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끝에서 시작되는 감정의 폭풍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서’]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음식 영화들
먹을 것이 부족한 시대에는 통통한 여성이 풍요로움의 상징이었겠지만 지금은 날씬하고 몸 관리를 잘 하는 것이 부의 상징이다. 이런 시대에 사는 여성들은 몸매관리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가 없고, 다이어트를 몇 차례 시도해보지 않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다이어트는 먹고 싶은 욕망과의 싸움이다. 먹는 게 얼마나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는지 뼛속까지 실감하는 시기가 바로 이 다이어트 할 때다. 온갖 자극적인 음식에 마비됐던 혀가 정신을 차리는 때이기도 하다.
필자는 다이어트를 하면서 음식에 대한 욕망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특히 보식 기간이 시작되면서 소량의 채소와 단백질 식품이 허용되자 예민해진 나의 혀는 잠자고 있던 미각을 작동시켰다. 작은 방울토마토 하나, 푸른 채소, 푸석한 닭가슴살 한쪽이 그렇게 달콤하고 맛있는 줄 처음 알았다. 혀끝에 감도는 채소의 달콤 쌉싸름한 맛과 향, 세로로 갈라지는 닭고기의 육질이 그렇게까지 행복감을 주는지 몰랐다. 잡지에 나온 음식 사진도 예전의 느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음식 영화들을 보면 더 실감이 난다. 이탈리아 영화 <아이 엠 러브>에서 이탈리아의 명문 가문에 시집온 러시아 출신의 엠마(틸타 스윈튼 분)는 요리사인 아들 친구 안토니오가 만든 요리를 맛보면서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다. 격식과 예법으로 가득 찬 이탈리아 최상류층 가정에서 숨 막히는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불현듯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숨구멍이 열리듯 깨어난 감각은 엠마를 안토니오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아이 엠 러브>에서 엠마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음식은 ‘우하 스프’라는 러시아 전통 음식이다. 엠마의 아들은 안토니오가 만든 우하 수프를 보고서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챈다. 그로 인해 충격을 받은 아들이 사고로 숨지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지만, 엠마는 힘들게 찾은 진정한 자아를 포기하지 않고 권세와 부를 뒤로 한 채 소박한 운동복 차림으로 고고한 저택을 뛰쳐나간다.
죽어 있던 자아를 찾으려는 욕망을 깨운 촉매제는 바로 요리였다. 엠마가 아들 친구인 셰프 안토니오가 만들어준 새우 요리를 먹으면서 환상에 빠지는 장면은 엠마의 죽어 있던 감각이 꽃봉오리가 벌어지듯 피어나는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영화 <초콜릿>은 흑백의 세계인 한 마을이 오색찬란한 색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마법의 힘을 발휘하게 만든 것은 바로 <초콜릿>이다. 빨간색 망토를 입은 모녀가 한 마을에 도착한다. 외지에서 온 한 여인(줄리엣 비노쉬 분)은 그 마을에 초콜릿 가게를 차린다. 그 마을의 시장은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도덕적으로 엄격할 것을 강요하며 사람들을 옥죄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미건조하고 기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마을 사람들에게 줄리엣 비노쉬는 각자에게 맞는 맞춤형 초콜릿을 권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종 초콜릿을 맛보면서 자신이 잃어버렸던 욕망을 되찾고 마을은 사랑과 정열로 뜨거워진다.
이외에도 자의든 타의든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살아갈 의지를 돋워주는 것이 바로 요리임을 보여주는 영화들도 있다. 일본 영화 <스키야키>, <남극의 셰프>가 그런 영화들이다.
<스키야키>의 배경은 교도소다. 지루하고 억압된 생활을 이겨내기 위해, 그들은 새로운 게임을 생각해낸다. 인생에서 가장 맛있고 감동을 주었던 음식을 이야기하는 게임이다. 가장 맛깔스럽게 묘사해 침샘을 자극하면 1점씩 올라간다. 침 한번 삼킬 때마다 1점이다. 최후의 승자에게는 1년에 딱 한 번, 설에 제공되는 고급 도시락에서 남의 반찬을 한 개씩 가져올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다. 그래서 수감자들은 과거의 기억에 최대한 살을 붙여가며 음식의 맛을 묘사하기에 열을 올린다.
그들이 특정한 음식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 음식이 맛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 순간의 감정과 깊게 관련돼 있다.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가 마지막으로 만들어 준 핫 케익, 자신을 떠난 애인이 마지막으로 만들어준 국수,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어쩌다가 가족이 함께 먹었던 소고기였기에 결코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극한 환경을 배경으로 한 다른 영화 <남극의 셰프>의 배경은 남극의 돔 후지 기지라는 곳인데, 평균기온은 영하 54도이고 고도는 후지산보다 높은 약 3800m이다. 펭귄이나 바다표범은커녕 바이러스조차 못 사는 극한지다. 그곳에서 빙하를 연구하기 위해 각 영역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1년 반 동안 연구소에 갇혀서 살아야 한다.
그들에게 유일한 낙은 바로 식사 시간이다. 그래서 조리담당인 니시무라가 가장 큰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추운 바깥에서 중무장을 하고 관측활동 중이던 대원들에게 점심식사를 알리는 스피커 소리가 난다. “오늘 메뉴는 맛있는 주먹밥과 따끈따끈한 된장국입니다. 주먹밥 속 재료로는 연어, 장조림, 명란젓이 들어갔고 오늘은 특별히 홋카이도산 연어알도 준비했으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모두 식당으로 와주세요.” 그러면 대원들이 눈밭에서 미친 듯이 뛰어온다. 그리고 다들 진땀을 흘리면서 미소시루와 연어주먹밥을 먹는다. 니시무라는 그 모습을 매우 만족스럽게 쳐다본다. 사람들이 식사 때마다 모든 것을 다 잊은 듯 허겁지겁 식사에 몰두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미소를 짓는 니시무라가 이곳에서 느끼는 낙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이런 영화들은 언제 봐도 기분 좋고 행복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은 살만하다는 행복한 환상에 잠시나마 취하게 만든다. 때로는 그런 환상이 주는 힘이 우리의 삶을 유지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가장 여린 정서를 자극해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이라는 것을 이런 음식 영화들을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