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비즈니스의 진짜 승자는?

당신이 모르는 영·불의 축구 이야기② FIFA, 유럽축구연맹 등 모두 프랑스가 주도 영국, 자존심 때문에 FIFA에 늑장 가입 4개팀은 영국의 분열 탓...단 한번의 예외 폐쇄성이 비지니스 기회도 가로막아

국제축구연맹 FIFA가 월드컵 우승팀에게 수여하는 우승 트로피.
국제축구연맹 FIFA가 월드컵 우승팀에게 수여하는 우승 트로피.

FIFA는 무엇의 약자인가?

세계축구연맹 FIFA를 창설한 것은 축구 종주국인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흔히 사람들에게 FIFA가 무엇의 약자인지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추정은 어렵지 않게 하는데, 두 개의 F는 분명 Federation과 Football이라는 것, I는 International일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리고 A는 좀 어렵지만 대충 Association이 아닐까 하고 짐작해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추정된 단어들을 막상 배열하려 하면 하나도 영어 문법에 맞지 않고 의미도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잖이 당황한다. 너무나 당연하다. 왜냐하면 FIFA는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 약자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어 원어는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으로서 명사를 꾸미는 형용사가 명사 뒤에 위치하는 프랑스어의 어순에 따라 구성된 표현이다. 이를 영어식으로 고치면 ‘International Federation of Association Football’이다. 즉 ‘협회 축구의 국제 연맹’이다.

‘association football’(협회 축구)이란 무엇인가? 옥스포드 사전에 이를 찾아보면 ‘more formal term for soccer’, 즉 축구(soccer)를 보다 공식적으로 부르는 명칭이라고 나온다.

축구가 아니고 협회 축구라니?

19세기 영국에서는 축구 경기를 할 때 ‘손’을 쓸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아닌가를 놓고 논쟁을 벌였는데, 손을 쓸 수 있도록 하자는 개혁파가 타협을 거부하고 1846년 독자적인 규칙을 제정하자, 정통파가 하는 수 없이 1863년 ‘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 ; 약칭 FA)를 창설했다. 그러자 1871년 개혁파도 ‘럭비 풋볼 유니온’(RFU, Rugby Football Union)을 창설하여 두 스포츠는 완전히 결별했다. 그런데 두 종목을 모두 축구(football)라고 하니 혼동이 초래될 때가 많았다. 이를 구분해야 할 때를 위한 명칭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손을 쓸 수 있도록 하는 경기는 이를 창시한 윌리암 엘리스(William W. Ellis)의 ‘럭비 스쿨’(Rugby School)에서 주도하여 규칙을 만들었기 때문에 ‘럭비 풋볼’이라고 하기 시작했다.(그러니까 ‘럭비’는 학교 이름이다)

그런데 기존의 축구는 특별히 부를 용어가 없어 ‘축구 협회’의 규칙을 따르는 축구, 즉 ‘협회 축구’(association football)라고 하기 시작했다. 이 말에서부터 soccer(사커)라는 말이 나왔다. 이는 association에 -er을 결합한 associationer로부터 assoccer라는 줄임말을 거쳐 여기에서 a가 탈락하여 형성된 단어이다.

국제 기구를 잇따라 창설한 프랑스

연방국가인 영국(UK)을 이루는 네 나라는 독립성이 강해 잉글랜드가 먼저 1863년 ‘축구협회’를 창설하자, 이를 모델로 스코틀랜드(1873), 웨일즈(1876), 아일랜드(1880) 축구협회가 연이어 창설되었다. 이처럼 영국에서는 네 개의 축구협회가 독립적으로 구성되고 각자 자신의 갈 길에만 집중한 반면,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는 이제 유럽 전역에 퍼진 이 새로운 스포츠의 국제 경기를 추진하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프랑스의 언론인인 로베르 게랭(Robert Guérin, 1876-1952)이었다. 그는 1904년 FIFA를 창립하고 이후 1906년까지 초대 회장을 맡았다.

잉글랜드의 대니얼 벌리울폴 (Daniel Burley Woolfall)이 바통을 이어받아 1906~1918년에 집권했으나 3대는 다시 프랑스의 쥘 리메 (Jules Rimet)가 1921~1954년 사이 무려 33년간이나 장기집권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딴 ‘쥘리메 컵’까지 만들었다.

FIFA에 이어 프랑스는 다시 유럽 대륙의 조직을 만들었는데, 1954년 창설된 UEFA(유럽 축구 연맹, Union of European Football Associations)이다. 이는 프랑스인 앙리 들로네(Henri Delaunay (1883–1955)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그는 파리의 ‘에투알 데 되 락’(Étoile des Deux Lacs) 팀에서 축구 선수로 뛰다가 그만두고 심판으로 전향했다.

