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리고 어떤 ‘정치교체’인가?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박물관으로 가야할 ‘87년 체제’에 대해 개헌 각오하고 시민들이 나서야할 개혁

선거막판 유세현장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왼쪽)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사진= 연합뉴스
선거막판 유세현장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왼쪽)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사진= 연합뉴스

정권교체로 극복안되는 ‘87년 체제’ 유산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이번 선거 막판에 매우 흥미로운 의제 하나가 던져졌다. 이런저런 ‘소확행’ 공약만 주로 이야기하던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가 얼마 전부터 ‘정치개혁’의 필요를 이야기하더니, 며칠 전에는 민주당이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이나 위성정당 방지 및 연동형 비례대표제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정치개혁안을 당론으로 확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일단 누가 보더라도 ‘선거용’인 건 분명하다. 야당이 계속 ‘정권교체’의 필요를 강조하니, 이재명 후보가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정치교체’를 들고 나온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물 건너갔지만, 안철수 후보의 완주를 유도하려 했던 의도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이 정치개혁은 단지 이번 선거에만 국한되지 않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진작부터, 그리고 바로 지난 칼럼에서도, 이런 정치개혁의 필요를 강조했던 나로서는 경위야 어떻게 되었던 크게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정치개혁이 제대로 실현될 수만 있다면 어쩌면 이번 대선은 매우 ‘역사적인’ 선거로 기록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기대도 한다. 역사는 이렇게 아주 우연한 방식으로 진전하는 것이구나 싶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 35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 차례 정권교체를 통해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집권하고 통치해 왔다. 이런게 민주주의의 중요한 양상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시민들이 분명하게 확인했던 것은 단순한 정권교체만으로는 우리 정치의 양상이나 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민들이 목숨을 바쳐 이뤄낸 지금의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정치는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늘 무능했으며, 대통령과 여당은 임기말이면 늘 정치적 궁지에 몰렸다. 그리하여 대선 때만 되면 새로운 정권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상황이 계속 반복됐더랬다.

어느당이 집권해도 똑같아

단지 특정 대통령 개인 또는 정당의 잘못된 정치적 성향이나 양식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든 양상은 늘 비슷했으니 말이다. 진짜 문제는 우리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 자체의 기본구조다. 이 체제에서는 진보 정권에서든 보수 정권에서든 정치권은 늘 두 진영으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해 왔고, 그 때문에 나라의 중요한 일들이 공동선을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진영적 편익에 따라 판단되고 처리되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정치는, 시민들 사이의 의견을 교환하고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해법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진영에 따라 서로 다르게 규정된 진리를 고집스럽게 관철하는 이전투구의 장이 되었다. 이런 ‘정치적 양극화’는 우리 사회의 숱한 문제들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문제들을 증폭시키거나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뿌리가 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대변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정치에서 아예 배제되어 버렸다. 정치적 다양성은 사라지고, 정치는 서로 지역적 기반과 정치적 색깔만 달리하는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공동선으로 포장되었고, 해결해야 할 숱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민주적인 숙의 대신 일부 정치계급의 독단이 정치 과정을 채웠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평범한 시민들이 주권을 가진 민주정이 아니라 사실은 일부 소수 엘리트가 정치적 과정과 권력을 독점하는 과두정이 되고 말았다. 정권교체를 넘어서는 정치교체에 대한 요구는 바로 이 맥락에서 제기된다.

다당제가 신념이라던 안철수가 또다시 후보를 사퇴하면서 정권교체를 통해 정치교체를 이루겠다고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국민의 힘과 국민의 당이 합당하고 두 사람이 함께 통합정부를 이룬다고 해서 정치가 바뀔 리 만무하다는 사실은 이미 역사적으로 확인된 적이 있다. 국민의 힘의 뿌리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애초 서로 다른 정치적 지향을 지녔던 3당이 합당함으로써 탄생했던 민주자유당이었고, 그것은 지금의 양극화된 정치의 뿌리였다.

외국에서도 고민하고 개선한 문제들

정말 해결해야 할 근본 문제는 우리 정치의 근본 틀을 규정하는 국회의원 선거제도다. 이걸 바꾸지 않으면 정치교체는 구조적으로 또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선거제도는 단순다수결 승자독식의 원리에 기초하는 소선거구제다. 이 제도의 문법은 거의 필연적으로 양당 체제를 유도하고, 두 거대 정당에 수렴되지 않는 많은 정치적 지향들이 정치적으로 대변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이 제도가 지역주의마저 첨예화한다.

