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계몽주의자 ‘이광수의 친일’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17)서구 계몽사상가, 과학 통해 사회 진보로 나아가 이광수, 과학을 새 정신적 문화 창조 도구로만 인식 “과학 통해 조선의 미개함에 귀착...친일행위로”

콩도르세와 이광수를 비교하면, 근대과학의 사회적 변용인 계몽주의가 이를 수 있는 두 극단을 마주하게 된다. 계몽주의가 사회적 변혁과 연결되지 못할 때 계몽주의는 언제나 권위주의와 결부되며, 이렇게 인식된 위계는 이광수에게 친일이라는 행위로 나타난다.
콩도르세와 이광수를 비교하면, 근대과학의 사회적 변용인 계몽주의가 이를 수 있는 두 극단을 마주하게 된다. 계몽주의가 사회적 변혁과 연결되지 못할 때 계몽주의는 언제나 권위주의와 결부되며, 이렇게 인식된 위계는 이광수에게 친일이라는 행위로 나타난다.

“1910년대 이광수는 당시 조선의 청년 엘리트에게 서양 근대과학이 가한 충격이 얼마나 심대했던가를 명확하게 예증한다. 일본 유학 시절 한때 자연과학만을 학문이라고 여길 정도로 자연과학을 경배했던 그는 과학의 보급이 조선민족의 갱생에 핵심적이라고 믿었고 과학지식을 기반으로 조선 사회와 문화의 변혁을 추구했다.”- 황종연, “신 없는 자연-초기 이광수 문학에서의 과학-”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독자적인 과학기술의 기반을 마련했던 일본과 달리, 1910년 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조선엔 과학기술은 낯선 학문일 뿐이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나라가 망하고 과학기술에 가장 먼저 눈뜬 이들은 일본유학파들이었다. 특히 이들 중 이광수는 뛰어난 문학적 기재로 어린 나이에 주목을 받았다.

이광수를 중심으로 한국 지식인들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 전해진 과학기술은, 현실에 기반한 연구활동이 아니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미지의 학문이었다. 이렇게 망국으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벌어지면서 현실적 구체성을 잃은 문학작품 속의 과학은 이데올로기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이광수가 받아들인 과학의 종착지는 계몽주의로 이어졌고, 결국 ‘민족의 개조’라는 친일논리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모든 계몽주의가 그랬던건 아니다.

계몽주의의 이성과 자연, 그리고 과학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의 시기에 계몽사상가들은 과학혁명이 자연과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 전반에 명백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믿었다(Hankins, Thomas L. 과학과 계몽주의). 계몽사상가들에게 ‘이성’은 올바른 방법의 핵심이자, 지식과 삶의 소중한 안내자였고, 대부분의 경우 이성의 기본모형은 수학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당시를 ‘빛의 세기’라 불렀는데, 프랑스 외부에 있던 독일의 칸트 같은 철학자는 이 당시의 사상을 계몽주의라 불렀다. 칸트는 계몽을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말했고, 그 표어로 “감히 알려고 하는 것,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는 것”을 내세웠다.

이사야 벌린의 말처럼 18세기의 사상은 17세기 동안 수학적/물리학적 과학에 의하여 이루어진 자연과학적 발전에 의해 크게 압도되었다. 그리고 18세기의 계몽사상은 17세기 과학혁명이 이룬 성과들을 사회 각 분야에 적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볼테르는 뉴턴의 고전역학을 무기로 절대왕정을 부정하는 에세이를 쓸 수 있었다. 신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근대과학의 표준을 만들었다는 뉴턴은 1704년 쓰인 그의 책 <광학>에서 이 작업을 통해 “도덕철학의 영역이 확대될 것이며, 신의 목적은 자연의 빛에 의해 드러날 것”이라고 썼다. 신과 자연은 동일하다는 범신론이 유행했고, 디드로, 돌바크, 라메트리 등은 전투적 무신론자임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토머스 핸킨스는 이 시기에 “자연법칙의 발견은 반드시 도덕법칙의 토대를 형성하는 신의 의도를 알아내는 데 이르게 되었다”고 표현했다.

이성과 자연은 그 자체로 충족적이고, 이성을 사용해서 자연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던 18세기 계몽주의는 자연과학의 확실성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까지 나아가게 된다. 바로 이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 속에서 계몽주의자들은 자연철학의 일종이었던 자연과학의 지식과 방법론을 사용해서 새로운 도덕철학을 구상하려 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중심이 되어 편찬했던 백과전서 뿐 아니라, 돌바크의 <자연철학>에서 나타난 무신론, 루소의 <사회계약론>,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등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하지만 핸킨스에 의하면, 자연과학으로부터 도덕철학을 이끌어내려던 계몽주의의 실험은 두 가지 역설을 만나게 된다. 첫째, 실험과 관찰을 통해 발견하는 자연법칙은 당위를 밝혀낼 수 없었다. 즉, 자연과학으로부터 도덕적인 내용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애초에 가망 없는 일이었고, 이는 19세기에 ‘자연주의 오류’로 정식화되었다. 둘째, 자연법칙을 적용해 찾아낸 현상들은 법칙에 의해 완벽하게 예측되는 것이어야 했다. 즉, 자연법칙으로부터 도출된 도덕철학은 결정론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계몽사상가 대부분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공유했다. 물리적 자연법칙에 의해 결정되면서 자유로운 인간이란 모순이었다. 자연과학으로부터 도덕철학을 구축하려던 계몽사상은 따라서 언제나 다른 학문과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 밖에 없었다.

