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최고의 스승’은 누구일까

[박만규의 에티모버스’(Etymoverse)’] ‘스승의 날’은 왜 5월 15일일까 ‘스승’ 어원을 둘러싼 다양한 설 영도자에서 교육자로 변질된 사연은

5월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이 시대의 참스승은 잘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잘 이끌어주는 사람이 아닐까. 사진= 연합뉴스
5월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이 시대의 참스승은 잘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잘 이끌어주는 사람이 아닐까. 사진= 연합뉴스
  • ‘에티모버스’(Etymoverse)’는 어원을 뜻하는 Etymology와 우주를 뜻하는 Universe를 필자가 합성한 말이다. 어원에는 옛사람들의 사고가 비유 속에 담겨 있어 세계에 대한 인류의 다양하고 심오한 사유를 알게 해준다. 이는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5월15일은 세종의 탄신일...왜 세종일까

가정의 달 5월의 중앙에 ‘스승의 날’ 있다. ‘스승의 날’은 스승을 존경하는 사회적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1982년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오직 사람을 기르는 것 이외에는 길이 없음을 깨닫고 교육에 투자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어 낸 것을 생각해 보면 스승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날 하나쯤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스승의 날은 1963년 충남지역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은사의 날’을 정하고 사은행사를 개최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는데, 처음에는 5월 26일이었지만 1965년부터 5월 15일로 날짜를 변경하였으며, 1982년 국무회의에서 스승의 날을 이 날로 제정한다는 내용을 의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5월 15일은 어떤 날이길래 스승의 날로 정해진 것일까? 이는 세종대왕의 탄신일인 음력 4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정해진 날이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종대왕을 스승의 전형으로 삼았던 것일까?

이는 물론 세종대왕이 우리 민족에게는 최고의 스승이기 때문이리라. ‘스승’이란 말은 사전에는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 혹은 ‘자기를 가르쳐 이끌어 주는 사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요컨대 ‘스승’은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인데, 하나는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이끌어 주는 사람인 것이다. 즉 스승은 흔히 가르침을 주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 정의에 따르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다 삶을 인도해 주는 역할까지 해주는 분이라는 의미까지 만족될 때 비로소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종은 무엇보다 한글을 창제한 분이다. 「훈민정음언해」는 한글의 본래 이름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점을 알려 주고 있는데,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이처럼 세종은 우리 민족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한글을 창제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말을 적을 수 있도록 해 주시고 이를 통해 눈부신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게 해 주셨으니 이보다 더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은 없을 것이다.

조선의 4번째 임금 '세종 대왕'의 영정
조선의 4번째 임금 ‘세종 대왕’의 영정

그런데 1443년(세종 25년)에 창제한 이 훈민정음을 세종은 곧바로 반포하지 아니하였다. 신하들의 엄청난 반대를 잠재우느라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어, 그로부터 3년 뒤인 1446년(세종 28년)에야 『훈민정음 해례본』 간행을 통하여 반포할 수 있었다. 세종은 결코 한글 창제라는 가르침에만 그치지 않았다. 한글을 만든 후 쏟아진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을 ‘문명화’라는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것이다. 이러니 우리가 어찌 이 분을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 아니 하겠는가? 바로 이 때문에 우리가 세종대왕의 은혜에 감사를 드려야 하고, 바로 그러한 정신을 모델로 우리가 각자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날을 제정한 것이다.

스승의 어원은 추적해보면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든다. 우리는 왜 ‘스승’이라는 말에 영어의 teacher나 professor, educator처럼 교육의 전문가라는 개념이 아닌, 이를 넘어서 ‘삶을 이끌어주는 정신적 지도자’라는 의미를 더하여 가지고 있을까? 이를 위해 ‘스승’이라는 어휘의 어원을 살펴보자.

‘스승’의 어원은 여러 학설이 경합을 벌이고 있는 경연의 장이다. 우선은, ‘중 승’(僧)에 접미사 ‘-님’이 결합한 ‘승님’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는데, 불교 사회에서 ‘스님’의 기원을 설명할 수는 있으나 ‘스승’으로 가는 길을 설명하지 못하는 난점이 있다.

