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집’ 스토리텔링, 그 뜻밖의 진실

[박만규의 광복절 기획 칼럼]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이유-② ‘고레 섬’ 노예무역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노예의 집'에 전시된 그림.
'노예의 집'에 전시된 그림.
  • 해마다 광복절이면 우리가 독립된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다른 나라에 예속되어 타민족에게 우리의 자유를 구속당하고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지 못하고 남에게 부림을 받는 처지가 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예속의 정도는 법적, 사회적, 경제적, 인격적 측면에서 참으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에서 인류의 역사상 가장 혹심한 흑인 노예의 실상을 필자가 얼마 전 다녀온 세네갈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 ① ‘고레 섬’, 노예 무역의 상징 ② ‘노예의 집’ 스토리텔링의 진실 ③ 왜 인간은 다른 인간을 노예로 만들까? ④ 노예 무역은 무엇을 남겼나?

어떻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이 작은 ‘고레 섬’이 전 세계의 주목을 끄는,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노예 무역의 상징적인 장소로 떠오르게 된 것일까? 이는 이 섬에 자리한 ‘노예의 집’의 한 관광 안내인(cicérone) 조제프 은디아이(Joséph Ndiaye)의 놀라운 재능과 집념이 만들어낸 성과라 할 수 있다.

조제프 은디아이(Boubacar Joseph Ndiaye, 1922 - 2009)
조제프 은디아이(Boubacar Joseph Ndiaye, 1922 - 2009)

그는 고레 섬 출신의 집안 후손으로 고레 섬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뒤 인쇄소의 식자공으로 일했다. 그러다 (당시 세네갈은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므로) 1943년 프랑스 군에 징집되어 2차대전에 참전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세네갈에 돌아왔고 이후 1962년에 ‘노예의 집’의 관리인(conservateur)이 되어 죽을 때까지 이 직을 수행했다.

그는 달변에 사람을 끄는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설명하는 노예의 집은 고레 섬을 넘어 세네갈의 정부관료뿐 아니라 미디어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 이후 그 명성은 국제기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의 해설을 듣노라면 모든 사람들이 빠져들었다고 한다. 노예들이 겪었던 지옥 같은 일상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누구도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수차례에 걸쳐 TV 출연도 했는데, 청중들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필자도 그 방송을 본 기억이 있는데, 확실히 그는 설득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천성적인 이야기꾼이었던 그의 이러한 재능과 노력은 정말로 많은 것을 이끌어 내었다. 우선 ‘노예의 집’을 1975년 세네갈의 역사유적지 목록에 올리고 이어 1978년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오르게 했다. 이는 노예의 집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 보존과 보수의 재원 마련을 위해 유네스코 후원 아래 프랑스와 세네갈 우체국에서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그리고 유네스코는 1990년 ‘노예의 집’에 리노베이션을 단행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은디아이가 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작은 섬이었던 고레 섬이 이렇게 유명세를 타자, 세네갈의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은 견학을 위해 필수적으로 방문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미국 등에서 오는 흑인들도 주요한 방문객의 하나가 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소울의 전설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도 있었다.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를 비롯한 각국 대통령과 수상 같은 정치 지도자들도 앞다투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노예 무역의 중심지라 불리던 고레 섬
노예 무역의 중심지라 불리던 고레 섬

노예의 집은 사기인가?

그러나 고레 섬은 한 신문 기사로 인해 커다란 분란에 휘말리게 된다. 저널리스트 에마뉘엘 드 루(Emmanuel de Roux)가 1996년 12월 27일자 르몽드에서 「현실에 저항하는 ‘노예의 집’의 신화」(Le mythe de la Maison des esclaves qui résiste à la réalité)라는 칼럼에서 노예의 집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압둘라이에 카마라(Abdoulaye Camara)와 예수회 신부 브누아(le père jésuite Joseph-Roger de Benoist)의 연구를 인용하며 노예의 집에 관한 내용 모두 혹은 대부분이 허위라고 주장했다.

