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영화제가 던진 절망속의 희망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서’] 전주국제영화제 참관 르뽀 ③ ‘영화적 현실’은 왜 공감을 일으킬까 감동이 컸던 영화제 출품작 세 편

영화 '풀타임'의 한 장면.
영화 '풀타임'의 한 장면.

또다른 세계, 영화적 현실

관객들이 갖는 영화에 대한 취향과 관람 후의 반응은 사람들의 성격만큼이나 다양하다. 백인백색이다. 호불호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경우도 많다. 삶의 한 부분을 그대로 떼어 놓은 듯한 극사실적인 영화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을 선호하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현실을 상상력으로 살짝 비틀거나 판타지가 가미된 영화를 볼 때 오히려 현실에서 탈피하는 쾌감을 느끼는 관객도 있다.

아무리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고 할지라도 영화는 현실과 다를 수밖에 없으며,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에는 ‘영화적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적 리얼리티가 없으면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묘사했다고 해도 관객으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한다. 영화는 현실과는 다른, ‘또 다른 세계’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는 현실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기제가 작동된다. 관객의 그런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영화는 실패하게 된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독특하면서도 영화적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신선한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인상 깊은 영화들이 꽤 많았는데 그 중에서 세 편을 골라봤다. <중세시대의 삶>, <더 노비스> 그리고 폐막작으로 선정된 <풀타임>이다.

아르헨티나 영화, 딱 한가지만?

영화 <중세시대의 삶>은 현재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코로나 시대의 폐쇄적인 삶을 코믹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영화는 루시아나 아큐냐와 알레호 모길란스키가 감독한 아르헨티나 영화다. 루시아나 아큐냐는 이 영화에 어머니 역으로 직접 출연했다. 코로나 시대에 여러 업종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받았지만 폭탄을 받은 분야가 예술계이다. 코로나로 모든 공연과 수업이 취소되면서 연극과 무용을 하는 부모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집 안에 갇혀 지내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딸의 시점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답답한 엄마는 운동복을 입고 집 안에 있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조깅을 하고 비대면 무용 수업도 하는데,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영상을 통해 무용을 지도하다가 수강생들이 동작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자 소리를 지르고 흥분하는 모습이 코믹하게 그려진다. 봉쇄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답답한 생활을 하던 딸은 천체 망원경에 욕망을 갖게 되고 망원경을 살 돈을 모으기 위해 집 안의 물건을 하나씩 몰래 판다. 그래서 집안에는 점점 더 빈 공간이 많아진다.

영화 '중세 시대의 삶' 한 장면. 사진=유튜브 캡쳐
영화 ‘중세 시대의 삶’ 한 장면. 사진=유튜브 캡쳐

그 사실이 밝혀지자,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던 부모도 딸의 행동과 생각에 전염된다.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우주를 볼 수 있는 천체 망원경에 대한 욕망과, 역으로 다른 물건에 대한 집착을 하나씩 버리고 공간을 확보해가는 가족의 모습은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한다. 정말로 갖고 싶은 물건 한 개씩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닐까 같은 생각을 재미 삼아 하게 만든다. 폐쇄와 미래에 대한 불안정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코로나 시대에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시각으로 삶을 바라볼 수 없기에 풍자적이면서도 코믹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였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애썼냐고 묻는다면?

영화 <더 노비스>는 로런 해더웨이 감독, 이사벨 펄먼 주연의 미국 영화다. 신참이라는 뜻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대학 신입생인 알렉스가 대학 조정부에 가입한 후, 대표선수가 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가혹할 정도로 담금질하는 알렉스의 모습을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조정할 때 힘을 주는 순서, ‘다리-몸통-팔-팔-다리’를 일상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되뇌는 그녀는 강박증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알렉스의 목표는 과연 최고 점수를 따고 대표선수가 되는 것일까.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알렉스의 고통은 끝이 날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알렉스는 목표를 달성하는 즉시 곧바로 허무함을 느낄 게 뻔하다. 그리고 그녀의 강박증은 또 다른 목표를 찾아 나서게 만들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더 노비스>의 엔딩 씬은 느닷없고 갑작스럽다. 보는 사람의 맥을 탁 풀리게 하고 잠시 멍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순간,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친다. 엔딩 씬에서 관객을 응시하는 알렉스의 눈빛은, 당신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썼다면, 그리고 어떤 목표를 향해 온갖 고통을 참아내면서 쉴 새 없이 달려왔다면 과연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했냐고 묻는 듯하다.

영화 '더 노비스' 스틸컷.
영화 ‘더 노비스’ 스틸컷.

프랑스 노란조끼 시위 다룬 <풀타임>

가장 많은 공감을 불러왔던 영화로 폐막작인 <풀타임>을 꼽을 수 있다. 에리크 크라벨 감독이 만든 프랑스 영화로, 주연을 맡은 배우 로르 칼라미는 <풀타임>으로 2021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오리종티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풀타임>은 비정규 직업을 가진 싱글맘, 쥘리의 숨가쁜 삶을 묘사하고 있다. 쥘리는 시종일관 뛰어다니고 관객도 쥘리를 헉헉대며 쫓아다니게 만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하고 숨이 찬다. 쥘리는 남편과 이혼한 후, 남매를 키우며 직장 생활을 한다. 현재는 파리 시내에 있는 오성급 호텔에서 룸메이드로 일하고 있지만 원래 직업은 마켓 리서처였다. 남편은 양육비를 제때 주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힘들다.

게다가 아이들을 키우기에 적절한 환경이라고 생각한 파리 교외에 거주하는 탓에 날마다 장거리 출퇴근을 해야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국적인 파업으로 인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힘들어지면서 출퇴근은 말 그대로 전시 상황처럼 되어버린다. 영화는 프랑스에서 벌어진 ‘노란조끼 반정부 시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기에 쾌적한 도시 외곽에서는 수입이 좋은 직장을 구하기가 힘들고, 파리 시내의 좁은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자니 양육 환경이 좋지 않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쥘리는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쥘리는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뛰고 또 뛴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동료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쥘리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삶이 팍팍하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하지만 아이까지 다치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들이 연속으로 발생하면서 쥘리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을 것 같은 엄마의 심정이 느껴지는 장면들에서 비슷한 환경에 있는 관객들은 한마음이 됐을 것이다. 영화제 종료의 아쉬움을 달래주기에 충분한 역할을 했던 폐막작이었고, 상영 후에 터져 나온 박수로 높은 호응도를 확인시켜준 영화였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돼 관심을 모았던 작품들 중 일부는 현재 영화관에서 하나씩 개봉되고 있다. 하지만 영화제에서 놓쳤다면 결코 볼 수 없는 영화들도 많아서 아쉽다. 개막작인 <애프터 양>과 폐막작인 <풀타임>이 상영됐던 전주돔은 올해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볼 수 없는 공간이 됐다. 그 대신 그곳에 ‘독립 영화의 집’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다고 하니 내년 전주국제영화제가 기대된다.

글쓴이

이화정 영화심리상담사

영화심리상담사인 이화정은 영상번역작가로 일하면서 약 700편의 영화와 TV시리즈, 다큐멘터리를 번역했다. 그 후 영화이론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통합예술치료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예술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탐구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현재 영화와 심리에 관한 방송, <꿈꾸는 씨네 카페>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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