어느날 그에게 불운이 찾아왔는데, AF 가렌느-도브(AF Garenne-Doves)와 ES 베네볼랑스(ES Bénévolence) 사이의 경기에서 심판을 보던 도중 얼굴에 볼이 날아와서 입에 물고 있던 휘슬을 덮쳐 이가 많이 부러졌다. 이후 그는 축구에 헌신할 방법을 찾다가 1954년 6월 15일 UEFA를 창립하고 사무총장이 되었다.

왼쪽부터 로베르 게랭, 쥘 리메, 앙리 들로네.
왼쪽부터 로베르 게랭, 쥘 리메, 앙리 들로네.

FIFA 가입을 거부한 축구 종주국

한편 FIFA의 최초 가입국은 프랑스를 비롯하여,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덴마크, 스위스, 스페인의 7개국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5년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가입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축구 발생지인 영국은 가입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FIFA에 가입한 건 언제일까? 로베르 게랭은 잉글랜드에 가입을 권유하며 설득을 했으나 잉글랜드는 계속 가입을 거부하였다. 그러다 몇 달 후인 1906년에 가입했으며. 스코틀랜드 축구협회(The Scottish Football Association)가 가입하는 것은 1910년이 되어서였다.

잉글랜드의 축구협회(FA)가 FIFA의 가입을 거부한 것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축구는 자신들이 종주국인데 국제대회를 프랑스가 먼저 만들어서 가입을 권유하니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의 태권도를 중국이나 일본이 국제대회를 먼저 만들어서 우리에게 가입을 권유한다면 우리의 기분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걸림돌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혼자서 가입하겠다’는 조건을 걸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UK)이 가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북아일랜드가 각각 독립적인 단위로 가입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프랑스 입장에서 볼 때, 아니 이외의 다른 가입국들의 입장에서 볼 때도 어불성설이었다. 그런 식으로 한다면 독일도 연방국가이니 하나의 주가 독립적으로 가입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로서는 수락하기가 어려운 조건이었다.

영국이 이런 억지를 피우는 배경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영국이 연방국가이니 연방을 구성하는 네 개의 나라가 서로 사이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역사적으로 얽히고 섥힌 수많은 사연으로 인해 그들은 서로 미워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의 국가로 가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더구나 이미 각자 축구협회를 창립한 상태이므로 이를 통합하는 것은 더욱 더 난망한 일이었다.

아무튼 당시 협상에 임했던 『프랑스 축구협회』(USFSA: Union des Sociétés Françaises de Sports Athlétiques)와 『잉글랜드 축구협회』(FA)는 서로의 고집을 꺾지 않고 오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협상 과정에서 감정도 많이 상하여 해결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프랑스 입장에서 영국이 가입하지 않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축구 종주국이 가입을 하지 않으면 세계연맹으로서의 지위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4개국으로 가입하겠다는 억지를 받아주기도 어려운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게다가 시간이 가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더 이상 서로 협상을 이어나가기가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FA와 대립각을 세우던 USFSA가 FIFA에서 탈퇴하고 그의 경쟁자인 프랑스의 또 다른 축구협회인 CFI(Comité français interfédéral)가 가입을 하면서 FA와 협상을 새로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의견의 접근을 보았다. 잉글랜드는 축구 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우면서 독립적 지위로 FIFA에 가입하는 데에 합의를 본 것이다. 이로 인해 영국은 네 나라의 축구협회가 FIFA에 독립적 지위로 가입을 하게 되었다. 대신 프랑스는 실리를 챙겼다. 어떤 실리일까?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는 한 팀으로 묶기에는 너무 강했다. 프랑스는 이들이 지나치게 강한 하나의 팀이 되어 참여하는 것은 흥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프랑스가 이길 가능성도 낮아질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국가 제창을 거부한 라이온 긱스

이것이 이 이상한 방식, 즉 한 국가의 네 팀 분리 출전의 기원이 되었다. 요컨대 영국은 축구 발생지이면서도 국제대회의 주축이 되지 못한 자존심을 치유하면서, 축구 종주국이라는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는 자부심을 즐기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그 결과 영국은 커다란 손해를 보기도 했다. 축구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네 팀으로 쪼개져서 강한 팀의 지위를 갖는 데 실패한 것이었다. 결국 자존심을 위해 실리를 버린 것이었다.

아무튼 FIFA에서는 영국이 네 나라로 출전하는 이 관례가 이후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올림픽은 이야기가 다르다. 올림픽에서는 그 어떤 나라도 하나의 팀을 내보내야 한다.

