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이념 전쟁인가?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21세기 민주국가에서 할 논쟁일까 ‘자유민주주의’ 이름으로 공안정국을? 진보도 반일보다 민주주의 싸움 나서라
윤석열의 시대착오적 ‘이념 전쟁’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뜬금없는 ‘이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시작했다. 진작부터 황당한 극우적 인식을 드러내면서도 자신이 무슨 진정한 자유의 대변자라고 우기던 사람이었다. 그는 지난 번 자유총연맹에 가서는 ‘종전선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반국가세력’일 뿐이라고 하더니,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공산 전체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민주주의, 인권, 진보 운동가’로 위장하고 있다며 사실상 진보 야권을 겨냥한 이념 공세를 퍼부었다.
참으로 시대착오적이 아닌가? 이런 이야기는 사실 과거 유신 시절 이래의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빨갱이 타령’을 반복하는 것일 뿐인데, 이게 어디 21세기 민주화된 대한민국 대통령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 기대함직한 일인가? 그는 25일 열린 국민통합위원회에 참석해서는 시대착오적인 낡은 이념을 신봉하는 진보는 민주주의를 날게 하는 한 쪽 날개가 될 수 없다고도 했는데, 도대체 누가 시대착오적인지 모르겠다.
이념 때문에 시작된 분단 체제가 작동하고 있는 이 나라의 정치에서 보수는 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념적 정체성을 강조해오곤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실제로 적지 않은 유권자들도 여전히 북한이나 우리 사회 내부의 반국가 세력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한다는 정치적 선동에 반응해 왔다. 그래서 한국의 보수들은 늘 크고 작은 이념적 쟁투를 벌이곤 했다. MB 정부 시절 건국절 논란이 그랬고, 박근혜 정부 시절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또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 정부 전체가 전 방위적으로 이념 투쟁에 나서고 있다. 대통령이 앞장 서 야당과 비판 세력 전체를 반국가세력 또는 공산 전체주의 신봉자나 추종자로 만드는 공세를 퍼붓는 것에 더해, 후보자였던 이동관 방통위원장은 ‘공산당 언론’을 타도하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하면서 그 명분으로 언론 장악을 공언한다. 새로 임명된 통일부장관은 흡수 통일이 아닌 남북교류나 평화를 이야기 하면 모두 반국가세력이라는 인식을 보이더니 장관이 되어서는 그런 인식에 따라 사실상 통일부를 해체하고 있다.
심지어 국방부까지 나서 홍범도 장군 같은 독립전쟁 영웅들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하고 친일 경력이 분명한 백선엽의 흉상으로 대체하겠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민주주의를 부정해서 시민들이 쫓아냈던 이승만의 기념관을 짓겠다는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함께 뛴다. ‘민주화운동동지회’를 표방하는 전향한 옛 운동권 일부가 모여 우리 사회의 진보는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사상이 불투명한 쓰레기라며 맞서 싸우겠다고 나섰다. 지금이 80년대도 아니고 뜬금없이 무슨 ‘사상투쟁’을 벌이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보수 언론은 연일 신나서 대서특필이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걸까?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자유민주주의?
윤 대통령과 보수 진영이 왜 이렇게 엉뚱해 보이는 이념 전쟁에 몰두하는지 솔직히 잘 이해는 되지 않는다. 온갖 실정과 무능을 드러내며 국정이 표류하고 있는데 여소야대 상황에서 타협이나 협상을 통한 정상적인 민주정치를 할 줄 모르니, 이념적 갈라치기를 통해 자기편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겠다는 심산 같기는 하다. 내년 총선 전략의 일환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대착오적 이념 전쟁을 좋아할 유권자가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 어디까지 가려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이념전쟁이 나라에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단순히 이념이 아니다. 이념은 인사와 정책으로 표현되고, 정책은 이 나라의 법과 제도 그리고 사회의 문화적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금 분위기를 보고 있노라면 무슨 새로운 ‘공안정국’이라도 벌어지는 게 아닐지 걱정이다. 윤 대통령의 반공, 반북주의는 한반도의 평화마저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다가는 우리가 알고 있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사라질 수도 있다. 나는 예전에도 이 칼럼에서 윤 대통령이 결코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지적한 적이 있지만(윤석열은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지금 윤 대통령과 보수 진영은 엉뚱한 이념 전쟁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우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이 지독한 역설을 우리가 그저 방관하고만 있어도 좋은지 모르겠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설사 그 체제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도 무슨 폭력을 사용하여 현재적이고 긴박한 위협을 초래하지 않는 한 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체제다. 지금 윤 대통령은 사실상 ‘민주주의, 인권,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사실 나도 그 중의 하나일 수도 있는데)을 싸잡아 위장한 공산 전체주의 추종자들일 수 있다고 공격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그런 황당한 주장도 일단은 존중하지만, 대통령이라는 자가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국가 권력이 엉뚱하게 쓰일 수도 있어서다. 아무런 객관적 근거도 없이 민주, 인권,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여 사회에서 배제하거나 심지어 법적인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일종의 협박이다. 어떤 자유민주주의에서도 그러지 않는다.
