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 스미스는 어떻게 대처해야 했을까?

우리가 모르는 ‘분노 처리의 원칙’에 대해

영화배우 윌 스미스(오른쪽)가 아카데미 시상식중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전 세계에 고스란히 생중계됐다. 사진=AFP/연합뉴스
영화배우 윌 스미스(오른쪽)가 아카데미 시상식중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전 세계에 고스란히 생중계됐다. 사진=AFP/연합뉴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벌어진 폭력사태

지난 3월 27일 미국 제 94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배우 윌 스미스가 자신의 아내 제이다 핑킷의 민머리에 대해 농담을 한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뺨을 때렸다. 이 사건은 이후 일파만파의 파장을 이어갔는데,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4월 9일 아침에 줌(Zoom)으로 개최한 이사회에서 3시간 가까운 격론 끝에 윌 스미스에게 아카데미 주관 시상식 참석을 10년간 금지하는 처분을 내렸다. 이사회는 크리스 록이 엄청난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한 데에 대해 칭찬했으며, 윌의 행동은 ‘받아들일 수 없고 해로운’(unacceptable and harmful) 행위로 규정했다. 즉 인내는 칭찬할 만하고 폭력은 어떤 경우라도 허용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인간에게 분노를 자극하는 원인의 대부분은 자신의 인격을 무시당하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도 윌 스미스가 분노한 것은 아내의 외모를 조롱당한 것으로 인해 자존심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노를 느끼는 것과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구분을 해야 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이해를 해 줄 수 있지만, 후자에 있어서는 그 표현 방법에 따라 그 수용 여부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동의해 주지 않는 것이다.

상대가 농담으로 나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상황은 흔히 발생한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용인되는 농담, 용인되지 않는 농담들

농담의 용인 범위와 정도는 문화권마다 다르다. 대체로 서양이 동양보다 더 용인되는 농담의 수위가 강하고 소재의 범위도 넓다. 이는 서양 사회가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발달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양은 집단주의가 발달하였는데,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집단 내에서의 위치에 따라 자신의 지위가 정해지기 때문에 이 지위는 자신의 명예를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체면 의식이 고도로 발달하게 된다.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질병으로 인해 외모가 변화한 데 대해 농담을 하는 것은 용인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번 사건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하여 윌 스미스가 분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상대가 던진 농담이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경우, 우선 그 농담의 수위와 소재가 자신이 속한 문화권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분 나쁜 농담인지를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만일 누가 들어도 기분 나쁜 농담이라고 보기에 어렵다면, 그러니까 분노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확보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잊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나만의 주관적 판단으로 분노를 표시할 경우에 상대방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낼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누가 들어도 기분 나쁜 농담이라고 판단된다면, 곧바로 상대방의 의도를 살펴야 한다. 그러니까 그가 일부러 나의 기분을 나쁘게 하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의도가 없었던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전자라면 후속 행동을 고려해야 하지만 후자라면 역시 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공연히 화를 내어 상대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농담으로 한 말에 화를 내는 옹졸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자칫 상대와의 좋았던 관계마저 해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만일 상대의 농담이 나의 기분을 나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는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즉 나를 조롱하려는 것이라면, 나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는 경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분노를 표시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자존심도 없는 사람으로 비치게 할 가능성도 있다.

1999년 박찬호도 잘못한 ‘분노 표출’ 방법

그런데 이렇게 분노를 표현하기로 할 때는 적절한 방식의 채택이 반드시 필요한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치러야 할 비용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단둘이 있을 때라면 몰라도 제 3자가 있는 경우,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는 그 비용이 엄청나다. 이번처럼 행사에서 일어나는 일의 경우에는 전체 분위기를 망치게 된다. 참석자와 시청자 등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이나 상처를 주며, 사람들의 생각에 오랫동안 기억되도록 만든다.

분노를 표현하기로 한 경우 우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비례의 원칙’이다. 이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헌법 제37조 제2항의 ‘비례의 원칙’, 즉 ‘과잉금지의 원칙’에서 필자가 차용한 용어이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라는 표현으로 유명한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나온다. 이는 보통 죄를 지은 상대를 인정사정 없이 응징한다는 의미로 오해되고 있는데, 사실은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 적절한 조처를 취하되 타인에게 입힌 손해만큼만 응징할 수 있도록 한도를 두는 것이, 즉 과잉보복을 금지하는 것이 근본 취지이다. 그러니까 예컨대 물건을 훔친 사람에게 물건을 빼앗는 것으로 족하지 그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사람이 만일 그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상처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레위기 24:20)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비례의 원칙이란, 상대의 공격행위가 있었을 때 그만큼의 보복을 하는 것까지는 용인되지만 그것을 넘어서면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야구선수 박찬호가 LA 다저스 소속이던 1999년 6월 6일 애너하임전에서 상대투수 팀 벨처와 언쟁하다 발길질을 한 사건이 있다. 그가 타석에서 번트를 대고 뛰어가고 있었는데 벨처는 타구를 잡은 뒤 그의 가슴을 지나치게 세게 태그를 하기에 화가 나서 벨처를 밀친 뒤 옆차기를 날렸던 것이다. 박찬호가 분노한 것은 벨처가 인종차별적인 심한 욕설과 함께 ‘꺼지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손을 사용한 상대의 태그행위에 대해 발을 이용한 폭력으로 응징함으로써 비례의 원칙을 어겼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주먹 다짐에 비해 발을 사용하는 공격행위는 동양에서보다 훨씬 더 큰 폭력행위로 간주한다. 아마도 태권도와 같은 무술이 없기 때문이리라.

