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홍차의 나라’로 인도한 포르투갈 공주
[문기영의 홍차 클래스] 캐서린 브라간자 왕비 이야기 결혼때 갖고 온 차와 인도 뭄바이 영국, 아시아 진출과 차 확보에 도움
영국 홍차역사 초기에 등장하는 주요한 인물이 캐서린 브라간자(Catherine of Braganza)다. 포르투갈 공주로 1662년에 영국 왕 찰스 2세(Charles Ⅱ)와 결혼했다. 공주는 영국으로 오면서 자신이 마실 차를 가져왔다. 아시아 무역을 일찍 시작한 포르투갈에서는 차음용 관습이 있었고 공주 역시 자라면서 차를 즐겨 마셨다. 이 무렵 영국에서는 차가 소개만 되었을 정도이고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왕비의 차 마시는 낯선 일상이 귀족층에 알려지면서부터 영국에서 차음용 관습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홍차애호가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뿐만이 아니다. 그 후에 전개된 영국 홍차역사와 관련지어 보면 캐서린 브라간자는 본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영국이 홍차의 나라가 되는데 있어 훨씬 더 큰 역할을 했다.
영국, 아시아 바다에서 네덜란드에 쫓겨나다
1498년, 포르투갈 사람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 서해안에 도착했다.
바닷길로 아시아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새롭게 개척한 항로 덕분에 이후 16세기 거의 100년 동안 포르투갈은 아시아 바다(인도양)에서 주도권을 쥐고 유럽과 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했다.
포르투갈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한 16세기 말경 영국과 네덜란드가 서로 경쟁하면서 아시아 바다로 진출했다. 1623년 당시 가장 중요한 무역품인 향신료의 주 생산지 몰루카 제도 암본(Ambon) 섬에서 두 나라는 결국 무력 충돌한다. 여기서 승리하면서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을 이어 17세기 동아시아 바다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고 패배한 영국은 밀려난다.
네덜란드가 아시아 바다에서 한창 전성기를 누렸던 17세기 중반, 포르투갈은 점점 더 세력을 잃어가고 영국은 동아시아 바다로 다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가 필요했다.
공주의 지참금, 인도 봄베이
이런 배경에서 찰스 2세와 캐서린 브라간자의 결혼은 양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해진 전형적인 정략결혼이었다.
캐서린 브라간자는 결혼 지참금으로 모로코의 항구 탕헤르(Tangier), 인도 서해안의 항구도시 봄베이(Bombay)를 포함하여 상당한 금액을 가져온다. 그 대가로 포르투갈은 영국의 군사력(특히 해군) 지원을 받게 된다.
홍차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봄베이(현재 뭄바이 Mumbai)항구다. 거점이 되는 대부분의 항구를 네덜란드에게 빼앗겼지만, 고아(Goa)지역을 중심으로 한 인도 서해안은 여전히 포르투갈 세력권이었다.
찰스 2세에게 봄베이 사용권을 빌린 영국 동인도회사는 이 곳을 아시아 바다 탈환을 위한 거점으로 삼는다. 먼저 프랑스와 경쟁하면서 인도에서 서서히 영향력을 넓혀 나가다가 18세기 중엽부터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거의 배타적으로 인도를 지배하게 된다. 이 덕분에 거의 100년 후 19세기 중반부터 인도 북동지역인 아삼은 영국을 위한 홍차 생산기지가 될 수 있었다.

1689년 아모이 항에서 직접 차를 구입하다
1664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찰스 2세와 캐서린 왕비에게 차를 선물한다. 이 차는 네덜란드 상인에게서 구입한 것이었다. 즉 이 무렵만 해도 영국 동인도회사는 중국으로부터 직접 차를 구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1644년 청나라가 건국된 후에도 중국 남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명나라 유민들의 반청운동이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이의 대표적 인물이 ‘해적 왕’으로 알려진 정성공이다. 반청 세력을 진압하고 자신감을 얻은 청나라는 혼란기 동안 모든 항구를 폐쇄시켰던 해금정책을 폐지하고 1684년 상하이, 광조우, 닝보, 샤먼 등 4개 항구를 개항한다. 이 직후인 1689년 봄베이를 거점삼아 아시아 바다에 접근하고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아모이 항(Amoy, 오늘날 샤먼 항)에서 처음으로 차를 직접 구입하게 된다. 이를 기화로 영국은 아시아 바다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점차 네덜란드를 제치고 차를 포함한 아시아 무역의 주력 세력으로 부상한다.
결과론적이지만 이 모든 것은 캐서린 브라간자가 지참금으로 봄베이 항구를 가져온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다
결혼조건 중 하나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캐서린 공주의 신앙자유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왕비가 된 후에도 성공회가 국교인 영국에서 종교문제를 포함한 정치문제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세 번의 유산 끝에 결국 후계자가 될 아기를 갖지 못한다고 판명나자 반대파들은 이혼을 요구했다.
하지만 찰스 2세는 거부했다. 비록 정략결혼이었고 복잡한 여성편력으로 왕비에게 고통을 주기도 했지만 찰스 2세는 왕비의 신앙심을 존중했고 우아한 심성과 자신에 대한 사랑을 알기에 왕비를 반대파로부터 철저히 보호했다.
하지만 1685년 찰스 2세가 죽고 나서는, 정치적으로 더욱더 곤궁에 몰리게 되었다. 심지어 왕비의 미사 횟수를 줄이라는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기도 했다.
결국 1692년 캐서린 브라간자 왕비는 포르투갈로 돌아온다. 당시 왕이었던 남동생 피터 2세(Peter Ⅱ)가 중병에 걸리게 되자 나이어린 존 왕자(Prince John)를 대신해 잠시 섭정을 맡기도 한다. 존 왕자가 왕(John 5세)이 된 후에도 후견인 역할을 하면서 바쁜 노후를 보내다가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가운데 1705년 사망한다.

홍차애호가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온후한 심성으로 영국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서인지 런던 중심부에는 왕비 이름을 딴 거리(Catherine Street)도 있고, 전기도 출간되었다. 또 캐서린 왕비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 소설도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영국인은 캐서린 브라간자가 영국에 차를 유행시켰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린들 조선시대 왕비 중에 제대로 아는 인물이 몇 명이나 될까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홍차 애호가들은 약 400년 전에 영국 왕비가 된 포르투갈 공주를 기억한다. 그녀가 단지 차를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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