윤 대통령과 민주화운동동지회를 포함한 추종자들의 인식과 어법은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나 민주공화국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을 부정하는 적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맞서 싸우겠다는, 얼핏 보기에 매우 지당한 원칙과 신념의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 얼핏 독일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성장했던 경험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며, 독일에서 만들었던 무슨 ‘전투적 민주주의’ 또는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과도 닮았다.
문제는 그런 싸움이 자유보장적 법과 제도의 체계를 손보고 강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민들의 사상에 대한 공격이나 비판 세력에 대한 정치적 갈라치기의 수단으로 나타날 때다. 그럴 때 그 원칙과 신념은 다름 아닌 자유민주주의 체제나 민주공화국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박정희 유신 체제의 정당화 논리가 딱 그랬다. 그 논리의 핵심은 ‘국가보안법’을 인권과 민주주의 원리보다 우위에 두는 데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빨갱이’로 지목되면, 그에게는 어떤 인권도 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우겼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민주화운동 인사들에 대한 무분별한 체포, 감금, 고문, 사형이 그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윤 대통령은 지금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자는 것인가?
진보의 성찰도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우리 진보 진영 전반은 대체로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우리 보수의 반-자유민주주의적 지향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제대로 된 이념논쟁을 해 볼 법도 하지만, 그냥 침묵하거나 수세적이기만 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번 광복절 경축사를 두고서도 일본을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동반자라고 했다는 데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어 비판한다. 나는 혹시 이러는 게 우리 진보 진영 일반의 이념적 편향성 때문은 아닌지 싶어 걱정이다.
물론 이 편향성은 보수 쪽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그러한 편향성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것이다. 무슨 ‘주체 사상’ 같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이념이 문제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이념에 사로잡혀 있는 진보 정치인은 아무도 없을 거다. 문제는 우리 진보가 민족주의적 이슈에는 격하게 반응하면서도 우리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을 건드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진보 주류는 어떤 ‘좌파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과거의 주사파도 이런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좌파 민족주의 경향은 제국주의 침략을 경험했던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관찰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분단, 그리고 미국의 독재 체제 지지 같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배경으로 이런 좌파 민족주의 흐름이 생겨났다. 그런 배경 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에 대한 강한 열망이 모종의 정의감으로 표출되면서 일정한 정치적 세계관으로 정립된 것이다. 무슨 잘 확립된 체계적 이념이라기보다는 어떤 묵시적인 정치적 지향 같은 것이다.
솔직히 이런 정치적 세계관의 문제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런 세계관이 보수가 벌이는 엉뚱한 이념 전쟁의 빌미를 주는 것도 문제지만(예를 들어 진보가 ‘반일 종족주의’에 빠져있다는 비판), 그 때문에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우리 진보가 잘못된 정치적 초점에 매달려 온 것도 사실이다. 우리 진보는 그동안 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처지를 개선하는 문제보다는 민족적 의제에 더 많은 열정을 쏟았다. 우리 보수 진영을 무턱대고 ‘토착 왜구’라는 렌즈로만 보면서 많은 정치적 오류도 낳았다. 지금처럼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가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면서 진보의 낡은 이념을 공격해도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싶다.
어쩌면 윤석열의 시대착오적 이념 시비 따위에는 너무 많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대 민주 정치에서는 이념 그 자체보다는 실질적인 사회 문제 해결 역량이 더 중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진보가 지금처럼 이념 문제 자체를 아예 무시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동안 진보는 불투명한 이념적 지향 때문에 우리 사회의 진짜 중요한 문제들을 제대로 포착하는 데서도 실패했고, 필요한 문제 해결역량도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진보 내부에서 필요한 사상적 혁신을 위한 치열한 성찰이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바탕 위에서 지금 우리 보수가 벌이고 있는 이 엉뚱한 이념전쟁을 제대로 끝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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