그런데 영국(UK)에는 축구 경기를 관장하는 단일한 기구가 없었다. 영국 올림픽 협회(BOA, British Olympic Association)에 가입된 단체는 오직 잉글랜드 축구 협회(FA)뿐이었기 때문에, 1972년까지 올림픽 축구 토너먼트에 오직 잉글랜드 팀을 참가시켰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스코틀랜드 등 다른 협회가 어떻게 해서든 각각의 지분을 요구하며 대표팀을 꾸렸을 것 같은데 영국은 그렇게 하는 나라가 아니다.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었는데, 2012년 자국에서 열렸던 런던 올림픽에서 잉글랜드 선수들이 주축이 되고 몇몇 웨일즈 선수들이 함께 참여한 ‘브리튼 단일 팀’을 구성하여 참여하였다. 여성 팀의 경우에는 잉글랜드 선수가 주축이 되고 스코틀랜드 선수들을 참여시켰다. 사실 2009년에 잉글랜드의 축구협회(FA)는 웨일스 축구협회(FAW), 스코틀랜드 축구협회(SFA), 북아일랜드 축구협회 (IFA)와 전례대로 잉글랜드 선수만을 출전시키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지만 BOA는 이를 기각했고 하는 수 없이 단일팀을 구성한 것이었다. 경기를 본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단일팀에 참가한 웨일즈인 라이온 긱스(Ryan Giggs)가 세네갈과의 경기에서 잉글랜드 국가 ‘God save the Queen!’ 를 부르지 않아 큰 논란이 있었다.

웨일즈 출신으로 영국 축구팬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라이온 긱스(오른쪽). 그러나 경기전 국가를 부르는 시간에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웨일즈 출신으로 영국 축구팬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라이온 긱스(오른쪽). 그러나 경기전 국가를 부르는 시간에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영국은 이 한 번의 예외적인 단일 팀 구성이 이후 다른 FIFA 주최 대회들에서도 단일 팀을 만들어야 하는 전례가 될까 봐, 즉 지금까지 영국이 독립적인 네 팀으로 나뉘어 출전하는 특권적인 지위에 FIFA가 문제를 제기할까 봐 크게 우려했다. 그래서 이후에는 절대 단일 팀을 만들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단일팀을 만들기로 합의를 보았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영국 사람들은 올림픽 같이 국가 대항전일 때도 단일 팀을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그냥 잉글랜드가 영국을 대표하여 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네 팀은 결코 통합하려지 하지 않으며 각자 독립적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강한 단일팀으로 만들어 우승하는 것보다 축구 종주국으로서의 특권을 즐기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어차피 서로 미워하는 사이이니 단일팀을 만든다고 강해진다는 보장도 없다. 좋은 선수들이 더 많아져도 팀웍이 살아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영국의 이 두 정신 모두 결코 실용적이지 않다. 비즈니스적이지 않다.

스포츠라도 비즈니스를 성공하려면

영국은 누가 뭐래도 축구 종가이다. 그러나 축구를 발명해 놓고도 그에 걸맞은 성과를 내지 못한 나라이다.

왜 영국은 축구 비즈니스에서 이토록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였을까? 한 마디로 발명가의 자존심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존심은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 성향을 배태하였다. 비즈니스란 항상 환경과 상황의 변화를 주시하고 이에 대응하는 상품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잉글랜드는 이것을 거부했다. 아니 하기를 싫어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영광을 누리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을 스스로 만든 우리 속에 가두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비즈니스의 폐쇄성이 축구 종주국답지 않은 저조한 성적을 결과시켰고, 선수 구성의 폐쇄성이 자국의 리그가 최고인데도 국가 대표팀은 최고가 아니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통합보다 분열을 택하는 정신, 그리고 타협보다는 자존심을 택하는 마음이 잉글랜드를 비즈니스의 개방적 세계로 이끌지 못했다. 이제 앞으로 잉글랜드의 축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이러한 관점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경기를 본다면, 단지 해리 케인 대 킬리안 음바페의 싸움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더 재미있지 않을까?

글쓴이

박만규 아주대 교수

박만규 아주대 불문과 교수는 언어에 관한 다양한 주제, 특히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언어, 어원과 인간의 사유, 한국어와 영어/프랑스에 나타난 세계관의 차이, 현대 프랑스 문화의 기원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사전학회와 한국프랑스어문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프랑스정부 학술공로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설득언어’(베가북스)와 ‘빛나는 당신이 있다면 촛불을 켤 필요가 없다’(씨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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