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가 내 아이라면?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서’] 영화 ‘케빈에 대하여’, 모성을 시험하다 모성은 폭력적인 아이를 수용할 수 있을까
<’모성애에 대한 시험’ 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면 스포일이 나올 수 밖에 없음을 미리 밝히니 원치 않는 분은 영화를 먼저 보고 읽기를 권합니다>
사이코패스를 낳은 엄마
지난번 칼럼 ‘엄마는 죽었지만 잘 지낸단다’에서는 엄마라는 위치의 양가성에 대해 다뤘는데, 이번 칼럼도 그와 연관된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모성애는 남녀 간의 사랑 못지않게 영화에서 많이 다뤄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모성과 관련해서 가장 파격적인 영화를 한편만 고르라면, 2012년에 개봉한 린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를 꼽고 싶다. 이 영화 역시 지난 칼럼에서 다뤘던 <로스트 도터>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두 영화 모두 엄마가 됨으로써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좌절감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케빈에 대하여>는 엄마로서 겪어내야 하는 시련을 극대화하고 있다. 하지만 엄마의 희생을 강조하는 영화와는 다르다. <케빈에 대하여>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들 캐릭터인 케빈(에즈라 밀러 분)이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다. 사이코패스를 접근불가인 타자로 놓고 적대시하는 스릴러물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 엄마는 거부감을 누르고 사이코패스 아들을 수용하려고 노력한다.
케빈은 사이코패스로 진단할 수 있는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공감 능력이 없고, 냉정하고,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잘하고,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자기 중심성을 지니고 있다. 사이코패스의 원인이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고 논란의 여지가 많다.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졌지만 부정적으로 발현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나무랄 때 없이 훌륭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음에도 사이코패스가 된 경우도 보고된 적이 있다.

그런데도 영화는 케빈이 사이코패스 성향을 갖게 된 원인이 엄마로부터 기원하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연출됐다. 엄마인 에바(틸다 스윈튼 분)는 임신 사실을 안 순간부터 우울증에 시달린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미혼이었을 때의 에바와 아이를 태중에 품은 에바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서 보여준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거부감을 느꼈던 에바는 양육을 하면서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결혼 전에 에바는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모험을 즐기는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그런데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한 에바는 그 뒤로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다. 생기발랄한 모습은 결혼이후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는 임신한 에바와 같은 상황에 있는 다른 여성들을 비교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임신부들을 위한 강좌에서 배가 나온 다른 여성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는 사이에 끼여 넋이 나간 듯 초점 잃은 눈빛을 한 에바의 모습이 보인다.
엄마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아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붉은색은 매우 위협적이다. 첫 장면부터 등장해 불길한 느낌을 강조하면서 욕망과 공포를 번갈아 보여준다. 토마토 축제에서 붉은 토마토 과육을 뒤집어쓴 채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에바가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집과 자동차, 그리고 방의 벽 위에 흩뿌려진 붉은 색 페인트를 쳐다보는 에바가 있다. 붉은색 페인트는 피를 연상시킨다. 케빈이 식빵 위에 딸기잼을 넘치도록 바를 때도 불길한 느낌을 준다. 종국에 터질 엄청난 사건을 암시하는 복선은 붉은색과 함께 영화 전반에 깔려 있다.

아이는 마치 엄마를 괴롭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엄마의 바람과는 어긋나게 행동한다. 기저귀를 갈자마자 일부러 변을 본다거나, 공놀이를 할 줄 알면서도 마치 엄마를 비웃듯이 쳐다보면서 공을 넘겨주지 않는다. 갖가지 기행으로 엄마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처럼 군다. 에바는 아이의 그칠 줄 모르는 울음소리에 지쳐 소음이 큰 공사장에 유모차를 세워놓은 채 아이의 울음소리 또한 소음으로 취급한다.