‘노예의 집’은 은디아이가 설명하듯이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이 지어 실제 무역을 위해 노예들을 강제 수용했던 장소가 아니라, 노예 무역이 종반에 이르렀을 때 부유한 혼혈 여성 시냐르인 안나 콜라스 페펭(Anna Colas Pépin)을 위해 1783년 프랑스인들이 지은 것이라는 폭로였다. 그래서 이곳으로부터 많은 노예들이 신대륙으로 향한 노예무역의 중심지라는 주장도 허위라는 것이다. 1층 방은 하인 노예들의 주거시설로 이용되었을 수 있을 뿐, 팔아넘길 노예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아니었으며, 처음부터 물건 보관 창고로 쓰인 곳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고레 섬은 노예 해안, 기니만 또는 앙골라의 상관들과 비교할 때 기껏해야 연간 2백~5백 명의 노예를 거래한 것에 불과하여, 결코 노예 무역의 활발한 중심지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노예의 집에 대한 이야기는 12년에 걸친 은디아이의 재능 덕에 오늘날에는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지만 하나의 전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르몽드의 기사는 고레 섬을 충격에 빠뜨렸고, 이후 커다란 학문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흑인무역 통계 전문가 필림 커틴(Philip Curtin)과 세네갈의 역사학자 압둘라예 바틸리(Abdoulaye Bathily)와 음바예 게예(M’Baye Guèye)가 뛰어들어 대체적으로 르몽드의 주장을 지지하는 입장을 폈다.

이러한 비판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에 대해 1997년 4월에 국립 다카르대학의 IFAN(Institut Fondamental d’Afrique Noire 흑아프리카 기초연구소)는 세미나를 조직하여 조사에 착수했으며 세네갈과 아프리카 역사가와 연구자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조사 결과 식민시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체들, 즉 연구자, 역사가, 관리자, 보존가, 정치인, 공동체의 대표자들, NGO의 대표자들, 기자 등에 의한 담론과 기억에 있어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또한 프랑스에서도 1997년 소르본대학에서 이에 관한 학술대회가 열렸는데, 어떻게 고레 섬의 신화가 탄생할 수 있었는지를 구체화하는 논문들이 발표됐다. 이로써 ‘노예의 집’이 노예 무역이 진행될 때의 노예 수용소가 아니라, 노예무역이 폐지된 이후인 18세기 후반 혹은 심지어 19세기 초반에 일부 노예들을 수용했던 감옥이나 창고로 사용되는 공간이었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는 분위기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역사학자 장뤽 앙그랑(Jean-Luc Angrand)이 비판의 대열에 가세했다. 노예의 집에 관한 은디아이의 이야기는 본래 1950년대 프랑스 해군의 군의관인 피에르 앙드레 카리우(Pierre André Cariou)가 지어낸 이야기였는데, 이를 당시 그의 심부름꾼이었던 10대 소년 조제프 은디아이가 듣고 이를 크게 퍼뜨리는 사기극을 펼쳤다는 것이다.

1976년에는 알렉스 헤일리가 미국에 노예로 끌려온 쿤타 킨테와 그 후손들의 고난에 찬 삶을 그린 ‘뿌리’라는 소설을 출간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는 이듬해에 미국 ABC의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졌고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TV로 인기리에 방영이 된 바 있다.

이 드라마는 미국의 흑인들에게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는데, 당시 이들을 맞이할 준비가 잘 되어 있었던 곳으로는 은디아이가 있던 고레 섬이 거의 유일했다. 쿤타 킨테가 잡혀온 곳도 세네갈에 둘러싸여 있는 감비아였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이들 미국인 흑인 관광단을 유치하기 위해 세네갈 정부는 이를 비즈니스화하여 수익을 창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다카르 대학의 교원들도 이 비즈니스의 수혜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은디아이로부터 연수를 받고 미국 대학들의 초청을 받아 ‘노예 무역의 강사’로 활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콜럼비아대학 같은 곳의 교수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재반론

그러나 저널리스트 무사 지옵(Moussa Diop)과 역사학자 모마르 음바예(Momar Mbaye)는 역사학자 장뤽 앙그랑에게 증거를 제시하라고 역공을 펼친다. 역사적 근거가 없는 날조라는 주장을 펼쳤던 앙그랑도 아이러니하게 정작 자기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고레 섬이 탐욕스러운 상업주의와 관광 비즈니스가 만든 허상이라고 공격하지만, 그러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카르대학 교수들을 ‘돈을 더 벌기 위해 거짓을 날조했다’고 비난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게다가 르몽드 기사의 단초가 되었던 카마라와 브누아의 연구는, 은디아이가 제시한 수치가 너무 과장되었다는 것이지 고레 섬이 노예 무역의 중요한 장소라는 사실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1726년에서 1755년 사이에 매년 약 500명의 노예가 섬에서 팔려나갔다고 했으며, 1761년에서 1848년 사이에 이송된 노예도 1만5476명에 이르렀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이는 당시의 인구 통계학적 조건에서 보면 엄청난 숫자였다. 이에 앙그랑은 고레 섬에 노예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견해가 틀렸음을 받아들였다.

