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이유-①
[박만규의 광복절 기획 칼럼] 노예무역의 상징, 세네갈을 다녀오다
- 해마다 광복절이면 우리가 독립된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다른 나라에 예속되어 타민족에게 우리의 자유를 구속당하고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지 못하고 남에게 부림을 받는 처지가 된다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예속의 정도는 법적, 사회적, 경제적, 인격적 측면에서 참으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에서 인류의 역사상 가장 혹심한 흑인 노예의 실상을 필자가 얼마 전 다녀온 세네갈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 ① ‘고레 섬’, 노예 무역의 상징 ② ‘노예의 집’ 스토리텔링의 안팎 ③ 왜 인간은 다른 인간을 노예로 만들까? ④ 노예 무역은 무엇을 남겼나?

고레 섬, 노예 무역의 상징
노예무역의 상징, 왜 세네갈인가?
서아프리카의 중심 국가 세네갈(Sénégal)의 수도 다카르(Dakar).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도시가 아니다. 다만 F1( 자동차 경주 포뮬러 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죽음의 경주 『파리- 다카르 랠리』로 그 이름을 알 것이다.
이 도시의 바로 앞바다에 고레 섬(île de Gorée)이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이는 16~18세기 200 여년간 6만 명이 넘는 노예들이 아메리카로 팔려나간 흑인 노예무역의 가장 오랜 현장이다. 디드로(Diderot)의 『백과사전』은 1726~1755년에 500여명, 1761~1848년에 1만5476명이 송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나포된 흑인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실어나가기 전에 수용했던 노예 무역의 가장 대표적인 장소요 상징이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로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고레 섬의 역사
고레 섬의 역사는 유럽의 대항해시대(the Age of Discovery; the Age of Exploration)의 시작과 함께한다. 대항해시대는 유럽을 중국에 앞서게 만든 첫째 계기였는데, 그 시작을 연 것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보기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의 끝에 위치하는 크지 않은 나라지만 당시에는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바다가 시작하는 곳이었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데에는 최적의 출발지였으니 말이다. 처음 전세계를 자유롭게 왕래하던 나라는 이렇게 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1444년 포르투갈 항해사 디니스 디아스(Dinis Dias)가 최초로 고레 섬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이 섬을 Palma(야자수)라고 명명했다. 포르투갈인들은 본래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하고 있었는데, 지리상의 요처인 카보 베르데 곶(포르투갈어 Cabo Verde, 프랑스어 Cap vert)과 고레 섬을 발견하고는 여기에 정착하여 노예 무역을 하기 시작했다.

카보 베르데 곶은 포르투갈에서 남쪽으로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아프리카의 최서단에 위치한 곶(작은 반도)이어서 최단 경로로 아메리카에 갈 수 있는 지리적인 요충지이다. 그리고 고레 섬은 그 카보 베르데 곶이 만드는 주먹 모양의 곶이 형성하는 내해에 위치한 섬이므로 배의 접근성이 매우 좋은 곳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항해시대의 서막을 연 후, 뒤이어 뛰어든 나라가 있었는데 이는 네덜란드였다. 세네갈에서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어서 1588년에 네덜란드가 포르투갈로부터 이 섬을 빼앗고 이를 서부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전진기지로 구축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은 이 섬을 Goede Reede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좋은 항구(정박지)’라는 뜻이었다.
좋은 항구란 어떤 의미였을까? 당시 노예 무역은 대단히 이익이 많이 남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 섬은 좋은 항구였다. 이 명칭은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대하는 시선을 그대로 담고 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는 단지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는 장소였을 뿐이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에는 오직 그러한 가치를 환기시키는 명칭들만이 붙여졌다.
서아프리카의 해안들에 붙여진 ‘상아 해안(Côte de l’Ivoire, Ivory Coast)’, ‘황금 해안(Côte de l’or, Gold Coast)’, ‘노예 해안(Côte des esclaves, Slave Coast)’, ‘후추 해안’(Côte du Poivre, Pepper Coast)’ 등의 이름들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또한 각각 ‘풍요로운 항구’와 ‘풍요로운 해안’이라는 뜻의 중남미의 푸에르토리코 (Puerto Rico)와 코스타리카(Costa Rica)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가 풍요로웠을 테니까.
한편 네덜란드에 이어 후발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선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고레 섬에는 영국인들보다 프랑스인들이 먼저 왔는데, 이들은 1677년 11월 1일에 네덜란드인들로부터 이 섬을 넘겨받은 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름도 네덜란드어인 Goede Reede를 Gorée(고레)라고 프랑스어화했다. 프랑스인들은 뒤이어 찾아온 영국인들과 전쟁을 통해 소유권을 주거니 받거니했지만 1802년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랑스가 지배했다. 1804년부터 1817년까지 잠시 영국인에게 점령되기도 했지만 이후 프랑스로 반환되었으며, 세네갈이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는 줄곧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노예의 집
고레 섬에는 세네갈 역사 박물관(le Musée historique du Sénégal), 해양 박물관(le Musée de la mer), 여성 박물관(le Musée de la femme), 고레 교회와 모스크(l’église et la mosquée de Gorée) 등 여러 명소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곳은 ‘노예의 집(la Maison des esclaves)’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이곳은 교황 요한바오로 2세(Jean Paul II)가 1992년 방문했고 2013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 2015년 클린턴 대통령 등 각국의 정치 지도자와 많은 유명인들이 다녀갔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유럽을 잇는 삼각 무역의 역사적 중심지이며, 흑인 노예 무역의 상징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육지의 항구가 아니고 고레 섬이었을까? 카보 베르데 곶과 함께 고레 섬의 지리적 위치와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이유 외에 바다에 의해 고립된 섬이기 때문에 노예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점이 작용했다. 이유가 너무 잔인하다. 그러나 잔혹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고레 섬에는 각각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2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총 28개의 수용소가 있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연안에 위치한 모든 집 들이 거의 다 노예 수용소였다고 보면 된다.
첫번째로 지어진 수용소는 1536년 포르투갈인들이 지은 것인데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현재는 가장 마지막에 지어진 ‘노예의 집(La Maison des Esclaves)’이 유일하게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노예의 집’은 1776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1783년에 노예와 백인의 혼혈(씨냐르, signare라고 불림)인 안느 페팽(Anne Cola Pépin)을 위해 건립했다고 하며 그녀의 조카 안나 콜라스 페팽이 거주했다고 한다.
500세파프랑(한국 돈 1000원에 해당)이라는 값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말굽처럼 생긴 좌우의 두 개의 계단을 볼 수 있다. 이는 노예들의 공간인 1층에서 식민지 경영자들의 공간인 2층으로 인도하는 계단이다.