에바는 아이 앞에서 “그거 아니? 너를 낳기 전에는 엄마는 행복했어”라고 내뱉는다. 케빈의 기이한 행동은 커가면서 더 심해진다. 자신에게 무조건 신뢰와 애정을 보내는 아버지 앞에서는 다정한 척 행동하지만, 엄마에게 보내는 눈빛에는 경멸과 조소가 담겨 있다. 에바가 케빈의 여동생을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보낼 때, 케빈은 분노의 눈빛을 하고 에바를 쏘아본다. 자식을 향한 엄마의 감정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을 계속 부정하고 괴롭히는 자식에게 애정을 갖기도 힘들다. 살갑게 구는 자식에게 애정이 더 갈 수밖에 없다.
이 갈등과 증오는 어디에서 왔나
이 영화가 독특한 점 또 한 가지는 아들과 엄마의 관계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두 사람을 동일시하는 장면들을 삽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엄마와 자식 간의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를 상징하듯이.
세면대의 물속에 잠긴 에바의 얼굴이 갑자기 케빈의 얼굴로 바뀌었다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다시 에바가 된다. 케빈이 학교 강당에서 친구들을 화살로 쏘아 살해한 사건이 터진 후, 세상은 엄마인 에바에게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는다. 길거리에서 만난 희생자의 엄마는 에바에게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아들이 학살 사건을 일으켰는데도 에바의 표정은 그냥 멍할 뿐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거나, 희생자의 가족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듯 일상을 살아간다. 직장을 새로 구하고, 감옥에 있는 아들의 예전 방을 정리하고 아들의 티셔츠들을 다림질한다. 그리고 타인의 멸시와 분노를 아무 말 없이 수용한다. 아들이 죄를 지었으니 엄마도 죄인이 된다.
영화를 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지만 필자는 <케빈에 대하여>는 사이코패스라는 전형화된 캐릭터를 빌려와서 모성의 절대성을 시험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상황을 극단적으로 묘사하기에 사이코패스만큼 적격인 캐릭터도 없다.
케빈의 눈빛과 행동은 마치 ‘이래도 나를 아들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겠어?’라면서 모성을 시험하는 듯하다. 이 시험은 케빈이 끝까지 자신을 신뢰하고 사랑했던 아버지와 다정했던 여동생을 죽이고 자신과 관련이 있는 선생님과 학교친구들을 살해하는 결말까지 이어진다.
케빈은 정작 증오의 대상인 엄마만 살려둔다. 케빈은 자신의 발생지이면서, 성장의 둥지인 엄마에게 복수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엄마를 끊임없이 교묘하게 괴롭히고 종국에는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케빈은 엄마에게 집착하면서 계속해서 증오한다. 사이코패스의 특징 중 하나는 감정이 아예 없거나 순간적인 감정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케빈은 사이코패스의 특징에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엄마라는 존재의 무게감
특히 마지막 장면은 더욱 모호하다. 케빈이 감옥에서 2년의 시간을 보냈을 때, 케빈을 면회 간 에바가 “그날 왜 그런 짓을 했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2년 후에야 비로소 가장 궁금했던 질문이 나온다. 하지만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고 케빈이 내놓은 대답은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때는 알 것 같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다”라는 게 그의 대답이다. 대답을 들은 에바는 케빈을 껴안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들의 대답이 이해할 만한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케빈이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에바는 케빈을 한 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들을 버린 적도 없다. 케빈은 자신을 덥석 껴안는 에바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동안 면회를 오면서 에바가 그런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면회를 끝내고 복도를 걸어 나오는 에바의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도 읽을 수가 없다. 그저 허탈해 보인다. 두 사람의 포옹은 삶이 이제 바뀔 수 있다는 한 줄기 기대감을 보여주는 것일까. 희망적인 대답을 하기 힘들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자식이지만,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진심으로 아들 편에 서서 따듯하게 안아주기도 힘든, 어미로서 감당해야만 하는 고뇌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엄마가 됨으로써 갖게 되는 엄청난 무게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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