노예제도 기억위원회(Comité pour la mémoire de l’esclavage) 의장이었던 프랑수아즈 베르제스(Françoise Vergès)는 “고레 섬에서 다른 중심지들처럼 많은 노예들이 팔려나간 것은 아니었다. 고레 섬은 결코 노예 무역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임시 막사도 아니었다. 몇몇 사실이 과장되었다고 고레 섬의 슬픈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모든 진실은 연속된 오류의 수정이다

전문가들조차 찬반 양론으로 분열된 이 문제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우선 비판이 집중되었던 ‘노예의 집’은 실제 팔려나갈 노예들을 수용했던 장소가 아니었으므로 장소는 잘못 적시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노예 수용소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둘째, 실제로 포획된 노예들이 고레 섬에는 많이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숫자가 과장되었던 것이다. 미국인 역사학자 필립 커튼(Philipp Curtin)은 고레 섬에서 출발한 노예들이 실제로 900~1500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역시 지나치게 적게 평가하는 축소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항구 도시인 낭트의 공문서 보관소에 보관된 문서들에 의하면, 1763년에서 1775년 사이에만도 10만3000명이 넘는 노예들이 고레 섬으로부터 낭트항을 통해 매매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1200만명이 넘어간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이지만 고레 섬은 흑인 디아스포라의 기억과 가슴 속에 상징으로 남아 있다.

셋째, ‘노예의 집’은 상업주의적 정책의 소산이라는 주장, 특히 뿌리를 찾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어진 전설일 뿐이고, 많은 이야기들이 은디아이의 스토리텔링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엄격하면서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분명히 일부 거짓과 착오와 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은디아이의 노력으로 고레 섬은 아프리카 후손들의 디아스포라를 기념하는 순례지로 상징화되었고 이로 인해 박물관이나 기념비 건립의 이권의 개입과 관광지로 육성하려는 상업 권력의 개입이 뒤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게다가 은디아이는 역사학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들은 이야기들을 학문적으로 고증하는 절차를 거치지 못했다. 관광이 됐든, 좋은 의미의 역사 콘텐츠의 개발이 됐든, 혹은 순순한 의도의 노예제의 실상에 대한 발굴 및 보존이 됐든, 격화되는 경쟁 속에 스토리텔링이 개입되고 역사적 고증은 등한시 되는 상황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역사에는 거짓이 없어야 하므로 역사학자들을 통한 철저한 재조사와 고증을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

무사 지옵이 인용한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말처럼 “모든 진실은 연속된 오류의 수정이다.” 그 동안 학자들의 치열한 논쟁과 철저한 조사로 그러한 고증이 이루어졌다. 이제는 재정비를 하였으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일부 사실이 아닌 스토리텔링이 있다고 해서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은디아이가 추구했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그것이 개인적 명예나 치부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저 순수했던 동기로 인정하고 싶다. 비록 역사적 고증은 부족하더라도 이 지역에 상징성을 입히고 잊혀져 가던 어두운 역사를 다시 재조명하고 재평가받도록 한 공로는 모든 이들이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전문가들의 논쟁을 넘어서, ‘노예의 집’의 현황이 노예무역과 노예제도에 대한 기억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늘날 이 작은 섬이 잊혀져가던 역사를 되돌이킬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 된 것에 대해서는 분명 은디아이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도 고레 섬은 우리 인류의 가슴 아픈 역사가 망각의 파도에 떠밀려 사라지지 않도록 붙들어 매주는 닻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 *

왜 인간은 다른 인간을 노예로 만들까?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했던 것일까? 포획자는 누구였으며, 판매자와 구매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또 그 과정에 많은 협조자와 방조자들이 있었을텐데 그들은 누구였을까? 다음 ⓷편에서는 이러한 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글쓴이

박만규 아주대 교수

박만규 아주대 불문과 교수는 언어에 관한 다양한 주제, 특히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언어, 어원과 인간의 사유, 한국어와 영어/프랑스에 나타난 세계관의 차이, 현대 프랑스 문화의 기원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사전학회와 한국프랑스어문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프랑스정부 학술공로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설득언어’와 ‘빛나는 당신이 있다면 촛불을 켤 필요가 없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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