이 비례의 원칙을 윌 스미스에게 적용한다면, 크리스 록이 말로 조롱을 했으니 그도 말로 응징을 했어야 했다. 상대가 농담으로 했으니 이왕이면 분노에 찬 욕설보다는 농담으로 받아치면 더욱 좋았다. 그러나 그는 크리스 록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거기에다 좌석에 돌아온 뒤에 “내 아내의 이름을 너의 더러운 입에 담지 마라”(Keep my wife’s name out of your f*** mouth)라며 폭력성이 매우 강한 욕까지 했다.

타자로 나온 박찬호 선수(왼쪽)가 상대팀 투수에게 발길질을 하는 장면. 주먹이 아닌 발을 사용한 대응행위가 많은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타자로 나온 박찬호 선수(왼쪽)가 상대팀 투수에게 발길질을 하는 장면. 주먹이 아닌 발을 사용한 대응행위가 많은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분노 표출하되 ‘즉각 대응’은 조심해야

분노를 표출할 때는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고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논리로 반박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즉각적인 임기응변이 요구된다. 예컨대 ‘지 아이 제인2’를 기대한다는 크리스 록의 농담에 객석에 앉아있는 윌 스미스라면 어떻게 항의하는 것이 좋았을까? “네가 제작비를 대면 고려해 보지”, 혹은 좀 더 공격적으로 “꼭 제작비도 못내는 사람들이 저런 농담을 한단 말이야” 뭐 이런 식으로 받아쳤어야 할까? 그런데 많은 경우 이것이 금방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머뭇거리거나 숙고하다 보면 시기를 놓치게 된다. 시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면 과격하고 정제되지 않은 표현이나 내용을 발언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도리어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입장이 전도되게 된다.

그러므로 즉각적인 대응을 꾀하는 것보다는 나중에 감정이 가라앉은 다음 적절한 논리를 생각해 내어 대응하는 편이 안전하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생각하면 좋은 논리가 나올 확률이 높고 발언의 수위도 조절할 여유가 생겨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 방법의 단점은 자칫 다 지나간 이야기를 하는 꼴이 되어 뜬금없는 소리가 되고, 이로 인해 옹졸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덧칠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즉각적 반박과 추후의 신중한 대응이라는 두 가지 방법 중에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할까? 만일 짧은 순간에 적절한 말이 떠오른다면 전자가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장은 다소 아쉬움이 남더라도 추후의 신중한 대응을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응이 결코 유효기간이 지난 것을 재론하는 것이 아니라, 즉 그러니까 당시에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서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즉각 한 마디 하려 했었지만 참았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인내는 상대를 배려해 주기 위한 조처였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즉각적 반박은 단지 농담 한 마디를 하려 한 상대에게 지나친 모멸감을 주어 궁극적으로 상대와의 관계를 절연시키는, 그리하여 상대를 나의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데, 추후의 신중한 접근은 이러한 위험을 예방하게 해 주는 장점도 있다.

사실 윌 스미스는 즉각적 반박을 취하느라 주먹질과 욕설이라는 불행한 결과에 빠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그는 10년간의 시상식 참가 자격 박탈이라는 불명예와 그동안 쌓아 두었던 인기의 상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의 비난이라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이제는 결코 예전의 영예를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례의 원칙’을 잊지마라

이제 필자가 권하는 분노 처리의 방법론을 요약해 보자. 만일 상대로부터 기분나쁜 농담을 들었을 때는 우선 객관적 기준을 총족할 수 있는 조롱인지, 그리고 의도적 조롱인지를 살펴본 다음, 이 같은 기준을 충족하는 조롱일 경우에 한해 분노를 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 그리고 그럴 경우 비례의 원칙에 맞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시하되, 즉각적 대응이 어려울 경우 추후의 신중한 대응을 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방법론의 관점에서 보면 윌 스미스는 이러한 원칙들을 지키지 않았고, 이로 인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크리스 록은 워낙 수위가 높은 농담을 즐기는 코미디언이라는 점은 모든 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이고, 윌 스미스와 그와의 친분 관계는 이미 그가 악의적 의도를 가지고 한 조롱이 아니라는 점을 담보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질병으로 인한 외모의 변화를 농담의 소재로 삼은 것은 그의 분노를 정당화할 수 있는 사유를 구성할 수도 있지만 크리스 록이 이를 몰랐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쨌든 그의 분노 표출의 방식과 수위는 이를 크게 넘어, 비례의 원칙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한편 이번처럼 행사 진행 중에 마이크를 쥔 사람이 청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에 대해 행한 농담의 경우에는 대응에 제약이 큰 것이 사실이다. 발언권을 얻기 위해 무대로 걸어나가기도 어렵다. 청중석에서 큰 소리로 발언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이번의 경우에도 그랬듯이 무리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사실상 대응할 방법이 없다. 물론 이번 경우에는 윌 스미스가 남우주연상을 받았기 때문에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그때 발언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이는 결과론이고, 당시로서는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추후의 신중한 대응이 강요되는 구조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여기에 답이 있다. 그러니까 청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행사를 방해하지 않고 대응할 수단이 없다는 점을 이미 사람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즉각적 대응을 못했다고 해서 이를 비난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추후에 SNS나 인터뷰 등의 기회를 이용해 차분하게 자신의 입장을 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윌 스미스, 그는 참 똑똑한 연기자였다. 그러나 농담에 대한 대응과 분노의 처리에 있어서는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그가 어리석은 대응을 한 것은 그가 특별히 어리석은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글쓴이

박만규 아주대 교수

박만규 아주대 불문과 교수는 언어에 관한 다양한 주제, 특히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언어, 어원과 인간의 사유, 한국어와 영어/프랑스에 나타난 세계관의 차이, 현대 프랑스 문화의 기원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사전학회와 한국프랑스어문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프랑스정부 학술공로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설득언어’와 ‘빛나는 당신이 있다면 촛불을 켤 필요가 없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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