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이공계 유학생과 이공계 중인의 탄생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⑫이공계 중인의 탄생에서 태생적 한계까지
“식민지 상황에서 근대적 교육은 조선인들이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바꿀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얼마나 빨리 학교 교육에 접하느냐, 얼마나 길게 교육 과정을 거치느냐에 의해 각자의 인생이 크게 갈렸다. 그 방향은 조선인들이 선택하는 전공 분야와 맞물렸다. 과학기술은 매우 새로운 학문 영역으로, 전공자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낯설고 불확실한 전도가 이들 앞에 놓여 있었다.”- 김근배,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과학기술자 되기: 초기 북한 이공계 대학 교원들의 이력 분석”
제국대학의 조센징 그리고 과학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갑신정변의 개혁정신은 당시 조선이 반드시 이루어내야 했던 시대정신을 담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1895년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과 유사한 개혁을 실시한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갑오개혁 이후 일본 게이오 의숙에만 무려 195명의 관비유학생이 파견된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게이오 의숙에서 유학생들은 당시 조정에서 필요로 하던 군사와 기술 분야의 학문을 배웠다. 학부대신 이완용은 이들에게 “지식을 널리 넓히고 사리를 통달하여 문명 구역에 진보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갑오개혁 정부는 파견 유학생의 관리 감독을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일임했다.

이후 관비유학생은 급격히 줄어들지만, 게이오 의숙의 유학생들은 근대화를 수행하기 위한 실무관료 양성책으로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이들을 통해 대학교 전문학교 등의 고등학술교육기관이 창설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일본유학생들은 활발한 친목회 활동을 통해 1900년대 이후 일본 유학생 학회의 창립에 기여했다. 유학에서 돌아온 그들을 받아줄 곳은 별로 없었다. 이는 일본이 1860년대 500명이 넘는 관비 유학생을 통해 유럽과 미국에서 근대학문을 받아들이고, 외국인 선생을 초빙해 고등학술교육기관을 창립한 것과 크게 대비되는 일이었다.
관비유학을 통해 시작된 이공계 교육으로 1899년에는 최초의 이공계 전문학교 졸업자가, 1906년에는 이공계 대학 졸업자가 등장하게 된다. 관비 유학생의 규모는 망국과 함께 점점 줄어들게 되지만, 기술학교는 사회적인 관심을 받게되어 1900년부터는 일본으로 향한 사비유학생의 규모가 한 해 200여명으로 증가한다.
조선의 국력이 약해지고, 식민지 경험이 시작되면서 100여년 전의 한국인들은 국가를 믿지 않고 모든 부문에서 “각 개인의 주동적이고 자발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사비 유학의 경비는 모두 본인이 부담해야 했지만, 식민지의 한국인들은 기꺼이 그 돈을 들여 자식을 유학보냈다. 통치권력은 결코 해외유학을 장려하지 않았다. 망해버린 조선정부도, 일본 총독부도 외면하던 그 시기에 한국의 해외 유학은 민간 주도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먹고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과학
이 시기 근대문물은 철도를 통해 도시를 순환하며 전파되었고, 이런 지역에서 출생한 사람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근대교육을 시키려 했다. 이런 집안에서 과학기술을 전공으로 선택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이들의 동기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시민적이었다. 집안을 먹여살리기 위해, 좋은 곳에 취업하기 위해 그들은 이공계를 선택했다. 김근배는 1900년대 초반 과학기술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는 국가의 축복은 커녕, 살아남기 위해 이공계를 선택한 이들로 구성될 수 밖에 없었다.