18세기 계몽사상이 프랑스대혁명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면, 20세기 초 식민지 조선에서 애국계몽운동 역시 향후 독립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이광수는 일본유학을 통해 과학지식의 우월함을 받아들였고, 문학작품을 통해 과학의 중요성을 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귀결은 많이 달랐다.
18세기 계몽사상이 프랑스대혁명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면, 20세기 초 식민지 조선에서 애국계몽운동 역시 향후 독립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이광수는 일본유학을 통해 과학지식의 우월함을 받아들였고, 문학작품을 통해 과학의 중요성을 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귀결은 많이 달랐다.

이광수와 콩도르세 - 계몽의 두 극단

“종속을 가져오는 어떤 불평등도 존속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평등한 교육 자체가 유리한 점을 타고나 자연스럽게 더 훌륭해진 사람들의 우월성을 증가시키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육의 평등이 유지되기만 하면 충분히 이 우월성이 현실적 종속을 야기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각자가 법을 통해 향유할 수 있도록 보장된 권리들을 다른 사람의 이성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교육받게 된다. 그때 어떤 인간의 우월성은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악덕이 되기는커녕 만인의 선에 기여할 것이고, 계몽주의자들처럼 재능 있는 사람들은 사회의 공통된 유산이 될 것이다.”- 콩도르세,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자연과학의 확실성 추구를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통해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던 18세기 계몽사상가 대부분은 자연과학지식으로 무장한 도덕철학자들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1910년대 <무정>이나 <개척자>를 통해 자연과학에 대한 경배와 동시에 식민지 조선을 계몽하려 했던 이광수는 18세기 계몽사상가들과 닮아있다. 일본유학을 통해 이광수는 “자연과학만이 학문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과학의 보급만이 조선민족의 갱생에 핵심이 된다고 굳게 믿는 지식인으로 재탄생했다.”- 황종연, “신 없는 자연-초기 이광수 문학에서의 과학-”

이광수의 초기작 <개척자>는 조선의 독립운동이 더이상 활발하지 않은 식민지 상황을 묘사하면서, 일본 공업학교 출신의 주인공이 화학실험실을 통해 연구하는 모습을 조선이 다시 독립하는 일종의 증거로 내세운다. 이광수는 과학의 힘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세계를 통치하는 사람을 조선 청년의 이상으로 여겼고, 따라서 그에게 교육이란 바로 과학적 탐구와 동일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광수의 문학 속에 나타난 과학을 연구한 황종연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초기 이광수 문학을 두고 과학과 관련하여 가능한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유럽사상사에서 보통 급진적 계몽(radical Enlightenment)이라고 불리는 사고 양식에 근접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소설이 단지 자연주의적, 기계론적,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찬가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의 소설 속에 과학자를 등장시키고, 성경 대신 진화론적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를 그리고는 있지만, 이광수는 사랑의 불멸성을 이야기하며 기계론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고유한 마음의 기능에 대한 집착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이광수의 초기 소설 속엔 인간 사회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생존경쟁이라는 자연법칙과 동시에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도록 만드는 마음의 기능, 즉 ‘정’이 나타난다. 이광수는 바로 이 ‘정의 만족’이야말로 문학의 완성이라고 말했으며, 문학을 통해 뉴턴적 다윈적 세계를 배경으로 인간 생존을 묘사하는 동시에 그 세계에 대해 소원한 인간의 마음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식민지 시기 대표적 소설가 이광수의 과학에 대한 이런 계몽주의적이면서도 낭만주의적인 태도는 초기 이광수의 작품을 기점으로 한국 문학이 과학에 대하여 충정과 반심을 함께 가지기 시작하게 만든 촉매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20세기 식민지 조선의 계몽주의자 이광수는, 여전히 18세기 계몽사상가들과 비슷한 사고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과학과 문학’에 대한 장에서, 핸킨스는 고전적 인문주의 전통에서 자연철학은 문학 혹은 문예의 영역에 속해 있었고,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문학과 과학의 분리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계몽주의 시대에 과학은 이성을 위해 중요한 학문이었지만, 여전히 문학이 강조되었다. 볼테르, 돌바크, 디드로, 달랑베르, 루소 모두 자연과학에 직간접적으로 몸담고 있었지만 이들은 여전히 그들의 문학을 통해 ‘문예인’으로 인정받고 싶어했다. 프랑스 계몽주의 시기에 유행했던 각종 살롱은 바로 이런 문예인들의 집합소였고, 백과전서의 편집자들은 그들의 문학적 기예를 자랑했다.