다음으로는 ‘스님’은 ‘스승 사’(師)에 접미사 ‘-님’을 결합한 ‘사님’에서 왔다고 보는 설이 있는데, 이 역시 승려를 가리키는 ‘스님’의 어원 설명으로는 유효하지만, ‘스승’으로의 음운 변화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정설로 받아들일 수 없다.

셋째로는, ‘스승’은 ‘사승(師僧)’이라는 말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설이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승려들을 존경했기 때문에 이들을 ‘사승(師僧)’으로 칭했다는 점에서 그럴듯하다. 그러나 師僧이라는 분명한 한자어가 기원이라면 ‘스승’으로 일시적으로 발음의 변이는 있을 수 있으나 대개는 원래 한자어로 복귀하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글자로 바뀌어 고정되는 일은 흔치 않다는 점에서 설명력이 약하다.

또한 만일 ‘스승’이 불교의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에서 기원한 것이라면 무당(巫堂)의 뜻으로 쓰이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난점이다. 즉 더 앞선 사용례를 설명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실제로 함경도 방언에서 지금도 ‘스승’이 무당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좁아진 스승의 의미...다시 돌릴 수 없을까

현재로서 학계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설은 ‘스승’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次次雄’(차차웅) 혹은 ‘慈充’(자충)이라는 차자(借字, 우리말을 적는데 한자를 빌려 쓴 글자)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스승’이라는 고유어(순 우리말)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를 적을 수단이 당시에는 한자밖에 없어서, 발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 이들인 것이다. ‘차차웅’과 ‘자충’은 ‘스승’과 발음이 사뭇 달라서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나, 고대국어에서 ‘ㅈ’(ㅊ)과 ‘ㅅ’의 구분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과 모음 ‘ㅏ’가 ‘ㅡ’로 바뀌는 현상이 흔하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보면 발음상의 차이가 확연히 줄어드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예: ‘사사웅’, ‘사숭’ > ‘스승’)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중세 국어에서 ‘스승’은 세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

하나는 현대 국어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사람’(師)의 의미였고, 둘째는 ‘스님’(僧)의 의미였으며, 셋째는 ‘무당’(巫)의 의미였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기 이전의 고대 무속 사회에서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역할을 하는 무당을 가리키던 말이었는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러한 종교적 기능, 즉 불법을 전수하면서 대중을 교화하는 역할이 승려에게 돌아가면서 스님을 가리키는 의미로 확장되었다가, 조선 시대에 들어 유교가 장려되면서 요즘과 같은 선생(先生)의 의미로까지 전이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러한 전통으로 인해 ‘스승’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기 이전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를 이끌어가는 영도자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었고,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의 의미는 나중에 유교 장려 이후에 획득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말의 ‘스승’은 서양의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teacher 등과는 그 개념 형성의 궤를 완전히 달리 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승은 그 그림자도 함부로 밟으면 안 되는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스승의 날’을 정할 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직업적인 교육자들로 국한하지 않고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한 세종을 그 모델로 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교권이 갈수록 추락하는 사례들이 많이 보이고, 교사에 대한 존경심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음을 본다. 물론 촌지와 같이 학생과 학부모에게 부담을 주는 부정적 문화가 이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스스로 거두는 것은 분명 사회의 도덕심과 정신적 건강함을 잃어가는 현상이 아닐 수 없어 씁쓸하다. 자원 없는 나라에서 오직 교육으로 일어선 나라이므로 사제관계는 그 원동력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데 말이다. 사회가 너무나도 서구화해 가고 있는데, ‘스승’의 의미마저도 이제 단지 가르치는 전문인이라는 서구적 개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 다시 세울 수 없을까? 아니 스승의 본래의 의미, 다시 살릴 수 없을까?

글쓴이

박만규 아주대 교수

박만규 아주대 불문과 교수는 언어에 관한 다양한 주제, 특히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언어, 어원과 인간의 사유, 한국어와 영어/프랑스에 나타난 세계관의 차이, 현대 프랑스 문화의 기원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사전학회와 한국프랑스어문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프랑스정부 학술공로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설득언어’와 ‘빛나는 당신이 있다면 촛불을 켤 필요가 없다’등이 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