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신체는 축복인가, 저주인가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서’] 왜 연쇄살인극의 피해자는 항상 여성일까 희생자에 머물지 않는 진취성 일깨운 영화

할리우드 판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할리우드 판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공포스릴러의 희생자들

그 어떤 때보다 이번 대선은 후유증이 컸다. 특히 20대 남녀의 지지가 이번 대선만큼 극과 극으로 나뉜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선거가 끝난 후, 일부 여성들이 국가를 위해 아이를 낳아주지 않겠다는 독특한 시위를 하는 사진이 나왔다. 자신의 신체와 관련된 결정권을 주장하며 낙태죄를 반대하던 여성들이 자신의 신체를 담보로 내세우며 시위를 하는 셈이었는데, 관련 사진은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신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공포 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희생자들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공포스릴러 영화에서 여성들은 연쇄살인범에 의해 강간당한 뒤에 살해당한다. 여성들이 범죄의 대상이 되는 일차적인 이유는 신체적으로 약해서다. 2000년대 초반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유영철 사건은 한국 영화 <추격자>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주로 출장마사지 업종에 종사했던 여성들을 노렸던 유영철은, 검거된 후 키가 162㎝ 이하의 여성만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체구가 작으면 차량 뒷좌석에 태우기가 용이하다는 매우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2012년에 개봉한 데이빗 핀처 감독의 할리우드 영화로 루니 마라와 다니엘 크레이그가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 이전에 스웨덴에서 3부작으로 제작된 동명 영화가 있다. 이 3부작 영화는 스웨덴 출신 배우인 미카엘 뉘크비스트와 누미 라파스가 주연을 맡았다. 원작에 충실한 3부작으로 상황이 더 세세하게 묘사되고 몰입감을 높인다. 누미 라파스의 연기가 단연 돋보인다. 누미 라파스는 할리우드 판 영화 제작 때도 출연 섭외를 받았지만 스웨덴 판 3부작을 찍으면서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탓에 사양했다고 한다. 그럴 만큼 여주인공이 감당해야 할 신체적, 심리적 연기의 강도가 높다.

성평등국 스웨덴이 성범죄율 세계6위라니

이 영화가 중요한 이유는 스웨덴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 여성들이 처한 일반적인 상황이 교차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판이나, 스웨덴 판이나 서사의 기본적인 틀은 같다. 이 영화의 원작은 스웨덴 출신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동명소설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인데, 이 책은 북유럽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판매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베스트셀러다.

스웨덴의 성범죄율이 세계 6위라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스웨덴은 양성평등성이 뛰어난 국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성범죄율이 높은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다. 무슬림 이민자의 증가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무슬림은 이교도 여성을 강간하는 것을 범죄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해방에 대한 반발의 결과로 보기도 하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보복성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원작자인 스티그 라르손은 성폭행 경험이 있는 여성들을 인터뷰하고 소설을 썼다고 한다. 3부작으로 된 스웨덴 영화가 더 매력적이긴 하지만 너무 방대하니, 할리우드 영화 중심으로 이야기하려고 한다. 영화는 스릴러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필자가 이 영화에서 주목하는 것은 두 명의 여성 캐릭터이다. 이 두 여성의 공통점은 성폭력의 희생자라는 점이다. 하지만 결코 희생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는 진취성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여성으로서 극복하기 힘든 트라우마를 감당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 명은 루니 마라가 연기한 ‘리스베트’이고 다른 한 명은 ‘하리에트’라는 캐릭터이다. 이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은 리스베트에게 있다. 리스베트는 여성이어서 당해야 했던 고통을 안고 살아가지만, 특별한 능력을 지닌 강한 여성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강한 여성 캐릭터는 신체적인 한계를 지력으로 극복하는 설정이 많다.

리스베트는 지능이 뛰어나고 해킹 실력이 천재적인 수사관이다. 능력은 뛰어나지만 정식 수사관은 아니다. 그리고 23살의 성인인데도 법무부의 보호 감찰을 받고 있다. 정신병자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12살 때 아버지를 살해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어서다. 성폭행으로 인한 것으로 짐작되며, 일종의 정당방위였는데, 세상은 그녀의 피해 사실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신병자로 판단했다. 성폭행 증거를 확보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아서 사실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많다. 리스베트는 그래서 세상을 신뢰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불신은 그녀의 외모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모히칸 헤어스타일에 탈색한 눈썹, 코와 입술에 피어싱을 달고 있다.

루니 마라가 역할을 맡은 '리스베트'. 용의 문신을 한 여자로 나온다.
루니 마라가 역할을 맡은 ‘리스베트’. 용의 문신을 한 여자로 나온다.

신체를 신체로 되갚아주는 주인공

리스베트의 표정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고 늘 똑같다. 감정이 말라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있는 문신은 일종의 심리적 갑옷 같은 역할을 한다. 보호 감찰원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도 발목에 문신을 했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증거를 신체에 남기고 싶어한다. 리스베트는 약자의 위치에 있지만 결코 체념만 하지는 않는다. 감찰원의 성폭행 장면을 비밀리에 녹화하고 그 자료를 인터넷에 공개하겠다고 위협해 칼자루를 자신의 손에 쥔다. 자신이 당한 고통을 그대로 감찰원에게 돌려주기 위해 그의 신체에 강간범이라는 문자를 문신으로 새긴다. 신체를 신체로 되갚아준다. 복지부에서 지정한 후견인 자격으로 감찰원은 리스베트의 재산을 감독하면서 필요한 돈을 주는 대가로 리스베트를 성적으로 유린했지만, 이제 리스베트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리스베트는 연쇄살인사건의 수사에도 개입하게 된다. 연쇄살인범은 젊은 여성들만을 노리고 잔인하게 살인하는데, 단순한 살해가 아니라 여성을 성적인 타락과 연관시키면서 생식기를 훼손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살해방식에도 종교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여자의 신체를 죄악시하고, 불경스러움과 연결시키는 종교적 관습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라는 제목을 만들어냈다.

범인은 바로 그들...숨어버린 주인공

또 다른 희생자가 후반에 밝혀지는데 방예르 가문의 하리에트이다. 그녀의 삼촌인 헨리크는 조카 하리에트가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리스베트는 정보를 찾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낸다. 연쇄살인은 유대인을 증오하는 나치 광신자의 소행이며 범인은 방예르 가문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하리에트의 아버지와 오빠다. 두 사람은 많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살해한다. 하리에트 역시 그 대상이 되자, 살기 위해 잠적했으며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 영화에는 스웨덴의 높은 성범죄율과 뛰어난 사회복지체제 뒤에 감춰진 어두운 그림자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이 영화는 친족의 성폭력과 연쇄살인이라는 수위가 높은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그 특수성을 떠나서라도, 사회적 약자이자 신체적인 약자인 여성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성폭력의 잔인함과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지옥과도 같은 환경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생명을 잉태하는 신비한 공간이면서, 삐뚤어진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여성의 신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글쓴이

이화정 영화심리상담사

영화심리상담사인 이화정은 영상번역작가로 일하면서 약 700편의 영화와 TV시리즈, 다큐멘터리를 번역했다. 그 후 영화이론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통합예술치료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예술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탐구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현재 영화와 심리에 관한 방송, <꿈꾸는 씨네 카페>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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