“과학기술은 주로 중하층 출신이 진출하는 영역으로 그 사회적 위상이 높지 못했다. 개인적 신분상승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부 사람들이 우회해가는 중간지대의 성격을 띠었다. 다음으로는 일본을 비롯한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파들이 과학기술계의 주도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과학기술은 국내보다 해외 선진국에서 배워야한다는 선진지향의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어 과학기술자들이 가장 부족했던 것은 공통적으로 연구경력의 결여였다. 비록 대학을 나왔어도 연구경험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끝으로 전시에 행해진 강제배치와 노역으로 인해 과학기술자들 사이에 기업을 기피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상당수는 활동이 자유롭고 연구경력까지 쌓을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을 비롯한 학교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성은 한국 과학기술의 주요 초기 조건으로서 막강한 규정력을 발휘했다.”
한국 과학기술계의 제1세대는 개인주의적인 기조 속에 도전적인 기업환경보다 학교를 선호하며 안정을 추구하는 소시민적 성격의 인물들로 채워질 수 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서 과학기술을 통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리더가 등장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현대에도 여전히 나타난다.
이공계 중인의 탄생
조선은 망했고, 메이지 유신 시대의 일본처럼 정부주도로 대규모의 과학기술자를 키울 국가는 없었다. 식민지의 한국인들은 철저히 개인의 판단으로 과학기술을 선택해야만 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는 전공의 선택이 “다분히 전통의식과 시대상황에 사로잡혀 이루어지게 된다”는 점이었다.
전통적으로 전공분야 중에서는 법학과 문학, 그리고 의학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특히 문학은 조선시대부터 전통학문을 대표하는 분야로 인식되어 상류층 자제들은 대부분 문학이나 관직과 신분상승에 도움이 되는 법학으로 진출했다. 따라서 당시 한국인 대학 진학자들은 대개 부호 집안, 특히 신학문을 빈번히 접촉하거나 그 자극을 강하게 받고 있던 고위관료의 자제들로서 철저히 문과 지향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에서는 사회 주도층인 사무라이와 신진 사대부가 사회개혁과 과학진흥을 동시에 추구해야 할 자신들의 과제로 삼았으며, 한국과는 다르게 이들 사회에서는 근대과학이 사회발전의 핵심적인 근저에 위치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은 1880년 당시 과학자의 79%가 사무라이 출신이었고, 물리학 분야는 거의 90%에 육박했으며, 중국은 과학기술 전공자인 미국 유학생의 78%가 신진 사대부 집안에서 나왔다.
김근배의 말대로 1900년대 이전 출생자들은 근대교육의 기회가 지극히 적었던 반면,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다른 환경을 만나게 되었다. 1900년 이후의 출생자들은 고등교육의 기회가 어렵게나마 열리게 되었고, 이로써 초창기 과학기술의 주축 세대가 1910년대를 전후해서 태어나게 된다. 이들은 1900년대 이공계를 선택해 유학을 떠났던 이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식민지 시기가 끝나고 해방공간에서, 바로 이 시기 과학기술자가 되기를 선택했던 이들이야말로 국가 재건의 핵심인력이 될 운명이었다. 미군정의 ‘국대안 파동(國大案 波動)’으로 대규모의 과학기술인이 월북하기 직전까지, 서울은 리승기, 이태규, 우장춘 등의 세계적 수준의 과학기술자들이 새로운 조국의 과학기술재건을 위해 치열하게 꿈꾸던 ‘과학조선’의 공간이었다.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는 조선이 망하고 갑신정변이 꿈꾼 과학기술 근대화를 정부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던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식민지라는 경험을 거치며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2022년 한국의 유력 대선후보 3인은 검사, 변호사, 의사 출신이다. 사회지도층이 율사와 의사인 작금의 한국적 상황은 식민지 시대를 기원으로 한다. 물론 미국과 같은 선진국도 율사와 의사들이 사회 지도층을 점유하고 있지만, 적어도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사회 주도층과 과학기술자들이 같은 뿌리를 공유한 경험이 있었다. 분명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식민지의 상류층처럼 과학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았고, 만약 그들이 권력을 잡고 조선이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했었다면 한국에서도 과학기술과 사회의 모든 부문이 유기적인 관련을 맺으며 발전할 기회가 있었다.
