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살만하다

[우희종의 ‘좋은 세상’] 기대가 있기에 허무함이 있는 것 삶이 허무한 것은 아니다 성찰과 아름다운 이들로부터 힘 얻어

깨달음
깨달음

우리는 어떻게 허무함을 느끼나

한평생 살아가면서 한 때 허무함을 느끼지 않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유한한 삶의 여정 속에 언젠가는 죽음으로 마무리될 운명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름 열심히 추구하던 가치나 일이 기대와 달리 무너졌을 때 느끼게 된다.

이는 개인적 사안만이 아니라 집단이나 사회 측면에서 겪게 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각자가 생각하는 가치와 이념의 실현이 무너지고 오히려 반대 입장이 더욱 강조되는 사회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회 현상이 지속될 때 허무함을 느낄 수도 있다.

요즘 접하듯이 교수 자녀의 600만원 장학금이 유죄가 되는가 하면, 부동산 기획사 대리 생활 몇 년에 50억원 퇴직금을 받아도 무죄가 되는 사회에서, 몇 백원짜리 라면을 훔쳐 징역을 가는가하면 술집 접대 받은 검사는 초등학생 산수에도 못미치는 계산법으로 무혐의 처분이 된다. 열심히 일하며 노력해 온 일반인들이 어찌 의욕을 잃고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것인가.

또한 광화문 촛불로 박근혜 정부를 탄핵하며 사회개혁을 외쳤던 이들의 요구가 인권 말살의 검찰개혁 요구로 이어진 것은 자연스럽다. 심지어 시민 정당까지 만들어 그 실현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으나 그러한 그들의 열망과 기대가 구현되기는커녕 오히려 정권 교체라는 결과를 낳았다. 한반도 평화 번영보다는 전쟁 위기가 높아지고, 각종 외교 참사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양극화 심화는 더욱 진행되고 있다. 촛불을 들었던 이들에게 허무감을 주지 않을 수 없다.

개인 이유거나 사회 분위기로 인해 좌절과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의 바닥에는 각자의 기대가 있다. 기대하던 것이 채워지지 않거나 무너질 때, 우리는 허무함을 느낀다. 그렇다면 삶은 허무한가?

무수한 생명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도 서로 연결된 채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무수한 생명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도 서로 연결된 채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허무하지 않은 게 없으니 허무할 것도 없다

사람은 지구 생태계 구성원이자, 45억년 지구 역사 속에 등장해 언젠가는 사라질 생명체다. 생태계 내 관계망 속에 먹이 사슬을 이루며 죽어간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과 다를 바 없이 인간 역시 존재하다가 사라져 간다. 지구상에서 태어나 죽어간 무수히 많은 생명체에게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묻는 이는 없다는 것을 통해, 굳이 인간에게만 특별한 삶의 목적이나 삶의 의미를 묻는 것 역시 인간의 오만함을 표명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기대하는 삶의 목적이나 의미는 없다.

하지만 허무함이란 ‘허무하지 않은 것’을 전제로 한다. 삶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은 ‘허무하지 않은 것’을 기대하는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다. 그러나 생로병사의 생자필멸, 만난 이와는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회자정리(會者定離)나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세상 이치 속에 우리가 사라지지 않을 그 무엇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영원한 것은 없다. 내가 기대하는 것을 이뤄 만족하고 행복감을 느낀다 한들, 그것 역시 조만간 변화해 사라져갈 것임을 안다.

조금만 살펴보면 허무의 전제조건인 ‘허무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새삼 허무할 것이 없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비록 개인사나 사회적 분열과 갈등 속에 때로 허무함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기본적으로 삶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막연한 영원에의 설정과 기대가 그리 만들었을 뿐이다. 삶은 우리의 기대나 허무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온전한 과정이다.

‘아 하!’라는 성찰과 아름다운 이들부터의 기쁨

삶이 자체로 온전하고 기대를 통한 허무함도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살 수 있을까? 물론 이 대답 역시 사람마다 다른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전제로, 삶의 유일한 즐거움은 ‘아 하’로 상징되는 끊임없는 배움과 ‘유레카’의 기쁨이 아닐까 한다.

태생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무한한 욕망을 지닌 독특한 존재로서, 희노애락의 오욕칠정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인고의 삶은 우리에게 끝없는 비움을 요구한다. 그것이 허무로 떨어지지 않고, 삶의 기쁨이자 이유가 되는 것은 유레카를 통한 비움의 과정이 주는 대가기 때문이다.

저마다 같을 수 없는 다양한 삶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도토리 키 재기 식의 별로 다르지 않은 평범함으로 채워지는 우리의 일상의 삶이다. 일상이 지닌 차이와 반복은 각자의 유레카라는 인식 전환과 이에 수반된 성찰과 비움으로 인해 재발견되는 삶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이처럼 일상에서의 ‘아 하’라는 개인 인식 변화가 실망과 좌절을 느끼게 하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내면의 힘이듯이, 관계의 연결망 속에 존재하는 우리를 존재케 하는 또 다른 힘은 외부로부터 온다. 내 주변의 아름다운 사람의 존재다.

각자에게 어떤 이가 아름다울 지는 우리의 다양한 얼굴 모습처럼 이념이나 진영에 따라 다르고 종교나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각종 분열과 갈등 속에 때로 실망과 허무를 맛보게 하는 이 세상이 살만한 것은 그래도 그런 아름다운 이들이 있기에 우리의 마음은 새삼 훈훈한 감동과 함께 생의 의욕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늘 상기할 필요는 있다.

때로 삶이, 사회가, 생활이, 혹은 그 누군가가 당신을 힘들게 하고 실망시켜 허무함을 느낀다 해도 자신의 발밑을 보며 ‘아 하’하는 성찰과 함께 눈을 들어 내 주변의 아름다운 이들을 바라보면 역시 삶은 살만한 것이자,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소신의 실현을 위한 지칠 줄 모르는 힘을 얻을 것을 확신한다. 어떤 이념과 진영과 계급에 있더라도 이는 다르지 않다. 다만 무엇이 아름다운 것일까는 각자의 몫이다.

글쓴이

우희종 서울대 명예교수

우희종은 서울대 수의과대학을 1981년 졸업한 후 동경대학교, 펜실버니아대학교, 하버드대학교를 거쳐 1992년 이후 서울대 수의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통일수의학센터장, '사회대개혁지식네트워크' 상임대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앞서 서울대 수의과대학 학장, 전국민교협 상임의장, '더불어시민당' 대표를 맡기도 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