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떻게 노예를 만들었을까
[박만규의 광복절 기획 칼럼]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이유③ 노예 포획이 ‘교활함의 극치’였다면, 노예화 과정은 ‘잔인함의 극치’였다
- 해마다 광복절이면 우리가 독립된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다른 나라에 예속되어 타민족에게 우리의 자유를 구속당하고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지 못하고 남에게 부림을 받는 처지가 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예속의 정도는 법적, 사회적, 경제적, 인격적 측면에서 참으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에서 인류의 역사상 가장 혹심한 흑인 노예의 실상을 필자가 얼마 전 다녀온 세네갈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 ① ‘고레 섬’, 노예 무역의 상징 ② ‘노예의 집’ 스토리텔링의 진실 ③ 왜 인간은 다른 인간을 노예로 만들까? ④ 노예 무역은 무엇을 남겼나?
누가 노예들을 포획했는가?
노예를 잡아 아메리카에 팔려고 했던 바로 그 유럽인들이 노예를 포획했을까? 대답은 놀랍게도 ‘아니다’이다. 노예를 생포하여 유럽의 상인들에게 넘긴 사람들은 불행히도 현지인들이었다. 즉 흑인 부족들이 다른 흑인 부족들을 잡아 유럽 노예상들에게 팔아넘긴 것이다. 예컨대 카요(Cayo)왕국의 월로프족(Wolofs) 왕들과 투쿨뢰르족(Toucouleurs) 왕들이 노예를 잡아둔 부락들의 소유주들이었다. 거래에 참여한 왕들의 이름과 회계 장부를 비롯한 관련 기록들이 파리의 국립 프랑수아 미테랑 도서관(Bibliothèque François-Mitterrand; BnF)에 있다.
유럽인들이 처음부터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 초창기에는 물물교환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생길 정도로 노예 무역이 비즈니스화 되면서 그들은 현지에 기지를 설치하고 정착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분할과 정복을 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아프리카 부족을 분열시키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총기를 가져와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서로 총기로 위협하면서 생포해 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들에 고질화되어 버린 부족 간 내전의 기원이 될 줄이야...
물론 이러한 부족 간의 인간 사냥을 거부한 부족장들이 있었다. 레부족(Lébous)과 세래르족(Sérères) 같은 부족들은 이러한 노예 거래에 강력히 항거하였다고 대항해 시대(Grandes découvertes)의 베네치아 출신 탐험가 알비세 카다모스토(Alvise Cadamosto)의 기록은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부족장들은 날이 갈수록 입장이 불리해져 갔다. 그들은 백인들에게 더욱 협조적인 다른 부족들에 의해 밀려나거나 제거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은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을 떠올리게 한다. 한 세력을 이용하여 다른 세력을 제어한다는 이 전략은 행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효율적인 전략일 수 있지만, 당하는 측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잔인한 처사가 없다. 이는 내부분열, 즉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유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교활한 이이제이 전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잡아온 흑인 노예들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관리인 또한 흑인으로 임명하거나 (백인과 흑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으로 임명하곤 했다. 세네갈의 고레 섬을 비롯하여 뤼피스크(Rufisque)와 생루이(Saint-Louis) 등에서 백인과의 혼혈로 태어난 여성들을 프랑스어로 씨냐르(signare)라고 불렀는데, 침략자들은 이들에게 고무나 땅콩, 가죽, 금 등을 거래할 수 있는 특권과 높은 사회적 지위도 부여해 주었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사람들에게는 부를 누리게 해 주었다.
어떻게 노예로 만드는가?
이렇게 이이제이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노예 포획 단계 다음에는, 인계받은 노예를 구매자에게 판매하기 전까지 일정 기간 수용해 노예로 만드는 단계로 들어간다. 노예 포획이 ‘교활함의 극치’라면 노예화의 과정은 ‘잔인함의 극치’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자유민을 노예로 만드는 첫 번째 단계는 모든 자유를 박탈하고 정신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감행할 경우 엄청난 공포가 닥쳐올 것임을 주입시킴으로써 그를 ‘오직 복종하는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쇠사슬에 묶고 반쯤 벌거벗기고, 달군 쇠로 낙인을 찍는다. 이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잃어 버리고 익명의 존재가 된다. 이제 가족도 없고 이름도 없이, 단지 번호로만 분류된다. 마치 하나의 짐짝처럼 말이다. 이러한 순응화를 위해 노예들에게 회초리와 채찍질이 지속적으로 동원된다.