이 제도에서는 가령 호남의 국힘당 지지자들이나 영남의 민주당 지지자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국회의원을 뽑을 수 없고, 정의당 같은 군소정당 지지자들도 지역구를 통해서든 비례대표를 통해서든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정치 과정에 제대로 반영할 방법을 가질 수 없다. 이들은 이번 대선 같은 박빙의 선거 과정에서는 이른바 ‘사표’ 논란에도 시달린다. 쉽게 말해 이 제도에서는 모든 유권자의 한 표가 똑같은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몇 년 전에는 제한적이라도 각 정당에게 지지율에 연동하여 의석을 배분하는 제도를 새로이 마련했지만, 알다시피 두 거대 정당의 위성정당 창당 때문에 외려 양당 체제는 더 강화되고 말았다.

물론 단순다수결 선거제도를 아예 그 자체로 비민주적이라 할 수는 없다. 어차피 대의(표)민주주의에서 주권자들의 뜻은 어떤 식으로든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정치 과정에 반영될 수밖에 없는데, 단순다수결 소선거구제는 가장 직관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제도임에 틀림없다.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들인 영국이나 미국도 수백년 동안 이런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제도가 유일하게 민주적인 선거제도는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나라들에서 이 제도가 갖는 부작용과 문제들은 하나둘씩 쌓여만 왔다. 그래서 이들 나라들에서도 그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다만 기존 제도의 관성 때문에 쉽게 바꾸지 못했을 뿐이다.

가장 모범적인 제도 가진 독일의 사례

후발 민주주의 국가들이나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다양한 이유에서 선거제도를 성찰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나라들은 좀 더 민주적인 대의제도를 도입해 왔다. 모든 의원을 완전하게 비례대표제를 통해 선발하는 나라도 있었고, 독일처럼 여러 제도를 혼합하는 나라도 있었다. 이 나라는, 나치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가 무너졌던 역사적 경험을 돌이켜 보면서, 유권자들의 뜻을 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정치 과정에 반영할 수 있는 지역구 소선거구제의 장점은 살리면서도 앞서 말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지역구와 1 대 1의 비율로 의석을 채우는 비례대표제도 함께 조합했다.

여기서는 모든 유권자의 1표는 동등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대원칙에 따라 모든 정당이 의회에서 그 당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비율만큼 의석을 차지할 수 있게 한다(물론 지지율 5% 미만의 정당에겐 의석이 주어지지 않는데, 이는 군소정당의 난립을 막기 위한 장치다). 그래서 정당투표로 정당별 총 의석 수를 결정한 다음, 지역구 당선자 수를 뺀 나머지 의석을 비례대표로 배분하는 방식을 쓴다.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 정당이 지역 소선거구에서 많이 이겨 전체적으로 애초 정당지지율로 배당된 의석 수 보다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할 수도 있는데, 이런 ‘초과의석’도 인정한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의원정수를 고정하지 않고 선거 결과에 따라 매번 달라지게끔 설계했다. 전문가들은 이 제도를 가장 이상적인 민주적 선거제도로 평가하는데, 뉴질랜드나 타이완 같은 다른 나라들도 이런 제도를 모방했다.

독일의 제도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 제도가 민주주주의 관점에서 가장 정의로운 제도라는 점 때문이다. 한 사회의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주권자 시민들이 모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민주주의의 원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독일의 제도는 원칙적으로 모든 시민의 다양한 정치적 지향이 의회에 고스란히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근본적인 장점이 있다. 물론 그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부 국가들에서처럼 의회를 전부 비례대표로만 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독일은 지역구 제도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지역민들의 의사를 반영해야 한다는 원칙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제도의 장점을 잘 조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개헌이 필요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이 제도에 대해 더 길게 논의할 수는 없다. 그리고 역사와 토양이 다른 우리나라에 무턱대고 똑같은 제도를 도입하는 게 맞을지는 더 따져 보아야 할 문제다. 무턱대고 독일 식 제도를 도입하자는 게 요점은 아니다. 가령 이 제도가 우리나라의 대통령제와 무리 없이 잘 어울릴지 어떨지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내각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대통령의 권한을 많이 줄이고 다양한 정당들이 민의를 반영하여 합의하는 정치적 결정이 더 큰 무게를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개헌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맥락에서 중요한 건 우리나라의 지금 제도가 상당한 정도로 민주적 정의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점, 두 거대 정당이 독점하는 정치적 지향을 다원화시켜 가능한 한 다양한 민의를 고르게 반영할 수 있는 의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역주의도 완화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어떤 형식이든 국민의 지지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고 원칙적으로 사표가 생겨나지 않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더 확대해야 한다는 대원칙만 분명하다. 그 구체적 방식이 몇 년 전 선관위가 독일 제도를 모방해서 제안했던 대로 ‘권역별’일지 아니면 다른 형태일지는 열려 있는 문제다. 추후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하면 된다.