식민지체제가 망가뜨린 ‘과학조선’
하지만 조선의 망국과 식민지 체제는 이 모든 씨앗을 짖밟았다. 개화, 자강, 문명은 추상적 구호로 전락했고 민족독립, 차별철폐, 물산장려 등이 당장 외쳐야 하는 구호가 되었다. 과학기술은 당장 대두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한국인 사이에서 외면받게 되었다. 과학은 상류계층의 문화로부터 급속하게 이탈되었고, 전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유학을 통한 과학기술 전공은 당연히 상류층이 아니라 사회 중하층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의 과학기술 1세대는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우연히 과학기술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과학기술을 전공해서는 법학이나 문학 혹은 의학 전공자처럼 신분상승의 기회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갖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던 그런 계층이었다. 식민지 시기, 과학기술은 국가주권과 민족독립 같은 정치적 문제에 밀려 부차적인 문제로 무시되었고, 결국 식민지 한국인들 사이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그나마 과학기술분야에 진출한 이들은 사회의 정치적 문제를 꺼리던 사람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 대부분은 독립운동은 꿈도 꾸지 않았고, 저항이나 대항의 논리보다는 경쟁과 출세의 논리 속에 철저한 개인주의자들로 채워져나갔다. 훗날 월북하는 당시의 과학기술자 이홍국은 당시 과학기술계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진보적 동지를 얻으려고 힘써 보았으나 당시 자연과학 계통 학생들은 개인주의적 사상이 많아서 하나도 얻지 못하였다.”
당시 과학기술을 선택한 이들은 “남들이 안해서, 성격이 내성적이고 얌전해서, 수학 과학을 잘해서, 의학분야로 진학하려다가 실패했거나 차단”되었던 것이 원인이었고, “민족발전이나 인류공헌, 아니면 새로운 과학이론 발견 등처럼 원대한 꿈과 포부를 과학선택의 동기로 내세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 김근배는 식민지 시기에 지연된 과학기술근대화의 가장 큰 실패를 사회 주도층이 과학기술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았다. 식민지 한국에서 과학기술은 보통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추락했다.
“과학진흥은 사회개혁과 함께 새롭게 부상한 사회 주도층에 의해 이끌어지며 상층문화의 일부로까지 자리잡아 갈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만큼 사회 속에서 과학기술의 위치가 크게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된 다음부터 사회과제와 과학진흥은 서로 확연히 갈라서게 되었다. 식민지체제가 가져온 가장 큰 과학기술 단절 및 파괴가 여기에 있었다.”-김근배, “식민지시기 과학기술자의 성장과 제약-인도ㆍ중국ㆍ일본과 비교해서”
사회 문제 외면한 채 출세만 좇는 이공계 중인
게다가 일본 총독부는 조선인 과학기술자들에게 좋은 직업을 제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급 과학기술 관련 직종을 독점했다. 식민지 한국인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 부족과 더불어 이런 세태는 강화되었고, 유학을 다녀온 조선 과학기술자들은 겨우 중등학교의 과학교원에 만족해야 했다. 따라서 전공을 살려 연구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조선인 과학기술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일제강점기 이공계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2,300명에 달하지만 박사학위자는 10여명에 불과한 것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1880년대에 이미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영국인보다 뛰어난 과학기술자를 보유했던 인도와 조선은 완전히 반대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 시기 이공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는 이들은 드물었고, 이태규와 이승기와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세계적 수준의 조선 과학기술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조선인 과학기술자들은 식민지 지배로 신음하는 조국의 현실을 보며 대부분 귀국을 포기했고, 결국 이들은 향후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대로 해방을 맞이한다 해도 한국이 자립적인 과학기술력을 갖추게 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과학기술자들은 사회의 문제를 외면하고 출세와 능력주의의 길을 따랐다. 이공계 중인의 탄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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