계몽사상가들도, 이광수도 진보하는 자연철학이 발견한 과학적 지식들 위에서 역사를 신의 의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해방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라는 희망 없는 상황 속에서 과학을 아주 희미한 희망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던 이광수는, 계몽사상가들처럼 과학을 통해 한 걸음 더 진보한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좌절해야 했다.

계몽사상가들은 전통적 가치들을 철저히 과학적 탐구에 귀속시킴으로써 ‘당위’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그들은 자연과학 자체는 완전히 객관적이며 윤리적인 내용이 없지만, 바로 그러한 과학의 객관성이 자연철학자들을 덕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객관성은 이기심과 야만의 반대개념이며, 자연철학자들은 자신들보다 인류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과학의 무미건조한 기술적 방법론과 결정론에 대한 추구를 극복해나갔다.

즉, 계몽사상이 과학과 문학 혹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긴장관계를 해소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식은 과학적 지식과 과학적 방법론이 사회의 진보에 봉사함으로써만 가능했다. 사회의 변화를 위해 동원되지 못한 과학은 올바른 계몽사상이 될 수 없었다.

후기 계몽주의 시대에, 콩도르세는 바로 이런 계몽사상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준다. 어린나이에 프랑스 과학원에 발탁되어 백과전서의 집필에도 참여했던 콩도르세는, 라플라스는 물론 라부아지에 등의 과학자들과 공저를 했을 정도로 뛰어난 수학자였지만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혁명에 동참해 싸웠으며,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들인 카르노, 푸리에 등도 혁명에 함께했다. 이후 콩도르세는 노예제도를 비판했으며, 죽기 직전까지 모든 시민이 공교육을 받는 국민교육을 제도화시키기 위해 힘썼다.

콩도르세가 보기에 과학자는 시골에 은둔하면서 덕성만 유지한 채로 있을 수 없으며, 이성을 통해 사회를 바꿀 의무가 있는 직업이었다. 콩도르세에게 자연철학을 추구하는 일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며, 이성을 통해 편견과 미신을 타파하며 객관적인 과학적 원리 위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야말로, 계몽사상가의 의무이자 자연철학이 도덕철학으로 모순 없이 변환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콩도르세는 뉴턴의 과학혁명에서 시작되어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을 거쳐 프랑스대혁명으로 이어진 역사적 전개 속에서 과학이 모순 없이 도덕철학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계몽사상의 완성자였다.

이광수 친일의 과학적 기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광수가 1921년 돌연 귀국하여 1922년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면서 친일파의 길에 접어들게 된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무엇보다도 일본유학으로 가장 근대화된 지식, 특히 자연과학의 세례를 받다시피 했던 당대의 천재 문학가가 어떻게 민족개조론을 주장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연과학을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론의 핵심으로 여기고, 이를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발표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점에서 20세기 식민지 조선의 이광수와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은 닮아있다.

하지만 계몽사상가들이 과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려 했던 목표는 문학작품의 발표를 통한 입신양명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것이었다. 계몽주의 후기 사상가인 콩도르세는 계몽주의의 궁극적 목표가 더 나은 사회로의 진보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따라서 현실의 변혁을 추구하는 계몽사상이 형이상학과의 결별로 이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광수의 소설 속에 나타나는 과학의 모습은, 현실을 극복하는 진보의 상징이 아니라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을 대체하기 위해 외부에서 도입된 이데올로기에 가깝게 묘사된다.

이광수의 문학작품 속에서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문명을 대표하는 과학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대신 이광수는 정신적 가치야말로 문명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가치라 여겼으며 “조선의 근대를 수립하는 길로서 ‘물질적 문명’을 중시하는 사고에서 ‘정신적 문명’의 창조로 관심을 이동시켜 나갔다(이행미, “두 개의 과학, 두 개의 문명- 이광수의『개척자』를 중심으로-“).

즉, 이광수에게 과학은 조선의 물질적 부강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조선의 새로운 정신적 문화를 창조하기 위한 ‘이성’을 제공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이처럼 도덕형이상학 혹은 이데올로기로 과학을 받아들였던 이광수에게 과학을 통한 계몽주의는 사회적 변혁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

사회와 만나지 못한 이광수의 과학주의는, 중심을 찾지 못한 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했고, 어쩌면 최초의 과학적 지식인일지도 몰랐던 조선의 한 소설가가 결국 스스로의 과학지식을 통해 도달한 결론은 조선의 미개함일 뿐이었다. 그의 민족개조론과 향후 이어지는 노골적인 친일행위의 배후에는 모든 계몽주의 사상이 품고 있는 위험이 자리잡고 있다. 사회화되지 않은 계몽주의는 권위주의로 타락한다.

글쓴이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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