국회의원 정수는 국회 손으로 해결못해

제일 어려운 문제는 국회의원 정수다. 선관위의 권역별 비례대표제 안은 독일의 제도를 우리나라에 적용한 획기적 안이었는데, 여야 정당들이 모두 거부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지역구 의석을 200석으로 줄이고 비례대표 의석을 100석으로 하자는 데 있었다. 재선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의석을 대폭 줄이자는 안에 찬성할 리가 없었으리라. 독일처럼 지역구와 비례대표의 의석 비율을 1 대 1로 해서 두 제도의 장점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려면, 그리고 현행 지역구를 그대로 두어 현역 의원들의 이해관계에 반하지 않으려면,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는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나라는 의원 1인이 대변하는 시민들의 수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너무 많기도 하다. 안타까운 건 우리 국민들이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지금 국회의원 수도 너무 많다고 여긴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우리 국민들은 의원 정수 확대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이는 현행 준연동형제도 같은 기형적 제도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내가 볼 때 이 곤란한 상황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은 결국 우리 시민들이 나서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실 중차대한 선거제도 개혁 문제를 정당들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다. 선거용으로 이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이제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이 문제를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중은 제 머리를 깎을 수 없다고 했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기득권에 매인 현직 국회의원들이 민주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에 쉽게 합의하기는 힘들지 싶다.

시민들이 나서지않으면 안된다

가령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려면 지금 의원들이 누리는 세비나 여러 국가적 지원들을 상당한 정도로 축소해서 국회 운영비용이 전체적으로는 늘어나지는 않도록 해야 국민들도 어려운 대로 개혁안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지만 현직 국회의원들이 이런 일을 스스로 쉽게 결단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시민들에게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맡기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 초기 고리 원전 건설 재개 문제를 두고 도입했던 공론조사 방식의 ‘시민의회’를 소집하여 시민들의 합리적이고 숙고된 판단에 선거제도 개혁을 맡기는 건 어떨까?

어쨌거나 이런 일이 정치권의 선의로만 가능할 리 없다. 시민들이 뜻을 모아 한편으로는 정치개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동료 시민들과 교감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정치권을 압박하여 더 정의로운 민주적 선거 및 정치 제도가 도입될 수 있도록 나서야 한다. 이번 대선의 역사적 의의는 ‘87년 체제’라 불리는 지금의 낡은 정치제제 자체를 박물관으로 보내는 데 있다. 이제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 참되게 정치 자체를 교체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우리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꼭 필요하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

안타깝게도 지금 국민의 힘 쪽에서는 이런 일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다당제가 신념이라던 안철수 쪽도 사실은 정치적 잿밥에만 관심이 있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정의당은 진작부터 다당제가 가능한 방향으로 선거제도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정치개혁을 결의한 민주당의 진정성을 신뢰한다는 전제 위에서 하는 말이지만, 독자적인 정치적 정체성만 강조하다 자칫 자신들에게도 유리할 정치개혁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부디 시민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글쓴이

장은주 영산대 교수

장은주는 영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정치철학자다. 어떻게 하면 한국 민주주의가 좀 더 안정되고 성숙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필요한 철학적 인식을 다듬는 게 주된 관심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 대학에서 ‘비판사회이론’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 사회의 고유한 삶의 문법과 발전 동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고 싶어 한다. 최근에는 시민들의 민주적 역량 함양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에 관심이 많다. <인권의 철학>, <정치의 이동>, <유교적 근대성의 미래>, <시민교육이 희망이다> 같은 책을 썼다. 최근에는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적 공정 담론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고 ‘민주적 평등주의‘라는 대안을 제시한 <공정의 배신>(피어나)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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