1층은 창을 작게 두어 어둡고 습하고 환기가 안되는 방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예들을 수용하고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반면에 2층은 창을 넓게 두어 밝고 통풍도 잘되고 좋은 환경의 공간이다. 1층에는 성별과 연령별로 구분하여 노예들을 수용했는데, 남자와 여자, 성인과 아이 및 노인들은 값이 다르게 매겨지기 때문이다. 몸무게도 중요한 요인이었는데, 성인 남성의 최소 체중은 60kg이었다. 그래서 60kg이 안되는 남성은 별도로 관리하여 탄수화물이 높은 콩인 니에베(niébé)를 억지로 먹여 체중을 불렸다.
남자 노예들의 방은 2.6m x 2.6m의 크기였는데, 15명 내지 20명을 수용했으며 이들은 등을 벽에 대고 기대어 앉아 있어야 했고, 목과 팔에는 항상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실제로 들어가 보면 숨막히도록 작은 공간이어서, 어떻게 이런 곳에 사람이 기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하루 1회만 화장실에 가는 것이 허락되었고, 오직 이때만 이 방을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위생은 말할 수 없이 열악한 상태이다. 게다가 여자 노예들의 경우는 집주인이 원하면 언제든 화장을 시켜 2층으로 데려가 성을 착취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누이와 아내와 어머니라고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낀다.
노예들은 이곳에서 길면 3개월간 대기하다가 아메리카로 가는 배를 탔다. 자기 이름이 아니라 등록번호로 표시되어 승선했다. 고레 섬에는 꼭 배 모양을 하고 있는 집들이 보여 눈길을 끄는데 이는 팔 노예들을 미리 배 구조의 집에 수용하여 적응을 시키고 탑승 인원을 미리 정확하게 가늠해 보려는 목적이라 한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인간이 아니라 정말로 짐으로밖에는 취급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실제로 ‘노예의 집’에 들어가 보면 배에 노예들을 수용하는 배치도를 볼수 있다.

이들은 많은 도구들로 고문을 가해 노예들을 복종시켰으며, 낙인을 찍어 분류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도록 했다.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거나 탈출을 시도하는 자들은 별도의 방 ‘반항자들의 방(cellule des recalcitrants)’에 수용하였는데, 여기에는 창문을 두는 대신에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도록 1자형 틈만 두어 우울감과 극한의 공포감을 맛보게 하였다.

수용기간이 지나고 배가 도착하면 꼼짝없이 배에 올라야 한다. ‘노예의 집’에는 ‘돌아오지 않는 여행의 문(la Porte du voyage sans retour)’이라 불리는 문이 있는데 노예들은 이 문을 통해 배를 탔다. 도망칠 것에 대비하여 무장 경비들에 의해 양팔을 묶인 채. ‘노예의 집’은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모든 악마적 본성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런데 이 엄청난 비극적 이야기가 어쩌면 사기극일지 모른다는 르몽지의 한 기사로 인해 거대한 소용돌이가 시작된다. 진실성 공방에 빠진 고레 섬과 ‘노예의 집’,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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