나 학교 관리자들에 의한 교권 침해 문제는 막을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제는 과연 누가 그런 교권 보호 장치를 만들어 내서 관철할 것인가이다.

결국 교사들이 스스로 문제에 대한 적절하고 실효적인 해법을 찾아내서 제도화하고 법제화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렇다면 교사들이 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 본성상 ‘정치적인 힘’이다. 참된 해법을 찾아 제도화하고 이를 법으로 뒷받침하는 일은 결국 정치가 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사들은 이런 정치를 원천적으로 할 수 없다. 기껏해야 사회의 여론과 정치권에 슬픔과 분노를 보이며 관심과 지지를 호소할 수 있을 뿐이다. 노조가 있어도 파업을 할 권리도 없어 권리를 주장하고 보호하라고 교육당국을 압박할 힘이 없다. 정부가 제대로 된 해법은 내놓지 않은 채 엉뚱하게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관철시키려 해도,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어야만 한다. 심지어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교권의 확립을 요구하는 분노의 교사 집회를 열면서도 이 집회가 비정치적임을 강조해야 했다.

독일엔 교사출신 정치인들이 많다

한국에서 교사들은 정치적 금치산자다. 투표권은 있어도, 정당에 가입할 수도 없고 정치적 의견 개진이나 발언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자유롭게 공직에 나서지도 못한다. 교사가 많은 교육 문제를 관할하는 광역지자체의 의원이 되는 것도 쉽지 않다. 교사 출신 국회의원도 거의 없다. 21대 국회에는 더불어민주당의 강민정 의원이 유일하다. 교사 출신 교육감조차 많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광역지자체 의회 수준에서든, 국회 수준에서든, 교육청 차원에서든 진정으로 교사와 교육을 위한 제도화나 입법 활동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지금 우리나라에선 교육 현장의 목소리 자체를 들을 생각은 없이 온통 교사들을 규제하고 압박하며 교육 현장을 사실상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이 교육 관련 입법 과정을 좌지우지 하려 한다. 교육을 위해 꼭 필요한 법이 발의되어도, 압도적 절대 다수의 의원들은 교육 문제에 관심도 전문성도 없기에 그런 법은 제대로 심의도 안 되고 폐기되기 일쑤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가령 독일에서는 연방의회에 교사들이 변호사 다음으로 많이 진출한다. 선거 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최소한 연방의회 의원들 10명 중 1명은 교사 출신이라고 보면 된다. 주의회에서 교사 출신의 비중은 더 많다. 이유는 명백하다. 여기서 교사들은 높은 시민적 도덕성을 갖춘 지식인으로서 평범한 시민들을 대표하여 정치 의사결정 과정을 잘 이끌어 갈 수 있으리라고 신뢰를 받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교사들이 독일이나 다른 나라의 교사들보다 자질이나 시민적 도덕성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의 교사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게 살거나 심지어 정치를 혐오하라고 법적으로 강요받고 있다. 헌법에 명기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조항은 정치권력이 교육의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마땅할 것이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교사들의 정치적 시민성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어버렸다.

학생들은 16세만 되면 정당가입도 할 수 있고, 18세부터는 선거권도 가진다. 그러나 교사들은 말하자면 ‘반쪽 시민’이다. 가장 중요한 인권의 하나인 정치적 시민권을 갖지 못해서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들은 학생들을 제대로 된 시민으로 성장시키는 민주시민교육을 할 수 없다. 교사들이 그 신분적 한계로 인해 제대로 된 시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학생들을 온전하게 시민으로 길러낼 수 있겠는가?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 회복이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것과 같은 문제의 직접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교사가 정치적 시민권을 가진다고 다른 많은 교육 현장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사들이 스스로 문제해결의 주체가 된다는 차원의 가장 근본적인 존엄성과 관련된 문제다. 이것은 또한 가장 핵심적인 교권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이 우리 사회가 새삼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글쓴이

장은주 영산대 교수

장은주는 영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정치철학자다. 어떻게 하면 한국 민주주의가 좀 더 안정되고 성숙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필요한 철학적 인식을 다듬는 게 주된 관심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 대학에서 ‘비판사회이론’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 사회의 고유한 삶의 문법과 발전 동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고 싶어 한다. 최근에는 시민들의 민주적 역량 함양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에 관심이 많다. <인권의 철학>, <정치의 이동>, <유교적 근대성의 미래>, <시민교육이 희망이다> 같은 책을 썼다. 최근에는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적 공정 담론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고 ‘민주적 평등주의‘라는 대안을 제시한 <공정의 배신>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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