이렇게 인격이 완전히 말살된 노예는 이제 구매자에게 넘겨져 반항하지 않고 주어진 강제 노역을 수행하는 도구가 된다. 매매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정체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구매자는 노예에 대해 노동은 물론 신체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갖게 된다.
노예제에 대한 학자, 왕가, 교회의 입장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노예제도는, 노예가 노동을 담당함으로써 자유인, 특히 상류층에게 학문과 예술 활동을 통한 높은 지적, 문화적 성취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제도였으므로, 자유민의 입장에서는 비판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좋은 제도라고 예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존경받는 학자들도 이러한 대열에 동참했다.
“이성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지적·도덕적으로 더 우월한 사람의 노예가 될 필요가 있다”라는 말과 “노예제는 자연적 질서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 종속되고, 어떤 사람은 타인을 지배한다”라는 말을 한 사람이 각각 플라톤(Platon)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라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이런 견해는 유럽에서 17세기까지도 지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아무도 그 부당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자 국익을 위해 유럽의 여러 나라는 앞다투어 노예 무역에 뛰어들었으며 이를 합법화했다. 프랑스의 경우 루이 13세는 1642년 노예무역을 허락했고 루이 14세 시대의 재상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는 1670년 노예 무역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학자들과 왕가들이 노예제를 옹호하는 입장을 표명할 때 교회는 어떤 조처를 취했을까? 그래도 교회는 노예를 보다 인간적으로 대접하려는 박애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면 이는 완전한 오산이다. 사실 미국의 역사학자 램지 맥멀런(Ramsay MacMullen) 교수가 밝혔듯이,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제국의 황제들은 노예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하려는 그 어떠한 노력도, 그 어떠한 법도 만들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기 교회는 노예제를 당연시하였고, 그리스의 교회사 연구자 키르타타스(Dimitris J. Kyrtatas) 교수는 심지어 기독교가 고대 노예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까지 했다. 아닌 게 아니라, 5세기 초 이래 교황과 종교회의는 교회와 성직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소유한 노예의 해방을 제한하거나 심지어 금지하는 일련의 판결을 내렸다. 이는 정말 우리를 아연실색케 한다. 결국 그 당시의 교회도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는 데만 관심을 두었을 뿐이었다.
존 뉴턴의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이처럼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던 교회가 차츰 반대의 입장으로 선회하고 마침내 폐지론으로 전향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명한 찬송가 ’에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의 작곡자로 유명한 영국 성공회의 목사 존 뉴턴(John Newton)이다.

그는 본래 흑인 노예를 수송하는 노예무역에 종사하던 사람이었는데, 22살 때 그가 탄 배가 아일랜드 앞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침몰할 위기에 처했을 때 하느님에게 드린 기도가 응답을 받아 기적적으로 폭풍우를 벗어나 무사히 귀환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체험을 소재로 1772년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썼는데, 이 곡은 흑인 노예 무역에 몸담았던 것을 깊이 후회하고, 자신이 나쁜 죄를 지었음에도 이를 사하여 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한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노예제의 폐지를 위해서는?
흑인 노예들은 고통스러운 생활을 견디다 못해 여러 방법을 통해 저항을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나아가 온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 탈주를 감행하기도 했다. 급기야 시간이 갈수록 탈주 노예들이 자율성을 가지는 지역이 점차 늘어났다. 특히 1789년 프랑스혁명의 발발은 흑인들의 해방 운동에 불을 붙였다. 1791년 산도밍고(Saint-Domingue, 현재의 아이티 공화국)에서 흑인 노예 출신인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써 최초의 흑인 공화국을 개국했다. 아메리카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한 나라였다.

여러 지역에서 계속된 투쟁의 결과 노예제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산업의 기계화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단순 반복의 육체노동보다 높은 효율을 보여주었다. 사실 노예를 이용한 노동은 감시와 관리를 위해 또 다른 인력을 고용해야 하는 부담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기계화가 점차 산업 곳곳에 파급되면서부터는 이제 더 이상 효율적인 시스템이 아니게 되었다.
여기에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보급한 자유와 평등 사상의 영향으로 노예제도는 반드시 폐지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이제 왕가와 교회의 입장도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노예 무역은 한낱 인간의 경제적 욕심이 만들어 냈지만, 이것의 폐지를 위해서는 피해자들의 피눈물 나는 저항뿐 아니라, 기술의 발전과 그것이 만들어 낸 사회 구조의 변화,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가 함께 합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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